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얕게 깨닫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불가(佛家)는 真(쩐)ㆍ善(싼)ㆍ忍(런)에서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선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는데, 자비심이 나오기만 하면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움을 보게 되므로 곧 소원을 품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 한다.”[1] 말씀하신 법 중에서 나는 자비란 선을 수련해 닦아내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떻게 선을 수련하는가? 일에 부딪히면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곧 선을 수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주왠선(主元神)이기에 우리가 선을 닦을 때 진정으로 자신의 주왠선이 타(他)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고 그 생명을 위해 책임지는 것이다.
선량함은 수련인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만약 한 수련인이 선량하지 못하다면 세인 앞에서 대법의 형상에 손상을 입히게 되고 수련생에게는 수련인처럼 보이지 않는 느낌을 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닦는 것은 대법이 우리 대법제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번은 ‘촉광야도(燭光夜悼-밤에 촛불을 밝히고 애도하다)’라는 동영상을 봤는데 기자가 중국에서 해외로 나온 두 사람을 차례로 인터뷰했다. 그녀들 모두 중국에서 잔혹하게 박해받다 뚫고 나온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말투와 표정에서 나는 박해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똑똑히 봤으며 그녀들에게서 수련인의 자비를 볼 수는 없었다.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하지만 불만과 원한 같은 악한 물질이 아직 그녀들의 심중에 남아있었고 그다지 닦아 없애버리지는 못해 보였다. 수련생이 대법을 굳게 수련할 수 있고 잔혹한 박해를 돌파해 나올 수 있는 견정한 일면은 분명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혹형이 왜 그들 수련생에게 발생했는가? 이것이 우연인가? 수련생이 혹형을 당할 때 사부님의 법신이 곁에 계시는데 왜 상관할 수 없었는가?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주시는 것은 이치에 맞게 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들이 바르게 했다면 사부님은 분명 책임지고 결정하셨을 것이고 누구도 그녀들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만약 당신의 마음속 관심이 오직 자신이며, 자신을 진짜 박해당하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구세력의 조종으로 박해를 가하는 경찰을 진짜 박해자로 여기며 심지어 경찰에게 불만과 원한을 품고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구세력은 곁에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악으로써 악을 다스릴 것이기에 경찰을 통제해 당신을 실컷 학대하게 할 것이다.
수련생이 마음에 자비를 품고 있다면, 납치된 후에도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먼저 경찰을 위해 ‘경찰이 구세력에 의해 박해당하는데 내가 발정념으로 경찰을 박해하는 사악을 깨끗이 제거하겠으며 진상을 알려 그들을 구하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전적으로 경찰을 위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이미 완전하게 법에 있는 것인데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박해는 즉시 멈추게 될 것이다. 속인은 보통 악으로 악을 다스리며 문제를 해결할 때 투쟁이나 징벌수단을 써서 해결한다. 하지만 수련인은 정반대로서 대선(大善)으로 악을 제압하며 자비로 일체를 선해한다. 박해 중 우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악한 생각을 움직여서는 안 되며 “자비는 신의 영원한 상태”[2]인 것이다.
중국 대법제자로서 몇 사람이나 장쩌민과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데 대해 원망과 미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우리 대법제자는 진선인을 수련하며, 병을 없애고 신체를 건강히 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사회에 대해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단 한 가지 해로움도 없으며 게다가 국가의 법률도 위반하지 않는데 장쩌민과 공산당은 무슨 근거로 파룬궁을 탄압하는가? 우리에게 너무 불공평하다며 맘속으로 매우 불평하지만 사실 이때 나의 질투심은 이미 매우 강렬해졌다. 그다음에는 장쩌민과 공산당의 파룬궁 탄압에 대해 불만과 원한을 품는다. 장쩌민을 미워하며 보응받아 기름 솥에 떨어지라 하고, 공산당을 미워하며 도태돼 얼른 멸망하라고 한다. 내가 발견한바 자신이 타인에게 공산당의 사악함과 부패를 말할 때 세인이 공산당의 사악함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당에 대한 불만을 발설하는 것이었다.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뒤엎으려 하며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자신의 사상 상태가 옳지 않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3] 장쩌민과 공산당이 대법을 박해하는 것은 죄가 크고 극악한 짓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법제자로 말하면 나는 그것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악이지만 나는 악해서는 안 되며 마음은 법에 부합해야 하고 당연히 자비롭고 선량해야 하며 맘속에 불만과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장쩌민과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가 어떻게 처리되든 법은 스스로 배치가 있을 것이기에 법에 따라 대처하면 되고 개인적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악한 생각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2000년 전 고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선량한 기독교도들이 경기장에 투입됐고 맹수에 의해 무참하게 물려 죽었다. 