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위스 데니스 비저
[밍후이왕] 발정념은 항상 저의 하나의 큰 장애입니다. 일상의 일로 예를 들면 아이 돌봄, 근무, 가사일 등으로 저는 발정념을 할 고정시간이 있기가 힘듭니다.
저는 독서를 좋아해 법공부도 잘 견지하고 매일 연공도 합니다. 그런데 발정념은 제게는 하나의 어려운 문제입니다. 출근하니 시간을 짜내기 힘들거나 혹은 아예 시간이 없습니다. 더 심한 것은 저는 발정념은 귀찮은 일이고, 항상 시간을 짜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정념이 없어 인내심이 부족한 집착을 초래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식했지만 저는 발정념하는 것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15분 앉아 있어도 주의력을 집중할 수 없고,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과 집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발정념이 끝나고 나면 사부님의 요구가 생각나 또 후회하며 부끄러워하곤 했습니다.
사부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는 현재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는 진상을 알리는 일이고, 하나는 바로 발정념이다. ― 발정념은 자신의 신체와 신체의 외부 형세에 대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포함한다. 또 하나는 바로 자신의 수련과 법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지극히 중요하다.”[1] “그러므로 지극히 중요하다. 매 대법제자는 이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어떤 구실로도 발정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을 청리(淸理)하지 못하면 당신은 잘하지 못하고, 당신이 자신을 잘 청리하지 못하면 또한 다른 사람을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1]
이 두 단락의 법은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저는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발정념할 때 전념할 수 없는가? 그것은 내가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진정한 수련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부님께선 나를 아직도 진수(眞修)제자로 보실까? 사부님의 얼마나 많은 설법과 요구가 한데 어우러져 있을까?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뛰어 넘어가면 안 된다. 그리했다면 누락이고, 구세력에 틈을 줄 것이다.’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때 저는 항상 사부님의 이 한마디에 주의가 기울어졌습니다. “개광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건 그가 어떻게 경을 읽는가를 봐야 한다. 석가모니는 정념(正念)을 말했는데,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경을 읽어 진정하게 그가 수련하는 그 한 법문의 세계를 진동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각자(覺者)를 불러올 수 있다. 그 각자의 법신이 하나 올라가야만 비로소 개광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2]
‘암송’ 이 단어가 줄곧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사부님의 법을 암송하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마지막으로 법 한 단락 혹은 몇 단락 외운 것이 언제였던가?’ 시간제한으로 저는 이 점을 소홀히 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전체 소제목의 내용을 다 외울 수 있었습니다. 법 암송을 멈추게 한 매듭이 어디에 있을까? 저는 다시 매일 ‘전법륜’을 한 단락씩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법을 암송하니 사부님께서 계속 제게 힌트를 주셨습니다.
사부님께선 언급하셨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과거에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부체가 있다 하였고 그 자신도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일단 그에게서 떼어버린 후에도 그는 그 마음의 병을 제거하지 못해 그는 늘 그런 상태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끼며 그는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이미 일종의 집착심으로서, 의심이라고 한다. 오래오래 되어 그 자신이 자칫하면 또 불러올 수 있다. 당신 자신이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2]
위의 이 단락 법을 외워서야 저는 대법 수련자는 반드시 정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진상을 알리거나 발정념할 때도 한결같이 정념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걱정할 때 이 걱정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부체의 예처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일과 어떻게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작업량을 증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사부님께서 제게 명확하게 점화해주신 상황이 생각났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제게 말하자면 상당히 중요합니다. 션윈 홍보 기간에 저는 아들과 함께 있어 줄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잘 평형해야 하는지의 압력으로 저는 인내심이 없고 성격이 난폭해져, 우리 사이의 관계는 긴장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들이 크게 화를 내며 제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이라고도 함)에만 전념하고 자신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방 벽에 붙였던 ‘진선인(眞善忍)’ 글자를 떼 내고 더는 가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실망하고 속상했지만, 아들을 혼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서 저는 줄곧 냉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수련에서의 누락을 안으로 찾았습니다. 잠시 후 저는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에게 실망했는데 아들이 오래전부터 저와 함께 법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고, 또 컴퓨터 게임에 빠졌습니다. 저는 아들이 자신을 망칠까 봐 두려웠습니다. 아들이 사춘기라 막막해하고 일부 불안전 요소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아들은 그때 법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저를 지지했고, 션윈 소책자를 차에 옮겨주었습니다. 저는 션윈 홍보와 진상 알리는 일에 바빠 가사 일을 하지 못했는데 아들이 도와서 해주었습니다.
