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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사부님은 나에게 선량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글/ 중국 대법제자 슈슈(秀秀)

[밍후이왕] 나는 올해 53세로 대법 속에서 이미 20년을 수련했다. 어려서부터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얹혀살면서 인간세상의 풍상고초를 맛보았다. 그러면서 어떤 일이건 누구에게건 조금도 반대하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됐고 감히 이견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는 문제에서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반석같이 확고했고 그 누구도 나의 믿음을 개변할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한 파룬궁 수련자로 이름이 나지 않았다. 인생행로에 수많은 풍파가 있었지만 마난과 고통 속에서 나는 진선인(眞·善·忍) 표준을 행위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인들에게 각별히 존경받는 사람이 됐다. 우리 지역에서 나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도 나를 칭찬하고 아울러 술자리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관건시각에 사부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와 언니가 결혼해 나와 남동생, 어머니는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나중에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했을 때 오빠와 언니는 가정을 건사해야 했으므로 미혼인 내가 홀로 어머니를 임종 때까지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남동생과 함께 오빠 집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없는 고아같은 나날을 보내기란 괴로웠다. 매번 남동생이 잘못하면 나는 동생이 기죽을까 봐 내가 모두 감당하고 새언니에게 내가 한 일이라고 말했다. 오빠에게 얹혀살면서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는 낮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온 가족 빨래를 하며 밤늦게까지 바빴다.

새언니는 늘 내 혼처를 찾아주었다. 첫 만남 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새언니 식구에게 번거로움을 끼치는 것 같아서 억지로 동의했다. 결혼 뒤의 생활은 여전히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남편은 종래로 집에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살림을 하기 위해 나는 옷가게를 냈다. 아이가 6세가 되어도 남편은 가정을 책임지지 않았고 그림자마저 보기 어려워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매일 가게에서 고객을 대하면서 정신이 흐릿해졌다.

정신이 무너질 찰나에 친구가 말했다. “파룬궁을 배워봐, 이 공법은 마음을 넓혀주고 당면한 일을 담담하게 대할 수 있고 마음을 닦아 선한 사람이 되게 가르쳐 좋은 사람을 초월하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대.” 이렇게 나는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 집단이 미친듯이 파룬궁과 파룬궁 제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박해가 발생한 후 남편은 더욱 심하게 나에게 상처를 줬다. 집에 들어서면 싸우고 밖에서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바람을 피웠다. 내 앞에서 내연녀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가면서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절망이 극에 달해 죽을 생각을 했다…… 나는 속옷도 새것으로 갈아입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단장하며 죽을 준비를 했다. 가는 도중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갑자기 대법 사부님께서 살생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자살은 죄가 있는 것이다.”[1] 나는 파룬궁 수련인이므로 자살하면 대법에 먹칠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럴 수 없다.

대법과 사부님을 생각하자 점차 가정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엄격히 자신을 요구했고 더는 남편을 미워할 수 없었다. 미워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선하게 대해야 했다. 그가 끊임없이 내게 상처를 주어도 나는 그를 관용과 양보로 대했다. 나는 집을 잘 정리하고 깨끗이 치우고 남편을 위해 일상생활을 질서 있게 짰다. 시댁에 대해서도 자신을 진선인의 높은 표준으로 요구하고 시아버지를 세심히 돌봐드렸다. 다른 사람들은 천하에 나 같은 며느리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마비돼 자리에 누운 시아버지를 수발들다

수년간 수련한 체험은 따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1년도 되기 전에 가족 둘을 잇달아 잃은 일을 어떻게 대하고, 마비로 자리보전한 시아버지를 대법 법리의 지도하에 세심하게 수발든 것에 대해 교류한다.

