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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 안으로 찾다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 나는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은 사람이었다.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고 가정 형편이 가난한 데다 부모는 내가 20살 좌우 때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줄곧 인간 세상은 고달프고 무상하다고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생명이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90년대 초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엄중한 신경쇠약, 위병과 류머티즘에 걸렸다. 나의 병고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기공을 연마했지만, 당시 사회에서 전한 것은 거의 모두 가짜 기공이어서 전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이후에 나는 포기했다. 당시 기공을 접촉하면서 불도(佛道) 방면의 서적을 일부 봤기에 생명이 해탈되고 승화할 수 있는 고심 대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 나이가 좀 들고 돈을 벌어 가족을 안착시킨 다음 혼자 산에 가서 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94년에 파룬궁(法輪功)을 알았지만, 당시 인간 세상에 진법(眞法)이 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연마하려면 학습반(學習班)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깊이 있게 배우지 않았다. 그러다 1996년 아내가 그녀 동료가 파룬궁을 배운다고 한 말이 우레처럼 나의 마음을 진동했다. 아내는 말했다. “동료가 파룬궁은 진정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즉시 공원에 가 연공장을 찾아 법을 얻었다.

법을 얻은 기쁨과 즐거움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었다. 대법의 거대한 법력과 무한한 내포를 보고 나는 갑자기 가난한 고아에서 가장 행복하고 운 좋은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신체 병고와 가난으로 나는 눈물 없는 사람으로 변했는데 법을 얻은 후 울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었다. 손에 대법 책을 들고 늘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때 일념은 바로 ‘마침내 대법을 얻었고 나에게 사부님이 계신다.’였다.

막 법을 얻었을 때 사존은 나의 신체를 신속하게 청리해주셨다. 대법의 법력이 수련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때 일이 아주 바빴고 아내를 도와 아들을 돌봐야 했기에 잠을 아주 적게 잤지만 매일 법 공부, 연공을 견지했다. 직장 일과 생활이 힘든 줄 전혀 느끼지 못했고 길을 걸으면 거의 뛰었다. 한 가닥 힘이 늘 나를 위로 당기고 앞으로 당기는 것처럼 몸이 통제할 수 없이 위로 솟구쳤다. 한번은 장모에게 약을 사주러 몇 킬로미터 밖의 약방에 뛰어갔다가 또 뛰어서 돌아왔는데도 헐떡이지 않았다.

막 법을 얻었을 때 꿈(사실 완전히 진실한 것)에 사부님께서 나를 데리고 아주 아름다운 공간으로 데리고 가주셨다. 사부님은 도가 사부님의 이미지였다. 그 공간의 색상은 우리 국내의 첫 번째로 출판한 ‘전법륜(轉法輪)’ 책 커버 색상과 같았는데,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남색이었다. 사부님은 그곳에서 나에게 거대한 파룬(法輪)을 보여주셨다. 형용할 수 없이 진실하고 똑똑히 보였다. 깨어난 후 내심은 아주 흥분되고 기뻤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대법을 박해한 후 나는 집에서 진상자료를 만들다가 경찰에 불법적으로 붙잡혔다. 붙잡히는 과정에 사부님의 교묘한 안배로 경찰을 대처하는 중에 아내가 지혜롭게 대응해 나는 풀려났다. 그다음 몇 년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3년 나는 대형 합자기업에 취직했다. 한동안 근무한 후 대법제자의 우수한 인성이 업무 중에 점차 나타났다. 일을 근면하게 했고 고생도 억울함도 마다하지 않았고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을 생각했으며 잘 소통했다. 대법이 지혜를 열어주어 나는 생산관리와 품질관리에서 지혜가 크게 열렸다. 방법이 새롭고 영활했기에 얼마 되지 않아 이 기업은 소문났고 나는 승승장구했으며 중임을 맡았다.

