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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수련인이 되자

타이완 등불축제에서 파룬따파 섹터를 맡으며 수련한 체득

글/ 타이완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2~2003년 즈음 친구가 내 사촌 형에게 ‘전법륜’ 한 권을 주었다. 사촌 형은 책을 한 차례 보고는 더 보지 않았지만, 오히려 내가 책을 받아서 세 번이나 보았다. 마음속에서 확실한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온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대법 수련으로 걸어들어왔다.

1. 연기(緣起)

타이완 등불축제는 현지의 유명 행사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에 전국 현(縣)과 시에서 열리는데, 정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관람객이 1000만 명을 넘었다. 이 행사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많은 중생을 접하는 좋은 기회이다.

사악한 공산당의 타이완에 대한 침투 공작은 어디에나 있어, 타이완은 몇 년간 심하게 자체심사를 하는 정도였다. 사악한 당이 두려워하는 뉴스나 언론은 언급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우리와 거리를 두고 심지어 션윈도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등불축제’라면 그리 민감해하지 않아서 평소 우리 행사에 오지 않던 VIP더라도 등불축제 때 점등 인사로 초청하면 흔쾌히 응한다.

수련생은 2013년 신주(新竹) 등불축제에서 7개월의 시간을 들여 전대미문의 작품을 만들었다. 사람이 탈 수 있는 대형 선체가 있는 꽃등인데 ‘법선(法船)’이라고 불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의 작용 때문에 성숙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은 작품이 됐다고 볼 수 없으며, 완벽한 작품에다 신을 더하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신성(神聖)한 것이다.”[1]

신주 등불축제 담당 수련생은 말했다. 꽃등 제작 전에 꿈에 사부님께서 그에게 한마디 말씀을 반복해서 세 번 말씀하셨다고 한다.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법선에 오를 수 없다.” 법선 제작에 참여한 수련생도 표준에 미치지 못한 부품을 아무리 끼워맞추려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순수하면 그 과정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었고 속인의 기술적 한계를 돌파했다. 꽃등 작품 ‘법선’이 전시되었을 때 중생도 놀랐고 속인 사회에서 꽃등을 제작하는 프로도 연신 감탄했다.

2. 중생을 구도하는 마당을 열다

신주 등불축제 이후 ‘법선꽃등’은 매년 타이완 등불축제를 따라 여러 현시에서 전시됐다. 홍법(洪法) 효과가 좋지만, 인력 물력 재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방대했다. 특히 정월대보름 등불축제 기간은 션윈이 타이완 공연을 앞두고 있던 때라 수련생들이 염려하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인력이 분산돼 션윈 홍보에 영향 미칠까 봐 걱정되는 외에 또 한 가지 문제는 방대한 자금을 어떻게 해결할지 하는 것이었다. 각지에서 전시하기 전에 현지 수련생들은 한 차례 치열한 토론과정을 거쳤다.

나는 수년간 진상 관련 영상 제작에 참여했다. 7월에 꽃등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대량으로 기록 영상을 촬영했다. 감독인 수련생 한 명은 이것이 좋은 다큐멘터리 소재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나도 이 수련생과 협력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더 완벽한 화면 자료를 모으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등불축제 현장에 갔다.

2017년 두 현시에서 2018년 등불축제 개최 계획을 내놓았다. 외부에서는 다들 핑둥(屏東)에서 나온 계획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핑둥 협조인은 본래 담당하고 참여하고 싶어 했다. 나는 속으로 이 지역 중생이 복이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타이완 등불축제는 해가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참관객 수도 지속적으로 늘었다. 우리가 순조롭게 마당을 열면 사람들은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리는 섹션으로 밀물처럼 타고들어올 것이다. 접촉하는 인파가 헤아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얼마나 수승한 장면인가.