시아버지는 슬하에 자녀 셋을 두셨다. 아주버님, 남편, 시동생이다. 시동생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형님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아버님 어머님을 부양할 여력이 안 되었다. 시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동안 나는 가게 일을 제쳐놓고 시어머니를 도와 시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시어머니는 아버님 병수발로 힘든 까닭인지 혹은 천명이 다한 것인지, 2018년 9월 장 보고 오시던 길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아버지 수발 책임은 내가 지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성격이 고집스러우셔서 도우미들이 모두 힘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가게를 접고 시아버지를 돌봤다. 시아버지는 배뇨장애가 있어 소변을 볼 때 몸을 돌려 눕혀야 하는 등 시중을 들어야 했다. 변비가 심할 때는 장갑을 끼고 변을 파내야 했고, 담이 목에 걸리면 주사기로 빨아내야 했다. 턱이 자주 빠져서 맞춰 넣는 방법도 배웠다. 물과 밥을 한 숟가락씩 떠서 넣어드렸다. 시아버지는 감동하여 나를 친딸이라고 말했다.

어떤 때는 아이처럼 내 두 손을 잡고 “고맙다!”라고 하신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님, 저에게 감사드릴 것이 아니라 저의 사부님께 감사드리셔야 해요. 저는 파룬따파를 배우고 사부님께서 저희에게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가르치셨거든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이 정도로 시중들지 못하니까요. 만약 제가 대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매달 1만 위안씩 준다 해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형님은 “동서가 이렇게 정성들여 수발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지금까지 사시지 못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에요. 웃어른께 효도하고 존경하는 일은 당연한 거예요.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심성을 닦고 착하게 사는 법을 몰랐을 테고, 이렇게 할 수 없죠!”

남편은 어느 날 여러 친척 앞에서 감격에 겨워하며 “집사람이 부모님에 대해 효도한 것은 저도 못해요. 제 아내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는데, 말하며 엄지까지 들어 보였다.

남편은 현대사회의 큰 염색독에 오염돼 악습이 적잖다. 술 담배와 마작을 하고 내연녀도 있었으며 부모님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밖에서 떠도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나를 계속 좋지 않게 대했다. 중공의 박해가 두려워서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늘 남편에게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권하며 장래 자신에게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늘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내가 부모님을 돌봐야 자신이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관장하시며, 수련에서 대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나는 가정을 돌보느라 마음을 쓰고 힘들게 일했지만, 파룬궁을 수련하기에 건강이 아주 좋았고 20년간 약 한 첩 먹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속인의 생명은 무상하고 약하다.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의 가장 큰 변화는 일할 때 우선 타인을 고려하며 누구에게나 선하게 대한 것이다.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우며 집에 생활비도 주지 않고 부모님도 부양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나의 선한 마음에 그는 감동하였다.

남편의 내연녀가 술장사 사업을 소개해 남편은 2년간 대부분 시간을 술집에서 보냈는데, 늘 몇 명이 술 마시며 마작을 했다. 2018년 11월 남편은 6명과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오후 3시경 남편은 머리와 코 부위가 매우 괴롭다며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술집 사장이 구급차를 불러 남편을 병원에 보내 CT 촬영을 하고 응급치료를 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혼수상태였고 뇌간 출혈 10mL 확진을 받아 살 가망이 없었고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밤 10시경 병실 주임이 나를 사무실로 불러 환자가 가망이 없는 것 같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렇게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평소 남편과 함께 보낸 날이 적었지만, 주검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는 그를 본 나는 울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어요.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고 모든 일에서 양보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모질게도 자리에 누운 아버지와 장가도 가지 않은 아들을 두고 혼자 떠나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남편을 보낸 이튿날 그의 침대에서 1만5천 위안 차용증이 나왔다. 아들이 전화해 상대방에게 상환을 요구했고, 채무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받아냈다. 차용증이 없는 부분은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이 평소 나를 어떻게 대했건 나는 그가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큰 비통에 잠겨있었다. 장가가지 않은 아들, 자리보전한 시아버지, 나 혼자 헤쳐나가야 했고 상의할 사람마저 없었다. 나는 화장터에서 기절했고 아들이 계속 인중을 누르며 나를 불렀다. “어머니, 아직 제가 있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앞으로 어머니 말씀 잘 들을게요.” 올케는 달랬다. “형님, 형님이 어떤 분인지 잊으셨어요? 형님은 신앙이 있으시잖아요. 고인(高人)이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친척들은 사부님을 가리켜 ‘고인(高人)’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나는 신앙이 있고 내게는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다. 나는 슬픔을 참아야 했다. 나는 자기가 고통스럽다고 해서 며느리로서의 본분과 어머니의 책임을 홀시할 수 없고 아들에게 견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만났다.

