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관용으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다

글/ 중국 대법제자 후이쓰(慧思)

[밍후이왕] 나는 올해 수련에서 비교적 크게 돌파했다. 바로 다른 사람과 극렬하게 논쟁하거나 몹시 분개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일이 아주 적어진 것인데, 나의 심득을 간단히 교류하고자 한다.

관용은 바로 버릴 줄 알고 잊을 줄 아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를 박해하는 데 참여한 적이 있는 사람, 나를 무시했던 사람을 볼 때마다 불편하고 마음에 걸려 회사 가족아파트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 이유로 일 년 내내 외지에서 일한 남편이 휴가를 받았을 때도 차라리 부모님 댁에 머물지 우리 집에는 가기 싫었다.

나는 ‘늘 이러면 이 역시 법에 있지 않은 것이잖아. 자신을 수련하고 스스로 바뀌어야지. 지금 그 사람들을 다시 본다면 나는 예전의 상처를 잊고 더는 원한을 품지 말자. 그리고 동시에 선(善)의 일념을 그들의 마음에 넣어주어 그 생명이 선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하자 그들도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도 휴가 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했었다.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이 심정적으로 맑을 때, 마음이 넓고 낙관적일 때, 당신은 주위환경 역시 같지 않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1]와 같았다.

마음에 원한이 없어야 관용을 베풀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직면했을 때, 그들의 언행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마주 보았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평화로운 상태야말로 바로 선(善)한 것이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상태이다.”[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차분하게 대하는 외에 동시에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 조성된 것이 아닌지 안을 향해 찾았다. 줄곧 ‘나는 높은 자태로 당신과 따지지 않는다’라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현재의 사람은 악을 숭배하고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데, 고층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반대이다.

생활 속에서 누가 나의 이익을 점유해 내게 손해를 끼쳤을 때, 나는 최대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속인의 이 복잡한 환경 중에서 당신은 또렷한 정신으로 이익 문제에서 명명백백하게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절취당할 때에 당신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투고 싸우지 않으며; 각종 心性(씬씽)의 교란 중에서 당신은 손해를 보며; 당신은 이런 간고한 환경 중에서 당신의 의지를 연마(魔煉)하고, 당신의 心性(씬씽)을 제고하여, 속인의 각종 좋지 않은 사상의 영향하에서도 당신은 초탈해 나올 수 있다.”[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사부님께서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한 그 층차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모두 마음에 두지 않으며 속인 중의 일체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늘 싱글벙글 웃는다.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그는 역시 싱글벙글 웃는다. 정말로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 과위에 도달한 것이다.”[4]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의 이 두 단락 법을 항상 외웠다. 특히, 심성관에 부딪힐 때는 끊임없이 외웠는데, 그러면 심태가 평화로워져 관을 넘을 수 있었으며, 마음에 원한이 없고, 오직 관용과 선념만 남았다.

관용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아무리 비천한 생명이라도 역시 하늘의 조화(造化)로서 작은 풀에도 봄이 있고, 야생 백합에도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형형색색의 사람을 직면함에도 선한 이가 있고 악한 이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이다. 더욱이 현재 세상기풍이 나날이 떨어지는 때에 공산사령에게 독해를 당한 사람의 도덕은 더 파괴되었지만 무슨 원망하거나 애탄해 할 것이 없다.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사람을 구하라고 하셨는데, 중생에게 악념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에 자비와 선념을 품어야만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관용을 해내려면 착실히 수련해야만 된다

현 단계에서 나는 관용을 해내려면 우선 끈기를 가지고 법을 외우는 것을 지속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원한, 당문화를 깨끗이 제거하고, 발정념 외에도 길을 걸을 때나 일상생활에서 집안일을 할 때도 정념을 유지해야 하며, 셋째는 일사일념 중에 질투심을 뿌리까지 제거해야 한다고 여긴다. 사부님께서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3]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자세히 생각해보면 모든 마음은 다 질투심과 연관이 있다.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바로 시시각각 자신의 일사일념이 법에 부합되는지를 주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법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염두가 더 깊이 아래로 파고드는 것을 발견했는데, 거의 질투심이 훼방을 놓고 있었다. 질투심은 일부 수련생의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어도 나는 질투하지 않아’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질투심의 표현에 대해 이미 다음과 같이 투철하게 말씀하셨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5]

그렇다면 즉, 원한, 불공정, 불균형, 억울함,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를 느끼며, 다른 사람을 싫어하고 업신여기는 마음,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혹은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으면 곧 화를 내는 것, 이것들은 모두 질투심으로서 그것은 악한 것이다.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과시, 우월감, 자신보다 높은 수준과 비교하기, 오만, 냉담, 자신을 고결하다고 여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김, 자신이 옳다고 여김, 득의양양함, 불평, 자신이 도리가 있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용서치 않음,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증오함, 여자가 위세를 부림, 별일도 아닌데 지나치게 따지는 것, 선동하여 사건을 일으키는 등등도 역시 질투심이 아닌가. 그것들 역시 악한 것이다.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코 선(善)을 수련해낼 수 없고, 관용은 더 해낼 수 없다.

이상은 내 경지에서 깨달은 것으로서 부족한 곳은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음악과 미술 창작회 설법-음악 창작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법해-지난(濟南) 설법 문답풀이’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경지(境界)’

 

원문발표: 2019년 5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14/386468.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