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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정형외과 의사가 증인, 다섯 군데의 분쇄성 골절이 저절로 낫다

글/ 뉴질랜드 대법제자 왕주춘

[밍후이왕] 내 이름은 왕주춘이며, 올해 72세로, 뉴질랜드 해밀턴의 파룬궁 수련생이다.

'圖1:王久春照片'
왕주춘 씨

교통사고를 당해 주의식이 또렷해야 함을 일깨우다

2015년 11월 7일 아침 8시가 넘어 나는 션윈 소개자료를 배부하면서 맹인과 어린이도 다니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횡단보도 옆에 서있던 승용차가 갑자기 시동을 걸더니 내 몸의 오른쪽을 들이받았다. 나는 넘어지며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혔다. 당시 차는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나의 오른쪽 다리를 밟고 넘어갔다. 그때 내 귀에는 발과 다리의 뼈가 차바퀴에 깔려“뚝, 뚝, 뚝, 뚝”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땅에 쓰러져 있었고, 오른쪽 다리가 차에 깔렸지만, 차 안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친 승용차의 운전자는 서양인 여성이었고, 조수석에는 중국인 젊은이가 타고 있었다. (그가 중국에서 온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두 사람은 차 안에 멍하게 앉아있기만 했다. 나는 큰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빨리 내려서 나를 끌어내 주세요!” 그때 뒤따라오던 차 몇 대에서 서양인 운전자들이 모두 내려 다가왔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차 밑에서 끌어낼 방법을 생각했다. 내가 보니 그 몇 명의 기사들은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하필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쳐서 이런 일을 만들었느냐며질책하는 것 같았다.

맨 먼저나는 주의식을 또렷하게 해야 한다고 나를 일깨웠다. 뒤차의 서양인 기사가 경찰에 신고해 경찰차 두 대와 구급차 한 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이 아주 또렷했고, 사고를 낸 운전자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에게 사과를 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구조요원은 재빨리 나를 구급차에 태워 응급실로 데려갔고, 많은 X선 사진을 찍었다. 의사는 X선 사진에서 오른쪽 다리 다섯 곳에 분쇄성 골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른쪽 발목과 무릎 사이의 종아리뼈는 완전히 부러져 바지를 뚫고 나와 뼈의 부러진 부분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무릎 뼈, 오른쪽 다리의 왼쪽 복사뼈, 오른쪽 복사뼈, 오른발의 뒤축이 모두 분쇄골절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크게 부딪히는 바람에 바지가 꽉 끼어 벗길 수가 없었다. 의사는 가위로 바지를 조각조각 잘라냈다. 당시 오른쪽 다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圖2:王久春女士2015年11月7日的踝關節X光片(左)與同年12月4日的X光片(右),對比可以看出,車禍3週後骨折處已有癒合趨勢。'
왕주춘 씨의 2015년 11월 7일 발목 관절 X선 사진(왼쪽)과 같은 해 12월 4일의 X선 사진(오른쪽)을 비교해보면 사고 3주 후에 이미 골절 부위가 아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찰은 나에게 운전자를 고소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소하지 않겠다고 하자 경찰은 경제적 배상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다. (배상금은 액수가 적지 않다.) 경찰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 딸에게 배상금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딸이 말했다.“우리 엄마가 원치 않으면 저도 원치 않아요.”

퇴원해 귀가하다

뉴질랜드 와이카토 병원 정형외과의 베테랑 의사 스티브 맥체스니는 나의 X선 사진을 본 후. 즉시 나를 위해 4인의 의료 전문가 팀을 조직하고, 수술 계획을 세웠다. 부러진 큰 뼈를 스테인리스 판과 못으로 고정하고, 수많은 뼈 부스러기를 들어내어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4개의 스테인리스 판은 부러진 종아리뼈를 고정하는20cm의 판이 가장 길었고,스테인리스 발뒤축, 스테인리스 복사뼈, 스테인리스 무릎 뼈 등이었다.

주치의로부터 수술 방법을 듣고, 나는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그에게 내가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아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말했다.“원래 이 분한테 정신병이 있었네요.” 전문가 팀의 한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당신은 당신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줄 알아요? 지금이 치료하기 제일 좋은 때인데, 효과적인 시간이 아주 짧고 긴박해요.”

병원에서 나는 토를 했고, 단지 다리만이 아니라 온몸이 붓고, 온몸이 아파 전혀 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수술 후 다리에 철 못이나 철판이 있으면 가부좌가 몹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사람을 기계처럼 수리하는데, 고층차에서 보면 사람의 기술은 가장 낮은 층차의 기술이며, 속인을 치료하는 것이지만, 나는 대법이 양성한 생명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대 그런 스테인리스로 내 신체의 일부를 대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했다.‘사존께서는 가장 미시적인 곳에서 우주와 대궁을 만드실 수 있으니, 분자 단계의 물질 속에서 나의 상한 다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대단히 확고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곧 귀가할 것이다. 병원의 치료 효과가 좋든 나쁘든, 수준이 어떻든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마난에 직면해 나의 주원신은 대단히 또렷했고, 사유는 완전히 법 속에서 움직였으며, 나는 사부님과 법을 100퍼센트 믿었다.