그러나 한동안 지난 뒤에 갑자기 접한 소식은 이러했다. 수련생은 내게 협조인이 2018년 등불축제 전시에 참가하지 않을 마음을 굳혔다고 알려왔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

2017년 윈린(雲林) 등불축제 때 나는 또 현장에 갔다. 우리 섹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인파는 자주 가득 찼다. 법선꽃등에 올라 참관하려는 대기 줄이 길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눈앞의 정경을 보면서 정법(正法)하는 데에 우연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는데 이는 우리가 많은 중생을 구도할 기회가 아닌가? 정말 놓칠 생각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매 사람의 능력과 매 사람의 구체적인 여러 방면의 특기에 따라 당신들 자신의 영향을 발휘하도록 하라. 예를 들어 말한다면, 진상을 알리는 중에는 TV 방송을 하는 사람, 신문을 꾸리는 사람, 각종 형식을 채용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직접 거리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사람, 또 영사관에 가는 사람, 대정부 진상을 알리는 사람, 모든 면에서 하나라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2]

나는 정법 중에 매 항목이 나타나는 것은 그곳 중생이 구도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능력으로 협조인과 수련생의 결정을 바꾸지 못하겠다. 그래도 침묵할 수는 없다. 협조인의 태도가 확고하지만 그래도 시도해보기로 했다.

나는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현시마다 전시에 갔다. 각지에서 전시된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교류회 때 여러 사람이 우려하는 바를 해소해주려 했다. 꽃등을 제작하려면 어느 부문의 인재가 필요한지 등이다. 철공 전기공 목공 등이 필요하다고 알려줬다. 핑둥은 시골이라 수련생 다수가 노령이고 말이 별로 없다. 그들은 션윈 홍보는 어렵지만 꽃등을 만드는 것은 기꺼이 참여할 의지가 있을 것이고 대대적인 보수작업 때도 크게 겹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마지막에는 한 가지 길뿐이었다. 결정했다. 수련생들에게 말했다. “제가 맡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3. 사전 준비

이전에는 매년 등불축제 폐막식에서 다음 해에 어느 현시에서 할 것인지 발표했다. 2017년 윈린 등불축제 폐막 후 주최 측은 2018년에는 자이(嘉義), 2019년에는 핑둥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뜻밖이었다. 한 번에 향후 2년간 개최지를 발표한 것이다. 결과를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은 꼭 해야 한다.

회사에서 내게 미국에서 처리할 일이 있다며 반년간 가 있으라고 했다. 내가 없으면 등불축제는 어떻게 할지 걱정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한동안 몸부림치다가 생각을 그만뒀다. 이해할 수도 없지만 모든 것이 사부님의 배치라고 믿었다. 그럼 신사신법(信師信法)하고 배치에 따라 가자!

뉴욕에 와서 한동안 지나자 점차 사부님의 뜻을 알게 됐다. 나는 단체생활을 하면서 매일 아침 고정적으로 법공부와 연공을 해야 했다. 처음 수련할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을 잘하려면 수련 상태가 근본이다. 고정적인 법공부와 연공, 규칙적인 생활은 내게 수련의 기초를 잘 닦으라는 것이었다. 각종 심성 마찰 특히 후반 3개월은 크고 작은 모순이 많아 일파만파였다. 사부님께서 빨리 제고해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래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게는 한 차례 큰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뼈를 깎는 듯한 과정에서 속으로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하게 관문을 넘어갈 때는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비교적 인상깊은 한 차례 일이 있었다. 어느 수련생과 몇 마디 나눴는데 그가 갑자기 노발대발하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런 나쁜 태도를 앞에 두고 나는 이전처럼 반격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반대로 마음이 평온하고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그를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남이 자기를 오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내가 잘못했다 생각하고 감당했다. 상대방이 말한 매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나를 향해 찔러왔지만, 신기하게도 그 칼은 내 공간장에 들어와서는 내 몸에서 줄곧 녹아버렸다. 속사포처럼 욕설을 퍼붓는 것에 직면해 내 마음은 갈수록 편안하고 가벼웠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온한 마음은 수련인에 대한 법의 가장 기본 요구에 도달한 것이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는다.”[3]

4. 연말에 타이완에 돌아가 다시 소통하다

반년이 지났다. 마침내 이 일과 대면할 때가 왔다. 만사는 시작이 어렵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이 일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교류회에서도 등불축제 일을 언급하는 수련생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속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한동안은 마음속에 ‘신사신법(信師信法)’ 네 글자뿐이었다. 두려운 마음이 좀 있거나 물러설 생각이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상이 법을 떠날 때 사악한 요소가 틈을 타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공포감이 올라오고 심적 압력이 커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나는 끝까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약을 어긴 것과 같다.