책임을 묻지 않고 배상을 요구하지 않다

당시 남편이 토해낸 음식물에는 피와 대량의 알콜이 섞여 있었는데, 의사는 토사물을 보관해 책임을 물을 때 증거로 삼지 않겠냐고 물었다. 오빠와 친지들이 나와 상의했다. 함께 술 마신 친구 몇 명과 그 술집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지역은 술자리에서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2건 있었는데 유가족이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됐는데 무슨 책임을 묻겠어요.”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 사업을 막 시작했지.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하고 존엄이 있어야 한다. 백만 위안을 받아낸들 한평생 가겠니?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많은 돈을 물어내면 그 사람들은 또 어떻게 살겠니.” 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집을 장만해야 해서 돈이 필요했지만 나는 그런 부도덕한 일을 할 수 없고 타인을 해쳐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사무아(無私無我)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고 일할 때 타인을 고려하라고 하셨으므로 나는 반드시 사부님 말씀을 따라야 했다.

내가 이 정도 말하자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형제자매도 모두 내 의견을 존중했고 누구도 더는 책임을 물으라고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아울러 나의 사람됨됨이에 탄복했고 파룬궁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말했다. 오빠는 내가 고인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말했고, 올케언니는 자신이 날마다 염불한다며 역시 수련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오빠가 말했다. “슈슈가 수련하는 것을 봐요, 그것이야말로 정법정도(正法正道)요,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있잖소.”

사악한 당의 거짓말에 중독됐던 친정과 시댁 식구들은 예전에는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지금은 마음으로부터 내게 탄복하고 있다. 특히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을 처리하는 문제에서 그들은 더욱 대법과 대법제자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법이 이미 내 마음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대법 사부님은 제자들에게 무사무아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며 큰 어려움이 눈앞에 닥쳐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돈을 뜯어내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뇌출혈이 왔던 그 술집 사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배상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를 말하면서 내가 한 일체는 모두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며 내가 어떻게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을 낱낱이 들려줬다. 그는 아주 열심히 듣더니 남편을 원망하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원망하지 않는다며, 우리 대법 수련자들은 적이 없으며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나 늘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알려주셨고 나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편의 후사를 처리하는 일주일은 형님이 나를 도와 시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큰 정신충격으로 심신이 극도로 지치고 매우 야윈 것을 보고는 잠시 시아버지 수발을 들지 말고 한 달 정도 몸을 추스르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형님이 건강이 좋지 않은데 그마저 지쳐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를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이 죽은 일주일 뒤에 급히 시아버지를 돌봐드리러 갔다. 사연을 모르는 시아버지는 괴로우면 여전히 화내며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셨다.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다시 삼켰다. 시아버지께는 당분간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릴 수 없었다. 여전히 평소대로 조용히 일했다. 마음이 괴로우면 사부님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대하며 반드시 잘하자고 다짐했으며 진선인(眞善忍)의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자기 남편이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요전에 술 마시다 세상을 뜬 그 집 부인이 파룬궁을 수련한대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전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지요. 남편이 밖으로 돌며 집에도 오지 않고 술 마시다 죽었는데도 여전히 원망도 없이 시아버지 수발을 든대요……”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흘렀다. 나는 충심으로 사부님께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며 더욱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 가르침에 감사드린다. 선량함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선량함은 또 자기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남편의 백일제도 이미 지났고 내 마음속의 극심한 비통함도 점차 사라졌다.

형님은 내게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목격했고 대법제자의 고상한 품덕을 보아냈으며 이로써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시아버지는 날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외우며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주변의 내 지인들, 내가 살아온 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파룬따파에 찬사를 보내며 말한다. “파룬따파하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5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언행으로 대법을 실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6/385983.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9/5/7/176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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