그때 회사에서 해상석유가스 건축 항목을 막 전개했다. 회사는 이 방면의 생산과 품질 관리가 거의 공백이었지만 회사 상사는 이 하기 어려운 일을 전부 나에게 떠맡겼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형식의 구세력이 안배한 박해가 살그머니 등장했다. 이런 업무를 맡은 후 나는 바삐 일해야 했다. 끊임없이 새 품질 체계 인증, 조율 소통, 문제해결을 하느라 바빴다. 저녁에 늦게 퇴근해야 할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휴식할 수 없었고 명절, 심지어 설에도 일해야 했다. 그때 업무 편리를 이용하여 접촉한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시켰지만, 점차 대법과 점점 멀어졌다. 장기간 법 공부, 연공을 이탈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 일하고 교제해야 했다. 동시에 승진하고 봉급도 올라가는 등 대우를 받았다. 이런 생활과 업무상 변화는 끊임없이 나의 당문화 요소를 점점 심화시켰다. 늘 있는 교제로 나는 점차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에 습관 되어 법과 점점 멀어졌다. 이런 속에서 나의 내심은 사실 아주 고통스러웠다. 늘 환경을 바꾸고 싶었고 다시 진정하게 대법에서 착실하게 수련하고 싶었다. 이후에 각종 기연이 이루어져 나는 해외로 나왔다. 하지만 사무치게 힘든 나의 진정한 고난은 해외에 온 후부터 시작됐다.

나는 아들을 데리고 해외에 나왔는데 아내는 여전히 국내에 있었다. 해외에 온 후 즉시 해외 대법 흐름에 투입했다. 나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다. 이국 타향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적적함을 두려워했다. 해외에 온 후 이런 약점이 낱낱이 드러났다. 나와 아내의 정이 깊고 이전에 아내는 생활상에서 나에게 의지했기에 나는 해외에 온 후 고통스럽게 그리워했고 시달림을 받았다. 장기간 이런 상태에 처해 점차 아내 몸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잘 자지 못하고 성격이 점점 거칠어졌고 정서도 우울해지는 추세였다. 나도 그때 정서가 비교적 침체됐다. 대법 활동에 참가할 때만 기뻐했고 집에 있으면 대부분은 답답했고, 고민했다. 이런 정서는 아들에게도 영향이 컸다. 아들은 막 해외에 왔기에 생활상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또 막 대법을 접촉한 후 동급생에게 진상을 알리다 일부 동급생의 능욕을 받았다. 점차 아들은 성격이 고독해지고 증오했으며 게임과 인터넷에 의지하고 좋아했다. 나는 이때 아들의 심신 교육에 주의하지 않았고 인도하고 보호해주지 못했다. 당문화 중의 간단한 학생이 지켜야 할 규칙과 이치를 말하는 방식을 취해 그 이후의 고난에 후환을 남겼다.

해외에 온 후 나의 전공과 일한 경험으로 해외 일과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해외에 온 후 적합한 일을 찾았다가 당시 병업관이 나타나 이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 나는 다시는 적합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떤 때는 힘든 노동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2016년 아들이 현지의 비교적 좋은 대학에 붙었는데 이 학교 학비가 매우 높은 데다 기숙사 비용과 이 도시 임대료도 아주 높았고 나도 방을 임대해야 했다. 현지 집값이 오르는 추세가 아주 빨라 당시 조건으로 집을 살 수 없는 정황인데 집을 샀다. 집을 산 후 생활비용은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아 나는 부득이 힘든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고달프고 생활 압력이 높았다.

2017년에 더 큰 난이 왔다. 아들이 장기간 해외 생활의 압박과 국외 대학의 거대한 공부 압력 때문에 우울증과 같은 질병에 걸렸다. 이런 질병이 주는 시달림, 파괴와 비이성적 행위는 한 젊은이에게 그리고 한 가정에 상상도 형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아내는 해외에 나와 아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정서가 아주 우울하고 나쁜 아내가 해외로 온 후 아들이 이런 질병에 걸린 후의 정서 상태를 보고 어떤 반응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노와 원망이 큰 산처럼 압박해왔다. 내가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대부분 아들이 병이 발작했을 때의 고통, 실망, 원망과 이성적이지 못한 언행이었다. 또 아내의 분노, 질책, 원망과 실망에 나는 극대한 어려움과 고통을 느꼈다.

밍후이왕에서 이런 교류문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수련생이 악의 박해를 받아 징역형을 판결받고 형기가 만기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정신이상이 되고 아들도 가끔 정신이 정상이 아닌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당시 이 교류문장을 본 후 나는 속으로 ‘이 고난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넘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일이 나에게 발생했다. 고난 속에서 고통, 실망, 박해를 부정하고 안으로 찾고 뼈아프게 집착을 제거하면서 점차 걸어 지나왔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상세하게 나의 이 수련 과정과 경험 교훈을 말하겠다.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과 교류하겠다.

