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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은혜를 회상하며 더욱 정진하다

94년 광저우 설법반에 참가한 행복한 기억

글/ 자무쓰 대법제자 장츄위

[밍후이왕] 나는 자무쓰 대법제자다. 운 좋게 사존의 국내 마지막 설법반에 참가할 수 있게 돼서야 내가 중병을 앓았을 당시 꿈속에서 관음보살이 내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관음보살께서는 “너는 이후로 장모모(신분증 상의 내 이름)라고 부르지 말고 장츄위(張求宇)라고 부르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꿈에서 깨어난 이후 나를 ‘장츄위’라고 부르도록 했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고 관음보살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없이 내게 좋은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듣게 되자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일생은 사부님을 찾기 위해 온 것이고 우주대법을 찾으려고 온 것이었다! 나는 사부님께 친히 전수받은 제자인데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오직 다시 정진하는 것만이 사부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나는 1949년 1월생으로 법을 얻기 전 많은 질병을 앓고 있었다. 혼합 치질로 두 차례 수술했고,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있었으며, 손발 관절은 찬물을 댈 수조차 없었고, 자잘한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햇빛 알레르기성 피부염으로 햇빛을 받으면 노출된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겼는데 쌀알만 한 물집이 생겨 피가 나고 가려웠지만, 가려움증을 억제하는 약을 바르는 것으로 견뎌야 했다. 메니에르 증후군(귀 어지럼증)이 있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땀을 흘리며 정신을 잃고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이 하는 말은 들을 수 있었다. 또 심장병으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심장 협착증, 심장 떨림, 잦은 혼수상태에다 위암, 복부 팽창, 복부 비대증이 있었다. 158cm 신장에 체중은 47kg 정도이지만 허리는 도리어 109cm(약 43인치)나 됐다. 약에 내성이 생겼고 팔에 수액주사를 맞고 나서 주사를 빼면 약물(수액)이 뿜어져 나와 방법이 없었는데 온몸에 감자 조각을 붙여 약물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방지했다.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어도 소용없었고 병원에 갔으나 의사는 “늦었습니다. 수술한다 해도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십시오.”하고 말했다. 그 뜻은 나는 이미 방법이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본래 사진관을 운영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일할 수 없게 되어 동생에게 맡겼다. 집에서 요양하며 온종일 작은 국자 하나 정도의 쌀죽을 먹을 수 있을 뿐이었으나 그것도 누운 채 고개만 쳐들고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 토했다.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곁에 없게 되자 사는 희망이 없었으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5층에서 투신했으나 죽지는 않고 손에 작은 상처만 났을 뿐이었다. 동생은 내가 집에서 자살할까 봐 사람을 고용해 나를 보살피게 했다.

1994년 3월 어느 날, 나는 강가에 가고 싶었는데 동생이 운전기사를 시켜 나를 강가에 데려가도록 했다. 강가에 가자 파룬궁 연공장을 보게 됐으며 음악을 들으니 아주 편안했다. 말을 하지 못하기에 나는 손짓으로 흉내 내며 연공장을 가리키고는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며 가보고 싶다고 했다. 기사가 나를 연공장으로 데려갔다. 기사가 수련생과 말하기를 내가 위암 말기이며 의사는 내가 20여 일 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수련생은 기적이 있을 수 있으며 녹음테이프와 녹음비디오가 있으니 먼저 사부님 설법을 들어보라고 했다.

동생이 내게 1천 위안(한화 약 17만 원)이 넘는, 당시로 가장 좋은 일제 녹음기를 사주며 사부님 설법을 듣게 해줬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밤이든 낮이든 깨어있기만 하면 사부님 설법을 들었다. 3일 후에는 배고픔을 느꼈고 계란과 우유를 먹고 싶었는데 나를 간호하는 사람이 동생에게 이를 말했다. 동생은 위암 환자가 어떻게 그런 단단한 음식을 먹느냐고 하며 쌀죽 조금에 만두 반쪽을 넣고 흑설탕을 섞어 먹게 했다.

4일째는 힘이 생겼고 스스로 몸을 뒤집고 침대에서 내려와 활동할 수도 있었다. 나는 강가에 나가서 연공했다. 7일째 되는 날은 연공하러가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한 수련생이 우리 집으로 나를 보러 와서는 나의 명문혈에 작은 밥그릇만 한 주머니가 자라났으며 그 속이 온통 쌀알만 한 누런 물거품으로 차 있는 것을 봤다. 수련생이 말하기를 “당신은 근기가 좋군요. 공이 나왔어요.”라고 하며 흰 수건으로 덮어 가리고 테이프로 붙이고는 나를 연공장에 나가도록 했다. 이튿날 나는 연공장에 가서 연공하고 저녁에는 법학습팀에 가서 법을 공부했다. 나는 글자를 모르기에 수련생이 내게 자를 사주고는 그가 어디를 읽으면 나도 따라서 그 줄을 공부하게 했다.