어떤 기독교도는 묶인 채 불길 속으로 던져져 산 채로 타죽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도는 감옥에서의 학대와 학살 앞에서도 평화와 굳센 인내를 선택해 자신의 신앙을 보호했다. 마침내 갈수록 많은 로마인이 기독교도의 인애와 불굴의 인내에 감동했다. 이렇게 300년을 거쳐 기독교는 인애(仁愛)와 불굴의 인내 속에서 박해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잔혹한 박해를 받을 때도 원한이 없었으며 줄곧 인애로 박해자를 대했다. 왜 일부 대법제자들은 해내지 못하는가? 내가 분석하기로는 기독교도와 중국 대법제자는 수련하기 전의 사상 기초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도의 심태는 비교적 좋았고 그때 인류사회의 사상의식과 도덕관념도 비교적 좋았는데 공산사령의 독해도 없었고 사람들도 비교적 인자하고 선량했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 대법제자는 줄곧 공산사령의 증오로 이루어진 당문화의 독해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것은 애써 사람 마음속에 증오를 주입했다. 증오의 물질요소가 사람의 미시적인 한 층 신체 속에까지 주입되게 해 그것이 사람 생명의 한 부분을 구성하게 했는데 그것이 인성의 악한 것들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예를 들면 질투심, 투쟁, 난폭, 살인을 즐기는 등등이다. 이 때문에 공산 중국의 물질 마당 속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증오에 잠겨 있으며 거의 매 사람 모두 일종의 원인 모를 증오를 갖고 있다. 질투심은 또 불만과 원한 등등을 생기게 할 것이다.
마음속에 이런 악한 물질을 담고 있는 데다가 중공사당의 무신론, 진화론, 계급투쟁, 전통문화 파괴, 당문화 주입은 중국사회의 도덕이 급속도로 추락하고 전면적으로 붕괴되게 해 각종 사상 오염을 조성했다. 이런 사상적 기초에서 수련을 시작하는데 수련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는바, 한 중국 대법제자가 수년간 수련했어도 심태는 당시 고대 로마시기에 수련을 시작한 기독교도보다 못할 수도 있다. 현재를 말해보자. 수년간 수련한 중국 대법제자가 해외에 나와도 그의 심태는 때로 서양의 한 속인보다 못한데 중국 대법제자에게서 중국의 이런 십악독세의 오염과 당문화의 독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대법제자는 선을 수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수련하면서 남과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선을 닦아야 하고, 마음속의 악한 물질을 점차 제거해 선으로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 이렇게 수련해 나아가면 갈수록 선해질 것이고 최후에는 순선(純善)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비이다.
겉보기에 우리는 아직 수련 중의 사람이라 자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수련을 잘한 일면은 자비인 것이다. 우리가 선을 닦는 것을 견지하기만 하면, 일에 부딪혔을 때 먼저 상대방의 처지에서 헤아리고, 상대방을 위해 생각할 것인데 우리가 수련을 잘한 자비를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비로 세인을 대해야 하며, 속인과 교제할 때 이익의 득실 문제가 발생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손해 볼지언정 상대방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면에서 세인을 위해 책임져야 한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도박하러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이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게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진정한 자기 자신, 주왠선(主元神)은 똑똑하며 무엇이나 다 아는데 도박은 위법행위이며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그의 공간장 속의 사람마음인 것으로 도박을 하고 싶은 사람마음이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주왠선을 위해 책임져야 하며 그의 사상 속의 사람마음을 위해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되며 만약 빌려준다면 그를 해치는 짓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世人)에게 진상을 분명하게 알리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위해 책임지는 것으로 그들 생명에게 좋은 미래가 있도록 한다. 일부 세인이 우리가 알리는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욕하고, 고발하고, 때리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대뇌가 인심(人心)과 거짓말에 통제된 것이지 그의 본질적인 자아가 한 것이 아니며 그의 진정한 자신, 주왠선은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려 그를 구해주기를 갈망한다.
수련생의 부족을 보면 진심으로 부족을 지적해줘야 한다. 수련생이 부족을 시정하고 심성이 제고돼 올라오면 매우 좋다. 반대로 수련생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시정하지 않는다면 그저 부족을 포용하면 된다. 만약 수련생과 모순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안을 향해 찾아 먼저 자신을 바로잡은 다음 진솔하게 상대방과 자신이 안으로 찾은 과정을 교류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수련생에게 양해를 구한다.