이 고난을 걸어 지나온 과정은 주요하게 두 개 방면이다. 하나는 내려놓는 것(생사를 내려놓음)이고, 하나는 안으로 찾는 것이다.

이 고난은 처음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이미 2년 넘는 시간이 지났다. 가장 어려울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음을 느꼈다. 나는 수련하기 전이든 수련한 후든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희망으로 넘쳤던 사람이다. 수련하기 전의 희망은 생활에 대한 동경이고, 수련한 후의 희망은 사부님, 대법과 우리의 귀착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나의 마음속 희망의 불이 켜지지 않을 것 같았고 무기력한 절망과 암흑을 느꼈다. 이런 정황에서 나는 냉정해져야 하고 나에게 나는 수련하여 원만 하려는 사람이라고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사를 감히 내려놓는 것인데 무엇인들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우선 생활상의 경제 압력과 수입이 적은 힘든 노동이었다. 해외의 비싼 생활비용, 주택 대출과 아들 학비 때문에 나의 생활비는 매달 2~3,000달러 부족했다. 매달 나의 은행 통장의 적은 저금을 보면 산 같은 압력이 압박해와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매일 내가 하기 싫어하는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매일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포복으로 전진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압력과 힘든 노동은 나의 수련 상태에 직접 영향을 주었는데, 세 가지 일을 할 때 힘이 따르지 못한 것을 느꼈다. 나는 반드시 나의 수련 상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담한 결정을 했다. 수입이 적은 힘든 노동을 그만두고 생활비와 주택 대출은 내게 갚을 능력이 없으면 그 집을 팔려고 했다. 집착할 것이 없었다.

다음은 아들에 대한 집착이었다. 아들이 막 병에 걸렸을 때 나는 희망으로 넘쳤다. 나는 나와 아들은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법 공부, 연공, 수련 중에서 건강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들의 정황은 더 심해져 이 자신감이 점차 떨어졌다. 이런 질병이 생명에 가져다준 고통과 시달림은 잔혹했다. 나는 아들 사업, 전도에 희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활하는 것마저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이 상태는 오랜 시간 나의 심리에 아주 큰 고통을 주어 이후에 나는 이것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각자 운명이 있다는 사부님의 법리가 끊임없이 나에게 펼쳐졌다. 나는 이 정도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내려놓겠다고 말하면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 고달플 때, 스스로 그 집착을 인식했을 때에야 사부님께서 제거해주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1]

또 아내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생생세세의 인연 관계와 이번 생의 정 때문에 나의 내심에는 아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고생할 때 나는 아주 괴로웠다. (이것을 이전에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음) 이후에 고난 속에서 이 문제를 인식했고 이것은 수련에서 반드시 닦아버려야 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정말 고난 속에서 제거하기란 뼈를 에이듯이 아팠고 이번 고난에서 이것도 내려놓았다.

나는 깊이 알고 있다. 이렇게 큰 고난이 나타난 것은 반드시 나의 수련에서 심성에 누락이 있는 것과 관계된다. 반드시 진정하게 안으로 찾아야 한다.

고난 속에서 안으로 찾고 집착을 깊이 파다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아주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은 어떤 때 아주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연공할 때 예전의 연공할 때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법을 외웠는데, 끊임없이 법을 외웠다. 심지어 일할 때와 운전할 때도 법을 외웠다. 사부님의 한마디 말씀이나 시 한 수라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외웠다. 외우다 보면 법의 내포가 펼쳐졌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내포, 법력이 나를 끊임없이 앞으로 가도록 지탱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2] 이런 엄중한 문제가 나타난 후 나는 깊이 있게 엄숙하게 안으로 찾았다. 수련 중 사람의 주왠선은 쉽게 느슨해질 수 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예를 드신 정신병자처럼 의사가 전기곤봉을 꺼내야 정신을 차린다. 법을 외우고 정념으로 박해를 부정함과 동시에 엄숙하게 안으로 나를 찾았다.