나는 이전의 전시 경험을 종합해서 내부적으로는 수련생들의 이해와 인정을 얻어야 했다. 외부적으로는 현 정부에 장소 신청을 무리없이 해야 하는 것도 관건이었다. 이 하나하나의 관문에서 녹색불이 켜져야 마지막에 전시할 수 있고 원만하는 것이다. 매년 각 현시 수련생은 동의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마지막에는 양측이 대치상태가 되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가 서로 간에 홍법, 정법의 일로 늘 일부 논쟁을 하는 것은, 내 생각에 이는 모두 정상적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논쟁하고 대치하면서 양보하지 않는 그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 때문인가? 틀림없이 당신은 자신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4]

사람을 구하는 모든 일에 수련의 요소가 포함돼있다. 이 한 갈래 수련의 길을 걸어 나올 수 있으면 그 한층 법의 표준에 부합된 것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건 평온한 마음가짐, 선의적인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협조인과 수련생의 우려, 몰이해에 직면해 나는 반드시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수련생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 한다. 너무 조급해하고 원망하면 안 되고 수련생의 반응에 대해 어떠한 부정적인 생각도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마음속으로 남몰래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핑둥 전시 때 사람들이 두 파로 나뉘어 서로 끌어당기며 내적 소모를 형성해선 절대 안 됩니다. 모두 함께 뭉쳐야 사람을 구하는 힘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등불축제 참가 여부에 관한 관건적인 교류회 때였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였다. 머릿속이 하얬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고 사부님 법상을 보며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없는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후 침묵을 지키던 수련생 몇 명이 잇따라 발언했다.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하지 못한 말이었다. 국면이 바뀌었다. 당시 나는 사부님 법신이 줄곧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5. 꽃등 관련 주요책임자 수련생과 모순을 풀다

나는 줄곧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일깨웠다. 나는 다른 공간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시종 이 일이 다른 공간에서는 큰 일이라고 느꼈고 줄곧 내 용량을 확대했다. 핑둥 수련생들은 이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방면에서 나는 이 항목 주요 책임자 A와 소통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이 어떤 진전이 없다고 느꼈는데 핑둥 교류 때도 초청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말했다. 핑둥 협조인이 그에게 교류회를 열 시간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2018년 9월로, 핑둥 수련생들은 션윈오케스트라의 핑둥 첫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나는 스스로 신작을 만들 계획은 없었다. 단지 꽃등 작품을 보수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공연 이후에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고 여겼다. 나는 A가 성격이 좀 과격해서 협조인과 모순을 일으킬까 봐 걱정됐고 일을 추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생길까 우려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 때문에 나를 오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 일을 방치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하면서 어투가 선량하지 않았고 그가 마음이 조급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에게 잘 설명해주지도 않는 등 먼저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해내지 못했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막 끝나고 션윈예술단 공연 티켓을 판매하는 3개월간, 이 빈 시간은 마침 꽃등을 보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수련생들도 공통으로 이런 인식이 있다. 나는 뒤돌아 A를 찾아서 어떻게 일을 시작할지 말했다. A는 아직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장소 확정 후 말하자고 했다. 그의 말에서 나는 그가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풀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내 일을 잘하자고 생각했다.

장소 신청도 관건이다. 우리만 빼고 핑둥 지역의 다른 참가팀은 장소를 모두 확정했다. 먼젓번에 수련생들은 션윈오케스트라 공연 관계로 부현장을 만난 바 있다. 부현장은 문제가 없다면 대행 부서가 이미 우리를 종교 부문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공문을 받지 못했을까? 그래서 수련생이 주최측을 직접 방문했다. 답변은 이러했다. 부현장이 확실히 말하긴 했지만, 올해는 장소가 협소해서 우리에게 할당할 수 있는 것은 100평이라는 것이었다.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장소가 확정되었으니 등불축제 입장권을 받은 것과 같아 기쁘지만, 할당된 면적이 작아서 ‘법선꽃등’을 놓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수련생이 말했다. “일단 수락하죠.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입을 빌려 나를 점화해주신 것 같았다. 사부님 배치에 맡기자고 생각했다. 이 정도 된 것에서 우리의 심성이 어느 정도 제고됐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소의 크기도 우리의 정체(整體)적인 용량을 상징한다.