수련생을 도울 때도 그의 수련을 위해 책임져야 한다. 어떤 수련생에게 병업현상이 나타나면 생활면에서 그다지 편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곤란을 극복하고 정상 생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걸핏하면 적극적으로 세탁, 밥하기, 집안일을 도우며 병업 수련생이 고생을 덜 겪고 생활이 좀 수월하게 한다. 겉보기에는 수련생을 돕는 것이지만 실질상 그는 수련생의 수련을 위해 책임지지 않았다. 수련생의 진정한 자기 주왠선은 일체의 시달림은 수련인에게는 모두 제고하는 좋은 기회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고생을 겪으며 수련해 제고를 얻고 싶어 하는데 그렇다면 도와준 수련생은 진정 그의 주왠선을 도운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 속의 인심 즉,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을 구하는 마음 등을 도운 것이며 또 수련생에게 의뢰심이 생기기 쉽게 한다. 그러므로 말하는바, 수련생을 도울 때 반드시 법에 근거해 도와야 한다. 수련생이 자신의 수련을 바르게 걷도록 도와야 하며 남이 그의 수련의 길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병업에 처한 수련생을 도울 때는 도우면서도 구함이 없어야 하며 어떤 개인적인 목적도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수련생의 수련을 위해 책임져야 한다. 인내심이 있고 한결같은 끈기가 있어야 하며 조급해하지 말고 수련생의 어려움을 이해해야 하며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고 곤란을 당한 수련생이 동료들의 진실함, 선량, 관용, 온정, 믿음직함을 감수하도록 해 수련하려는 신심을 강화해줘야 한다.
사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는데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구세력이 배치한 길이다. 병업가상을 에워싸고 돌면서 날마다 수련생의 신체상태를 주시하며 방법을 생각해 병업가상이 없어지게 하고 수련생이 빨리 병업관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이다. 사부님은 우리가 좋은 일에 부딪히든 나쁜 일에 부딪히든 모두 좋은 일로 여기고 대하며 이 일을 이용해 자신을 수련하고 제고해 최후에는 이 일이 좋은 일로 되기를 바라신다. 다시 말해서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심성을 둘러싸고 문제를 해결하며 무조건 안을 향해 찾음을 통해 심성을 제고하여 심성제고의 관을 돌파하기를 희망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바르게 놓으면 병업가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그런 다음 깨끗하고 바른 심태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며 효과도 좋은 것이다. 이처럼 수련생을 돕는다면 이미 수련생의 수련을 위해 책임진 것이며 법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책임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는바, 병업가상이 나타난 수련생을 도울 때, 병업가상을 둘러싸고 돌며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가서는 절대 안 되고 구세력이 배치한 병업관의 길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심성을 둘러싸고 근본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로 가야 하며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심성제고의 관을 지나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매 사람 모두 안을 향해 자신을 찾아야 하며 안을 향해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수련생과 협력해 법을 실증할 때는, 법을 위해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수련생을 위해 책임져야 하며 특히 수련상태가 비교적 좋은 수련생은 수련이 좀 부족한 수련생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수련상태가 서로 다르고 감당능력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해줘야 하며 그들에게 너무 높게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장점을 많이 보고 격려하며 법을 실증하는 신심을 높여줘야 한다. 구체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어려움이 크고 위험이 큰일을 주동적으로 가서 맡아야 하며, 어려움이 작고 위험이 적은 일은 수련상태가 부족한 수련생이 가서 하도록 남겨줘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법을 위해 감당하며 함께 협력해 법을 실증하는 일을 잘해야 한다.