아들의 각도에서 생각하니 아들의 고충이 느껴져 눈물이 나려 했습니다. 저는 아들과 함께 지낼 때 자비심과 인내심이 더 컸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제 아들에게 바른길을 선택하게 해, 어느 날 대법 중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말고 정념을 유지해야 합니다. 아들과 서로 말하진 않았지만 저는 아들 침대 머리에 있던 진선인 글자가 일주일 후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매일 연공하고 법공부 했는데 무슨 마음을 품고 법공부 했을까? 기계적으로만 법공부 했을까? 나는 정말 법을 배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읽기만 한 것인가?’ 저는 사부님께 진정으로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부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수련하는 일은 전적으로 당신의 이 마음에 의거해 닦는 것으로서, 오로지 당신이 수련할 수 있고 오로지 당신이 착실하고 견정(堅定)하게 수련해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곧 당신을 제자로 삼아 이끌 것인즉, 이렇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2]
“날마다 이 몇 장 동작만 연마(煉)한다고 해서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련은 우리가 말하는 그 心性(씬씽) 표준이 요구하는 것에 따라 진정하게 자신의 心性(씬씽)을 제고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다. 당신이 그런 동작만 연마(煉)하고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않아 강대한 에너지로 일체를 가지(加持)할 수 없다면 수련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도 당신을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제자로 인정할 수 없다. 당신이 장기적으로 이렇게 나간다면, 당신이 연공(煉功)하더라도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요구에 따라하지 않고, 당신이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않으며 속인 중에서 당신이 여전히 제멋대로 한다면, 당신은 기타 번거로운 일들을 만날지도 모른다.”[2]
‘이것은 나의 문제가 아닌가?’ 이 단락을 저는 여러 번 읽었지만, 내포는 이해하지 못하고 훑어보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법공부하는 사람을 모두 제자로 인정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왜 저는 더 깊은 내포를 알지 못했을까요? 만약 우리가 정념을 유지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정념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신의 심성을 제고하겠습니까? 소극적인 생각은 부면 요소를 증가해 추측, 원망하고 서로 비교하게 해 우리를 극도로 지치게 합니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습니다. 사부님께선 시시각각 우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부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힘들어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요?
사부님의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반드시 자비심과 강한 정념을 유지하며,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중생을 구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사부님께 감사한 마음을 품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류를 끝내기 전에, 사부님께서 제게 배치하신 일부 작고 훌륭한 일들을 교류하고자 합니다.
눈부시게 햇살 좋은 어느 일요일, 저는 아들을 데리고 호숫가로 갔습니다. 션윈 매표 기간이라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휴식도 할 겸 아들과 즐겁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산책하는데 할머니 세 명이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중 한 할머니가 제게 말했습니다.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나요? 저를 당겨 일어나게 하면 됩니다.” 너무 쉽습니다. 저는 그분을 도와 일어나게 한 후 계속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몇 미터 간 후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전단은 차에 두고 왔습니다. 저는 지갑에 션윈 카드가 몇 장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돌아가서 그 할머니에게 카드를 한 장 드리고 몇 마디 말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션윈! 포스트를 본 적이 있는데 공연 시간과 장소는 잊었습니다. 저는 공연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카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마터면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습니다.
또 한 번은 외근 업무 보러 나가며 운전하지 않고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매일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결과 회사 앞에서 10년간 보지 못했던 동료를 만나, 그녀와 션윈을 얘기하며 전단 한 장을 주니 매우 기뻐했습니다. 만약 제가 운전하고 갔더라면 이 동료를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이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배치해주셨습니다.
또 한 번은 아들에게 션윈 자료를 우편함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다리가 아프다며 길을 걷기 싫어했습니다.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정념하며 아들에게 선하게 대해주었고, 동시에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이 일의 중요성을 안다. 만약 네가 마음을 연다면 사부님께서 너를 도와주실 거다.” 아들은 전단을 배포하러 가겠다고 하더니 한참 후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말했고, 우리는 아주 빨리 전단을 다 배포했습니다.
정념은 성공하는 경로를 완성하게 합니다. 이상 개인의 이해이고, 제가 법공부를 통해, 다른 수련생들과 교류를 하고 안으로 찾은 후 인식한 것입니다. 저는 반드시 계속 안으로 찾아 일체 곤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는 많은 집착을 내려놓을 것이고, 특히 거만한 집착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3 –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6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7/3883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