핑둥에서 점차 더 많은 수련생이 이 일을 찬성했다. 협조인도 내가 핑둥 등불축제 책임자라고 발표했다. 장소가 순조롭게 생겼으니 이치대로라면 착착 앞으로 진행돼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와 A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우리 둘 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니 협력하는 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둘 사이는 모순이 끝이 없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생기고 모순이 많아지자 누적돼서 점차 A에 대해 생각이 생겼다. 심지어 등불축제를 하는 것에 대한 신심까지 동요됐다. 나는 몸에서 점차 소업(消業)하는 상태가 나타났다. 기관지 증상이 두드러졌다. 심지어 걸을 때도 진동이 울려서 가슴 부위가 아팠고 고통이 갈수록 심각했다. 어느 날은 퇴근 후에 도저히 운전해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다른 면으로는 가족이 오해할까 봐 알게 하기 싫었다.

그날 밤 나는 회사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전에는 소업 현상이 있을 때 연공만 하면 힘든 것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공 1시간을 완전히 의지로 버텼다.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했고 가슴이 지끈거렸다. 고통스러워서 소리지를 힘도 없었다. 희미한 의식으로 ‘사부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되뇌었다.

이튿날 아침 연공하는데 지난 밤 가슴이 지끈거리던 고통이 떠올랐다. 사악한 요소가 수련생의 장기를 떼가듯 어떤 마취약도 없이 수술칼로 혈관을 하나하나 끊는 것 같았다. 사악은 여태껏 손을 놓은 적이 없고 심지어 극악무도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수련생과 모순에 빠져 심지어 사명을 완성하려는 신념까지도 동요됐는데, 정말로 그래선 안 된다. 이것을 의식한 순간 그동안 A에게 쌓였던 부정적인 생각이 다 사라졌다.

꽃등 보수를 시작한 첫날, 오후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서 햇볕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갑자기 하늘의 층층 구름층에 진선인 미술전 작품 속 불(佛), 도(道), 신(神)이 가득 앉아있는 것 같았다. 법을 얻은 지 10년이다. 수련에서 많은 체득이 있지만 나는 줄곧 잠겨 수련해왔기에 이런 수승한 정경을 처음 느꼈다. 마음속으로 진감(震撼)했다. 모든 불도신이 기쁜 표정이었다. 우주의 뭇신이 모두 이 일이 순조롭게 전개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일이 시작되자 유관 기술이 있는 수련생들이 이전처럼 잇달아 참여했다. 자주 나오지 않던 수련생도 걸어 나온 것이 보였다. 수련생은 이런 느낌이 참 좋다고 말해왔다.

6. ‘수련’이지 ‘일하는 것’이 아니다

12월 경 꽃등 보수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돌아오는 2월 전시 때까지 약 2개월이 남았을 시점이었다. 이때 현정부가 갑자기 전시품 규정을 발표했는데 8m 높이제한이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닥친 일에 멍해졌다. 우리는 처음부터 기획서에 ‘법선꽃등’이 돗대 포함 18m높이라고 밝혔었다. 시간이 긴박한데 현정부와 수차례 소통해지만 진전이 없었다.

한번은 나와 수련생 몇 명이 현정부에 가서 이번 등불축제 사무소의 주요 책임자를 만났다. 그가 작품 높이제한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대화는 담판식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여유를 좀 주어 10m로 하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비서실장은 주임이 이미 양보했으니 한걸음 물러서라고 우리에게 권했다. 내 옆에 앉은 B 수련생이 말했다. “주임님, 이 항목을 책임져서 부담이 정말 크시죠.” B가 한 부드러운 한 마디에 주임은 칼을 뽑아들 듯한 기세에서 얌전한 청년으로 변했다. 몇 분 새 수련인의 정념의 마당에서 속인이 이렇게 변했다. 당시 이 정경을 본 나는 생각했다. 이는 구도를 기다리는 중생일 것이다.