법을 얻은 지 2개월 됐을 때 광저우에서 사부님의 국내 마지막 설법반이 개최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설법반에 가고 싶어 수련생에게 표를 예매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수련생은 들어주지 않으며 말했다. “설법반에는 중병환자를 들이지 않습니다.” 필경 나는 위암 말기 환자이기에 사람들은 내가 죽게 되면 대법의 명예를 훼손하게 될까 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집에서 혼자 법 공부하면서 책을 받쳐 들고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부님께 청했다. “사부님, 저를 가게 해주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한번 당신을 뵙게 해주세요. 저는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눈물범벅이 된다. 그때는 오성이 그렇게 부족했기에 대법을 얻고도 죽음을 생각했었다.

나는 날마다 울며 사부님께 청했다. “사부님, 글자를 알게 해주십시오. 저는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법을 배우겠습니까?” 나는 매일 꿇어앉아 ‘전법륜(轉法輪)’을 받쳐 들고 울며 사부님께 청했다. 어느 날은 자면서 ‘전법륜’을 봤는데 책 속의 글자가 금빛 언덕으로 변하여 나선식으로 돌면서 내 머릿속으로 뚫고 들어왔다. 깨어나자 ‘전법륜’의 글자를 나는 전부 다 알 수 있었으며 정자체까지도 모두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사부님의 ‘홍음5’가 나온 이후에도 정자체 글자를 나는 다 알 수 있었는데 수련생은 믿지 못하고 사전을 가져와 찾아보며 내가 맞게 읽는지 대조했다. 사부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1994년 12월 24일은 광저우 설법반이 열리는 날이었다. 12월 23일 저녁 나는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나에게 세 번 말했다. “너는 절대로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너는 절대로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너는 절대로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말을 끝내고는 가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에 법공부팀에 공부하러 갔는데 수련생 왕 아주머니께서 내게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하며 자기 영감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갑자기 깨닫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저에게 광저우에 가서 사부님 설법을 듣도록 입장권을 주려는 것이지요.” 두 손을 허스(合十)하며 왕 아주머니께 감사드렸다. 왕 아주머니는 “어떻게 알았어요?”하고 말한 다음 그녀의 영감이 꿈을 꿨는데 백발노인이 그에게 “너는 가지 말고 가야 할 사람이 가도록 하라!”하고 말했다고 했다. 원래 왕 아주머니는 표를 두 장 샀는데 수련하지 않는 영감과 함께 가서 돌아오는 길에 놀러 가려고 했었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영감은 말하기를 “나는 가지 않겠소. 장츄위가 가도록 하세요. 그녀가 날마다 울지 않도록 말이오!”라고 했다. 이전에 왕 아주머니는 그녀의 영감에게 내가 사부님 설법을 듣고 싶어 하는 일을 말했었다.

왕 아주머니가 나를 그녀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녀의 영감에게 “장츄위에요.”하고 말했다. 나는 얼른 두 손을 허스하고 “아저씨, 표를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내가 꿨던 백발노인의 꿈 이야기를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설법반 입장권을 내게 주시면서 거듭거듭 내게 부탁하기를 절대로 표를 자신이 줬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며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다. 도중에 내가 죽을까 봐 나는 그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표를 갖게 되어 특별히 감동했으며 광저우로 법을 들으러 가는 다른 한 수련생에게 “사부님께서 표를 주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표를 보여주며 그간의 경과를 말하자 그는 매우 감격하며 말했다. “당신 몸이 이러니 우리 일주일 먼저 갑시다.” 동생은 내가 사부님 설법을 들으러 광저우에 가겠다고 하니, 나 혼자 먼 길을 가는 것에 대해 마음 놓지 못하고 내게 4000위안(약 69만 원)을 주었고 두 사람을 구해 나와 동행하게 했으며 비용도 우리가 지불했다. 또 나에게 라면 한 상자를 사줬다. 가는 그날 수련생이 좌우에서 나를 부축해줬고 또 한 사람은 라면 상자를 멨으며 다른 한 사람은 내 가방을 들어줬다.