우선 나는 이전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한 일을 통해 이런 일의 심리상태, 사상 활동, 정서변화, 다른 사람 특히 가족이 나에 대한 불만의 말과 이전에 발생한 일부 일에서 나타난 나의 심리상태를 회고하면서 나에게 깊이 숨어 있는 발견하기 어려운 질투심을 발견했다. 이전에 나에게 아주 심한 질투심이 있다고 하면 나는 믿지 않을 것이고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하게 사부님의 설법을 배우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질투심은 ‘질투’와 ‘시기’로 구성된 것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질투, 위사(爲私), 불공평, 자만, 잘난 체하는 것,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것, 열등감.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기뻐하지 않고 마음이 서글프거나 속으로 일부 좋지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거나 축복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다 깊이 숨어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때 자신도 그것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일 처리할 때 늘 상냥한 얼굴로 대했고 다른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했다. 이러면 나는 다른 사람과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기에 친척, 친구와 수련생은 대부분 내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고 나 자신도 아주 좋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표면에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이 숨어있는 것을 몰랐다. 고난 속에서 나는 아들이 병이 심해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질투, 투쟁, 원망, 불공평함, 끊임없는 원망이 각별히 심했다. 처음에는 고민했다. 이 아들이 왜 이럴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후에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법에서 이것이 모두 밖으로 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들의 정확하지 않은 상태는 나에게 숨겨져 있는 문제를 보라고 한 것이 아닌가? 자세하게 안으로 찾아보니 이미 형성된 이런 관념과 성격, 품성이 생명 깊은 곳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이 병이 생긴 상태를 통해 그것들을 10배, 100배 확대하여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에게 그것들을 보게 했다.

색욕의 마음은 내가 수련에서 가장 제거하기 어렵고 굽은 길을 걷기 쉬운 마음이었다. 이것을 나는 발견하고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것 때문에 수련에서 곤두박질하고 굽은 길을 걷기도 했다. 이것이 극도로 싫다고 할 수 있지만, 수련에서 철저하게 그것을 제거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 어떤 때 이미 그것을 제거한 것 같았는데 당신이 허약할 때 당신이 적적할 때 남몰래 사상 속에서 뛰어나왔다. 하지만 이번 고난에서 나는 그것이 제거된 것을 발견했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느끼려 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마침내 이것을 제거하여 기뻤다. 하지만 이 고난이 거의 지나가려 할 때 나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는 내심으로부터 느슨해지고 싶었고 안일한 생활로 그 고난을 겪으면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결과 이것이 또 강렬하게 뛰어나왔다. 나는 후회하며 “이것이 제거되지 않았는가? 왜 또 나오지.”하고 생각했다. 자세히 관찰하니 안일한 마음이 불러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수련에서 안일한 마음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말을 못하게 하는 마음. 사부님께서 당시 다른 사람이 말을 못하게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법을 말씀하실 때 나는 이 방면에 문제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고난에서 마침내 나의 강렬한 나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발견했다. 아들은 병고로 이전에 나를 아주 존중했었는데 나에게 원망으로 가득 찬 아들로 변했다. 이에 나는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웠다. 아내가 나를 더 크게 원망했다. 생활상의 어려움, 일자리 어려움, 신체상의 질병 특히 아들의 이런 질병, 아내는 이것이 모두 나의 잘못과 수련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여겼기에 어떤 때 나에게 매우 화냈다. 이에 나는 아주 고달프고 억울했다.

이전에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어떤 수련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부님의 법상을 보면서 사부님께서 난을 치워주기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이 단락 법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겠지.” 이번에 나는 진정하게 이 느낌을 느꼈다. 나에게 아주 강한 나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기에 평소 가정생활에서, 대외 왕래와 직장에서 나는 남이 뭐라 할까 봐 모두 아주 조심스럽게 일을 잘 처리했다. 이전에 아주 까다로운 동료, 상사 등을 만나면 노력하여 일을 잘하는 방법으로 나를 뭐라 하지 못하게 하거나 회피하는 방법을(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일을 잘하고 일을 원용(圓容)하는 것은 옳지만 내심의 출발점과 집착은 옳지 않음) 썼다. 그 때문에 이런 교활한 방법으로 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회피하여 지나갈 수 없었다. 마지막에 이런 좋지 않은 것을 다 제거해야 한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어떤 때 아내가 주동적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뭐라 하는 걸 싫어한다고 지적했음)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했을 때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마음이 편안했다.