B는 그와 다음 약속을 잡았다. 그는 바로 응했다. 그러나 만났을 때는 본론에 들어가자 갑자기 변했다. 화창했던 날씨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일일이 나무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그 한동안 그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크게 줬다는 것이다. 법선에 대해서는 자이 등불축제 때 참관해서 봤고 작품이 좋다고 했다. 진상을 알리는 거점에 가본 적도 있고 책도 봤고 책의 내용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한동안 우리가 한 행동은 책 속에 나온 내용과 차이가 크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현시 정부 기관이 그에게 말한 것도 그랬다고 한다. 우리가 매년 의원과 지방 유력인사를 찾아가고 그다음에는 위원회에 찾아가고 언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한 생명이 대법을 이렇게 오해하게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 수련인의 표현은 아주 순수하고 바른 것(純正)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의 표현을 보고 당신들을 좋다고 느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 평소에 자신의 행위에 주의하지 않으면 당신들의 표현을 속인들은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깊이 들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는 바로 당신의 표현을 볼 것이다. 당신의 일언일행이 그를 제도되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대법(大法)에 좋지 않은 인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5]

진상을 알린다, 무엇이 진상을 알리는 것일까? 일언일행이 바로 대법의 진상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수년간 대법제자가 난관을 돌파하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한 것은 자기가 수련해낸 순수한 마당에서 표현돼 나오는 것이다. 중생이 우리의 진정한 선량함을 느낄 수 있으면 우리를 지지하고 돕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후 나는 더는 사람의 수단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법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 주임이 수련인의 선량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내가 이 일념을 움직이자 갑자기 한 수련생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꽃등 창고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이전에 ‘법선꽃등’ 실제 높이가 약 14m이지 18m가 아닌 것이 생각났다고 했다.

수련생 몇 명이 바로 높이를 재어보니 14.5m였다. 그럼 규정에 맞게 변경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몇 차례 교류를 통해 핑둥 수련생은 높이 제한을 가지고 현 정부와의 관계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고 다들 인식했다. 정부 기관에도 구도를 기다리는 중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좀 고치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

타이완 등불축제 주등(主燈) 관례로는 정월대보름 당일에 정식으로 점등을 한다. 주등 공식 점등까지 4일이 있다. 우리는 ‘법선꽃등’이 높이 규정에 맞도록 깃대 높이를 변경하고 전선도 다시 설치했다. 시범운영 이틀 전 모든 전시팀의 등이 정상적으로 켜져있었다. 그러나 ‘법선꽃등’은 줄곧 정상적으로 점등하지 못했다. 기술 책임 수련생은 큰 압력을 느꼈다. 수련생들도 줄곧 발정념을 했다. 당시 나는 현장에 있으면서 계속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시범운영 3일째, 수련생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마침내 기술 문제를 극복했고 ‘법선꽃등’이 성공적으로 점등됐다. 예상대로 중생들이 물밀듯 대법 전시 섹터에 쏟아져 들어왔다. 길게 줄을 서서 ‘법선꽃등’을 참관하려 했다. 우리 섹터에 온 사람들은 타이완 사람들뿐 아니라 타국 관광객들도 있었다. 중생들은 법선에 올라서 꽃등의 글귀나 현수막을 보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었다. 어떤 시민은 ‘법선꽃등’을 보러 계단을 오를 때는 힘들었는데 법선에서 내려갈 때는 홀가분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 어르신은 매일 현장을 방문했다. 법선에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온몸이 가벼워졌다며 그래서 매일 온다는 것이었다. 많이 오를수록 몸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우리 집 근처의 이웃은 우리 섹터를 참관하러 왔더니 ‘법선꽃등’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오래 기다리느라 길에 서서 요고대 공연을 보게 되었다며, 공연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7. 맺음말

2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다. 특히 꽃등 보수를 시작할 때는 어머니가 요추수술을 하시게 돼서 업무, 꽃등 보수, 가정사 등을 동시에 해내기가 나로서는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육친정에 발이 묶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일종 고험(考驗)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기타는 사부님께 맡겼다. 나중에 어머니는 수술 후 회복이 빨라 이웃들이 놀랄 정도였다. 심지어 등불축제에 와서 우리 섹터의 법선을 관람했다.

타이완 등불축제 전시 기간 10여 일 동안 접촉한 사람이 셀 수 없다. 정말 등한시할 수 없다. 걸어오는 길에 사부님의 가지와 보호에 감사드린다. ‘신사신법(信師信法)’과 ‘수련(修煉)’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이 생겼다. 우리에 대한 중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음악과 미술 창작회 설법-미술 창작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2-미국플로리다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6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11/3883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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