납치돼 박해당했어도 경찰을 자비로 대해야 한다. 우리가 한 생명을 보는 것은 일시적인 일 하나만 봐서는 안 되며 역사의 전반을 봐야 하고 이 생명의 과정 전부를 봐야 한다. 당신이 보기에 그가 현재는 경찰이 돼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하고 있지만, 만약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도 우리처럼 이전에는 위대한 신이었다. 자신의 중생을 구하는 동시에 우주 정법 중에서 조그마한 힘을 보태려고 신의 일체를 기꺼이 포기하고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은 왔다. 역사상에서 정법을 펼치기 위해 윤회전생하며 생생세세 고생을 겪고 감당했지만, 그는 우리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우리는 전 우주 중생이 부러워하는 대법제자가 됐지만, 그는 이런 기회가 없었으며 도리어 경찰이라는 반면 배역으로 배치됐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수련생의 문장이 생각나는데 대강의 뜻은 이렇다. 역사상에서 한 신이 정법시기 경찰이 돼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하는 것으로 배치됐다. 속내를 말하자면 그는 이런 반면 배역을 맡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이 일을 배치한 신이 그에게 권하기를 “당신은 가라. 때가 되면 내가 사람을 보내 당신을 일깨워주겠다.”라고 했다. 방법이 없자 그는 동의했으나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반면 배역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어쩌면 이로 인해 자신을 망치게 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속인 경찰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사악한 생명의 조종이 없다면 그는 대법제자에게 흉측한 짓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대법제자에게 흉악함을 표현할 때는 모두 사악이 배후에서 그를 조종하는 것이며 사악이 흉측한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는바,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진정한 살인자는 다른 공간의 사악한 생명이며, 경찰은 단지 사악이 사람을 때리는 흉기에 불과하다. 하나의 몽둥이와 비슷한데 몽둥이는 스스로가 직접 사람을 때릴 수 없으며 반드시 누군가가 그것을 들고 사람을 때려야 한다. 속인 경찰을 말하자면 그것의 진정한 자기 주왠선은 대법이 좋고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대법제자가 그를 구해주기를 매우 갈망하지만, 그는 이미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대뇌는 이미 인심과 거짓말에 지배당했는데 사악이 그의 이런 좋지 않은 사상을 조종하고 그의 대뇌를 통제해 대법제자를 박해하게 한다. 그는 이미 꼭두각시가 돼버렸으며 생명은 한 걸음 한 걸음 훼멸을 향해 나아간다. 도움도 희망도 전혀 없는데 생각해 보라 그의 처지가 얼마나 가련한가! 구세력이 그를 정법시기 경찰로 배치해 대법 박해에 참여하게 한 것은 먼저 그가 대법제자를 박해하도록 이용하려 한 것이고 이용이 끝나면 그를 도태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곧 죽음의 길,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 갈래 길뿐이다.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결과인가! 우리는 구세력이 세인을 훼멸하는 것을 눈으로 보며 상관하지 않을 수는 절대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전 세계, 모든 세상 사람은 다 나의 친인(親人)이었다.”[4] 역사상 어느 한 세에 이 경찰은 사부님의 친인이었다. 사부님의 형제자매거나 다른 친인이었는데 사부님과 정이 매우 두터웠고 생사를 같이하며 고난을 함께 겪었다. 생각해 보라. 사부님께서 전 세계 사람과 인연을 맺었는데 생생세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겠는가! 인연을 맺은 목적은 그들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사부님의 가슴속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담겨 있으며 세상 사람을 다 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생명은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사부님께서도 “경찰 역시 구원을 기다리는 생명인데”[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구할 수 없는 원흉 이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 가닥 희망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경찰을 구하는 것은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구세력의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앗아 오고 사람을 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대법제자로서 말하면 흉금이 반드시 커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신체가 마난에 처했더라도 자신을 내려놓고 세인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사부님은 “수난 중 나는 여전히 중생을 구도하거니”[6]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중생을 구하는 거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 몇 년 동안 실제로 수련하는 중에서 잘한 수련생이 많았다. 납치된 후에도 경찰을 자비로 대했는데 엄중한 박해도 받지 않았고 또 경찰을 구했으며 종국에는 경찰도 수련생을 풀어줬다. 다시 말해서 수련생이 납치돼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이들 경찰이야말로 진정으로 박해받는 자이고 그들이야말로 가장 가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먼저 발정념으로 경찰을 박해하는 사악을 제거한 다음 진상을 알려 경찰을 구했다. 경찰이 구함을 얻기만 하면 대법에 대한 태도가 변했는데 그들은 대법을 선하게 대할 수 있었고 수련생을 풀어줬다. 이렇게 되자 경찰이 먼저 구세력의 박해로부터 해탈됐고 수련생도 뒤이어 해탈됐다. 국면이 좋게 변했고 그중에서 또 대법제자의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경지를 체현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겁난에 부딪혔을 때, 그 자비심이 당신을 도와 난관을 넘게 하며”[7] “사실 자비는 거대한 에너지이며, 바른 신(正神)의 에너지이다. 자비로울수록 이 에너지는 더욱 커서 어떤 좋지 못한 것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석가모니든 그런 수련인이든 모두 말한 적이 없다. 선의 최대 표현은 바로 자비이다. 그는 거대한 에너지의 체현이다. 그는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해체할 수 있다.”[8] 꼭 사부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 가슴속에 자비의 마음을 품는다면 사악을 해체할 수 있고 세인을 구할 수 있으며 일체 마난도 풀릴 것이고 대법제자의 역사적 사명도 잘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현 단계 수련에서 얕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홍음 3-왜 거절하는가’
[3]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경지’
[4]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경문:‘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홍음 3-우리는 알고 있네’
[7] 리훙쯔 사부님 저작:‘파룬궁-제3장 心性(씬씽)수련’
[8] 리훙쯔 사부님 저작:‘각 지역설법 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8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19/3916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