잘못을 승인하기 싫어하는 마음. 나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일을 하기에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 하는 것을 피했다. 동시에 내가 잘못했을 때 교묘하게 막아 지나갔다. 이런 교묘하게 막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 고난 속에서 한번은 아내가 화내며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기 잘못을 승인한 적이 없어요.” 이 말은 나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나의 사상은 슬쩍 지나가려 했다. 나는 ‘나에게 잘못이 있을 때 나는 승인했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자세하게 안으로 찾아보니 내가 잘못을 승인할 때 내심으로부터 내가 잘못했다고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교활하게 표면적으로 대처하고 어떤 때 내심에 원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마음에 숨겨두어 스스로 발견하기 아주 어려웠고 관념이 형성되었으며 처신 방법으로 형성되었다. 이 고난 속에서 아들과 아내가 나를 크게 원망했다. 이후에 자세하게 나의 집착과 이기적인(많은 일을 이전에 늘 세 가지 일을 한다는 구실을 댔다) 마음을 생각했다. 나의 문제를 인식했을 때 나는 성실하게 진심으로 가족에게 사과하고 나의 잘못을 승인했다. 내가 진정으로 나의 집착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려 할 때 가족도 나를 별로 원망하지 않았고 점차 이전의 평화를 회복했다.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가족은 배우처럼 나의 집착심을 연기하여 나에게 보여주었으며 나에게 그것을 제거하게 했기에 어떤 때 그들이 고난을 만든 사람 같았지만 사실 수련을 돕는 사람이었다.

내가 점차 이런 것을 인식했을 때 내 주위 모든 것이 점차 변했다. 아들 정황이 점점 호전됐고 아내도 점점 낙관적이었으며 나도 적합한 일을 찾아 수입도 괜찮아져 집 팔 생각도 없어졌다.

정법시기에 이렇게 큰 고난이 나타난 것은 여기에 반드시 구세력의 교란과 박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그 때문에 반드시 견정한 정념으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구세력의 박해를 반드시 견정하게 부정해야 한다. 조급해서는 안 되고 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늘 발정념이 끝난 후 아들 정황이 호전이 있는지를 보았는데 변화가 없자 마음이 불안하면 안 된다.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고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박해가 멈추지 않으면 정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국내에 있을 때 한 수련생이 아주 큰 고난에 부딪혔다. 먼저 그녀 왼손에 장애 상태가 나타났고 이어서 남편이 또 엄중한 정신병 상태가 나타났다. 남편이 퇴원한 후 그녀와 남편은 또 동시에 온몸이 가려웠고 큰 물집이 나타났다. 당시 수련생은 끊임없이 발정념했다. 그때 사부님께서 막 발정념을 요구하셨을 때이다. 많은 수련생이 발정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는데 이 수련생은 끊임없이 발정념했다. 저녁에 가려워 잠을 자지 못하면 가부좌하고 발정념했다. 약 2년이 지나자 모든 고난이 다 지나갔다. 이 사례는 나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나의 수련 상태가 좋지 않았고 사람도 아주 피곤하여 정념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우리 수련생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수련생은 묵묵히 우리를 도와 발정념하여 나는 그 어려운 시기를 걸어 지나올 수 있었다.

고난 속에서 사존의 감당

법을 외울 때 어느 한번 사존께서 뇌혈전 환자의 업을 감당한 법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즉 말하여 사람은 제도하기가 그처럼 어렵다. 그를 위해 그렇게 많이 했건만,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이렇게 말한다.”[1] 나에게 보여준 법의 내포는 기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고난이 나타난 정도는 사부님께서 감당하시고 난 뒤 나타난 그만한 정도일 뿐이다. 사존께서 감당하시지 않으면 그 고난을 전혀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 사부님의 얼마나 많은 감당이 용입(溶入)되었는가? 법의 내포가 나타난 후 나는 눈물이 샘솟듯 하였다. 우리 존경하는 사부님, 우리 위대한 사존, 제자를 위해 얼마나 감당하셔야 합니까? 밍후이왕에서 일찍이 발표한 문장이 생각난다. 국내 대법제자가 감옥에서 박해받을 때 그 박해가 비록 제자의 몸에 떨어졌지만 다른 공간에서 그것은 사부님의 몸에 떨어졌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시고 감당하시며 제자가 넘도록 격려하셨다. 가장 엄중하게 박해받은 대법제자라 할지라도 그 박해 대부분은 사존께서 감당하신 것이다. 사람의 감당능력은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사존께서 감당하지 않으시면 어느 생명도 걸어지나오지 못한다.

기나긴 수련 과정에 사존께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을까! 나는 꼭 사존의 감당하신 심혈을 소중히 여기고 착실하게 수련하며 정진하여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9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9/8/3924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