광주의 무장경찰 숙소에서 묵은 그날 저녁, 꿈에 백발노인이 나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장모모, 자, 자, 보세요.” 당시 나는 한창 화장장 소각로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손을 배에 포갠 채 두 발을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하고 대열 속에서 ‘쉬어!’ 자세로 4번째에 줄에 서 있었다. 내가 그 줄에서 나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141 대형 화물차만 보였다. 한 대당 적재량은 12톤이었고 모두 5대가 있었는데 차에는 모두 검은빛이 나는 커다란 석탄 덩어리였다. 백발노인은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나는 깨어났고 이후 사람이 완전히 변했음을 느꼈다. 편하지 않았던 모든 곳이 다 온데간데없어졌다. 룸메이트가 내게 물었다. “장 언니, 어젯밤에 왜 화장실 간다고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울며 말했다. “왜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나는 병이 없어졌어요. 다 나았어요. 나 혼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어요. 사부님께서 내 병을 전부 다 떼 내어주셨어요!” 나는 울면서 수련생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나는 5대의 대형 화물차량의 석탄덩이가 모두 나의 업력임을 알았으며 사부님께서 떼 내어주셨고 화장장 소각로 앞에서 나를 구해오신 것이란 걸 알았다. 나는 아직 사부님을 뵙지도 못했으나 사부님은 미리부터 나를 책임지고 계셨다. 내가 울면서 말하자 수련생도 따라서 울었다. 그날부터 시작해 나는 환골탈태한 것처럼 사람이 변했으며 병이 없고 전신이 가벼워졌다.

이튿날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모두에게 문제가 있으면 제출하라고 하시고는 다 해결해주셨다. 또 시계와 1000위안을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잃어버린 사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께서 손으로 회의장 중앙을 가리키시며 좌우로 절반씩 나누게 하고 따로따로 병을 없애주셨다. 자신의 한 가지 병 또는 가족의 한 가지 병을 생각하라고 하시고 사부님께서 “하나, 둘, 셋!”하고 외치면 모두 발을 구르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사부님께서 병을 제거해주셨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나는 흑룡강 자무쓰에서 라면 한 상자를 메고 왔는데 나는 위암에 걸렸다. 사부님께 낫게 해달라고 하자!’ 나는 제5열 5번째에 있었기에 사부님께서 “하나, 둘, 셋!”하고 외치시고 손으로 허공에서 한 번 잡아 쥔 다음 바닥에 내던지는 것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바닥에 내던진 것은 모두 검은 것이었고 살아있는 벌레 같은 것이었으며 사부님이 잡아 쥐고 발로 밟자 없어져 버리는 것을 봤는데 좌우 모두 두 번 이렇게 하셨다. 당시 나는 오성이 좋지 못했기에 한 번으로 안 될까 걱정하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 “위암 말기인데 제가 다시 한번 하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은 나를 그녀 앞에 서게 했고 나는 또 사부님이 “하나, 둘, 셋!”하고 외치시는 구령에 따라 한 번을 더 했다. 다 하고 나자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았으며 마음도 밝아졌고 신체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전에는 두 발에 큰 돌을 달아놓은 것처럼 걸을 때 다리가 무거워 들지도 못했었다. 그 이후로 길을 걸으면 날아갈 듯 가벼웠는데 지금까지 25년이 지나도록 걸을 때 두 발은 날아갈 듯 가볍다.

광저우 설법반의 9강의 중 나는 모두 잠만 잤다. 콧물이 흘러내려 가슴팍이 누런 콧물에 다 젖었기에 매일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9일의 강의가 끝나고 내 머리는 아주 맑았다. 광저우에 갈 때는 두 사람이 나를 부축해줬지만 돌아올 때는 내가 모두를 도와 짐을 들었다.

돌아와서 사부님께서 내 생명을 구해주시고 나를 좋은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남을 위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음을 생각했다. 나는 제일 먼저 계모를 생각했다. 어렸을 때 계모는 나를 학대했다. 나를 때리고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아홉 살 때 집안일을 돕고 가족을 부양하게 했다. 내 언니는 15세에 핍박으로 시집갔는데 계모는 상대방 집에다 많은 쌀과 밀가루를 요구했다. 언니를 팔아먹은 것과 같았다. 오빠는 16세 때 핍박을 당해 출근했으며 힘에 겨워 피를 토했다. 나는 계모를 매우 미워했다. 자라서는 돈이 있으면 사람을 고용해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법을 얻은 후 나는 계모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선하게 대했다. 그녀가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를 집으로 모셔와 새 침대보를 사드렸고, 날이 더워지자 발을 씻겨드리며 사부님의 설법을 듣게 했다. 3개월 후 계모는 희고 통통하게 살이 쪄서 우리 집에서 나가셨다. 친척과 친구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법을 얻고 수련하게 됐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사부님을 뵀던 그 행복한 9일로부터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걷는 동안 부딪히고 넘어지며 사부님께 근심을 끼쳤다! 사부님의 은혜를 회상하니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 더욱 정진하며 사람을 구하고 서약을 실현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원문발표: 2019년 7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21/3902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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