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 낫다.”는 옛말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천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신이 안배한 길을 당신이 다 걷지 않고 자살하면 징벌을 받는다.” 밀레르빠 부처님이 불법을 구할 때 불법을 얻지 못하게 되자 잠시 자살할 생각을 했는데, 그의 사형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한 사람의 수명이 다 되지 않았는데 자살하면 부처를 살해한 죄가 된다(대체적인 뜻).” 자살은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 극에 달했을 때 흔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몇 해 전 납치되었을 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극에 달하지는 않았는데도 다음에 경찰이 뭘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당시 생각했다. “나를 구치소에 보내면 나는 안에서 부딪쳐 죽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하면, 전에 박해받을 때 잘하지 못해 큰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오점을 마음에서 줄곧 지워버리지 못하고 닦아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납치되면 자살할지언정 사부님과 대법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사실 이 역시 죄를 거듭 짓는 것이다).
나는 그 후 법 공부를 하면서 “자살은 죄가 있는 것이다.”[1]를 다시 배우고 수련인인 내가 원칙을 크게 위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법에서 말씀하셨고, 나는 그 법을 배웠지만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법에 대한 나의 인식이 모호하고 사람마음으로 난을 대하는 것을 보시고 난을 해결해주신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몹시 부끄럽다.
어떤 수련생이 병업 중에 몸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아 감당키 어려울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살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결국 자살을 한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이는 수련자가 금기시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20여 년을 수련했다. 처음에는 굳게 견지했지만, 후에 병업 상태가 나타나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몇 번이나 나에게 말했다.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수련을 했을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살아서 뭐 하냐?” 나는 엄숙하게 어머니에게 말했다.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돼요. 이 자체가 큰 누락이어요!” 그러나 어머니에게 내 말은 먹히지 않았고, 어머니는 여러 차례 그런 말을 했다. 내가 계속 발정념을 해주었어도 결국 어머니는 가셨다. 당시 어머니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부정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당신이 구하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강요할 수 없다. 무슨 생각을 움직이면 무슨 결과가 있게 된다.
병업으로 간 수련생 중에는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많이 한 수련생도 있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정진한 것 같지만 어떤 방면에서는 의식하지 못한 누락이 있어서 악에게 틈을 보인 것이다.
현지 한 노수련생은 아주 정진했는데, 공부와 발정념도 했고 거의 매일 나가서 사람을 구했다. 후에 담이 결리는 증상이 나타나 참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병원에 가서 그는 의사에게 말했다. “나의 담을 제거해주세요. 너무 아픕니다.” 제거하면 아프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제거하지 말아야 할 담을 정말 제거했다. 구세력이 그것을 구하는 것을 보고 한 걸음씩 그에게 가중해 또다시 병업 상태가 나타났다. 여전히 담을 아프게 만들면서, 이번에는 그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았다. 노수련생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벽에 부딪쳐 죽는 게 낫겠다. 너무 괴롭다.” 죽고 싶다는 것은 수련인의 큰 누락이다. 신이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구세력은 그의 증상을 끊임없이 가중했고, 병원에 가면 그에게 가상으로 연화해 주었다. “꿈에 사과(과위를 얻었다)를 보았으니 가라.” 그는 결국 정말 죽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랐으며 괴로웠다. 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구세력은 감히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병업 중인 수련생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런 박해를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법정인간시기를 기다려 사부님을 따라 함께 가야 한다! 마음이 반석처럼 굳건하면 누가 감히 당신을 움직이겠는가?
또 한 노수련생은 몇 번 입원하며 병업에 시달려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한 수련생이 문안차 그를 보러 갔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가게 되면 우리 집에 자주 와서 나의 아내를 잘 봐주세요.” 수련생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후사를 부탁하는 겁니까? 이것이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부숴버리고 사부님의 안배를 따르세요! 구세력이 당신의 그런 생각을 이용해 당신을 박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병업 중의 그 수련생도 명석해져 즉시 부정했고, 그는 지금 잘 지내고 있다.
또 한 수련생도 병업이 아주 심했는데, 퇴직금이 없는데다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내 없이 홀로 어머니의 단층집에서 고독하고 적막하게 살았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택시를 타고 몇몇 아는 수련생 집을 찾아다녔는데 하루에 몇 집씩 찾아갔고 말도 정상적으로 잘했는데, 이튿날 죽었다. 그가 죽은 후 한 수련생이 말했다. “그가 후사를 안배하는 듯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가게 되어 여러분을 보러 왔다. 너무 괴로워 정말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괴로움에는 천만 가지가 있다. 어떤 괴로움이든 돌파하면 바로 위덕이다. 구세력이 매 대법제자에게 안배한 길은 모두 위험 중의 위험이고 난 중의 난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수련 성취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고난 중에서 우리의 생각은 똑발라야 한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자신을 망치는 것이고, 악이 기뻐하는 일이다.
최근 몇 해 사이 병업 박해로 간 일부 수련생의 보편적인 현상은 처음에는 정념이 족했지만, 점차 약해지다가 버티지 못하며 견디기 어려워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떤 수련생은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어떤 수련생은 자식들이 효도하지 않아 죽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이 원하는 결과가 아닌가. 반드시 철저하게 그런 안배를 제거해야 한다.
일부 현상에 대한 나의 얕은 견해이니 수련생들이 참고하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7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3/3892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