당시 내 휴대폰과 옷을 모두 집으로 보냈기 때문에 몸에 걸친 것은 병원의 옷이었고, 내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바깥과 연락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겠다고 요청했다. 당직 의사는 만약 나의 귀가를 방관한다면 의사가 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만약 나의 정신이 비정상인 것이 확인되면 치료에 가장 적합한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고, 나의 다리를 구하기 위해 의사가 수술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했다. 나는 반드시 가장 단시간 내에 법적 절차를 거쳐야만 퇴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긴박한 시간에 나는 오직 사존께 수련생들이 병문안을 오도록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변호사 면허를 가진 수련생과 연락할 수 있었다. 과연 아주 빨리 수련생 여러 명이 함께 왔다. 나의 첫 마디는 바로 즉시 변호사 수련생에게 연락해 나의 뜻을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변호사 수련생 두 명이 하던 일을 멈추고 왔다. 그들의 도움 하에 위험과 법적 책임에 관한 일련의 법률 문서에 서명을 했다.

마지막에 나는 할 수 없이 의사가 나의 다리에 간단한 처치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 깁스를 하고, 오른쪽 종아리 외부에 스테인리스 지지대를 고정하는 것이었는데, 병원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퇴원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신체를 절개하지 않고,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입원 5일 만에 구급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나는 나중에야 알았는데, 만약 2주 후에도 나의 다친 다리가 호전되지 않으면 주치의가 변호사 수련생을 고소할 예정이었다. 지금도 나는 주치의가 변호사 수련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사부님의 가지, 수련생의 가지

병원에서 돌아와 직면한 것은 가정관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입원해 치료받기를 원했고, 여럿이 나를 둘러싸고 물었다.“만약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면 그 결과는 누가 책임져요?!” 집에서는 나의 귀가로 이미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법공부를 하고 안을 향해 찾으며, 구세력이 한 일체를 부정하겠다고스스로다짐했다.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표준에 따라 문제를 생각하고 행동했다. 나는 제때에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연공음악을 들으면서 손으로 연공동작을 했다. 평소에 하던 신문 편집 일을 평소처럼 했지만, 한 면을 편집하면 아파서 온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고, 윗옷의 앞면까지 눈물로 흠뻑 젖었다. 인터넷 법공부를 평소처럼 했고, 그동안 또 인터넷 진상 알리기도 배워서 할 수 있게 되었다.

통증이 극심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며 말했다.“사부님, 제자가 지금 너무나 아프고 숨쉬기도 힘이 들고….”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극심한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나의 옆에서 제자를 간호해 주시고, 제자의 관문 돌파를 보호해주셨다. 자비로우신 사존께서는 나에게 일체를 주셨다.

이지적이고 견정한 노력을 통해 나는 가정의 관을 돌파했고, 구세력이 배치한 것들을 타파했다. 이 일체는 수련생의 지지와 떼어놓을 수 없다. 처음 내가 차에 부딪힌 것을 알고, 오클랜드의 한 노 수련생은 밤중에 세 시간이 넘도록 나를 위해 묵묵히 발정념을 하고, 사존께 나를 가지해 주실 것을 부탁했다. 대사관 앞에서 법을 실증하는 수련생은 끊임없는 발정념으로 나에 대한 박해를 기도하는 사악의 요소를 청리했다. 천국악단의 수련생도 나에 대해 정념으로 가지했다. 수련생들은 나를 찾아와 어떻게 씬씽을 제고하고, 사악의 박해를 대할 것인지를 함께 교류했다. 두 변호사 수련생과 해밀턴의 일부 수련생은 줄곧 끊임없이 나와 교류를 하고 정념으로 가지했다…. 이들 수련생과 교류하고 비학비수하면서 나는 내가 수련해 버리지 못한 집착심과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제고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씬씽이 끊임없이 제고됨에 따라 나의 신체도 빠르게 회복됐다.

검사 후, 주치의가 뛸 듯이 기뻐하다

나는 11월 11일에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12월 4일 재검사를 하니 다른 몇몇 부위는 모두 호전되고 있었고, 무릎 관절에만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의사가 말했다.“무릎 관절은 회복이 안 되고, 저도 치료를 못해서 나중에 정상적으로 걷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그 말을 듣고 내 머리 속에는 즉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당신은 못 고쳐도 우리 사부님은 고치실 수 있어요!” 사부님에 대한 그런 견정한 믿음에는 조금도 모호함이나 의심이 없었다.

퇴원 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어떠한 기계기구든 보조기구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보조기구에 대해 조금도 의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끝까지 견지했다.

12월 23일 재검사에서는 또렷이 나타났다. 11월 7일 찍은 사진과 비교해 무릎 관절에 손상 후 접합 흔적이 또렷이 보였고, 절단면이 양호했다. 심지어 뼈의 파편들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모두 원래의 위치로 이동했다.

석 달 후 다시 병원에서 검사를 한 후, 처음에 내가 귀가를 고집하고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정신병을 의심했던 주치의는 웃으며 나에게 다리 회복 상황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서양인 의사가 조금도 질투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잘 회복된 것을 보고는 너무나 즐거워하고, 뛸 듯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다리가 이렇게 잘 회복된 것은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내가 이렇게 빨리 회복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말했다.“당신의 회복에 나는 아주 아주 만족합니다. 이제는 저에게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기뻐했을 뿐 아니라, 다른 몇몇 의사도 똑같이 기뻐했고, 옆에 있던 의사 레지던트 몇 명도 모두 똑같이 기뻐했다.

왕주춘 씨는 다섯 군데 분쇄성 골절을 당하고도 파룬궁 수련으로 신기하게 건강을 회복했다. (2016년)

교통사고 후 사람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다

내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하지 않은 일은 중국인 사회에 아주 빨리 전해졌다. 구급차가 나를 집으로 데려온 후, 어떤 중국인은 심지어 아주 먼 곳에서 달려와 우리 집 주변을 맴돌며 결과를 보려 했다. 파룬궁이 또 큰일을 냈다! 다리가 자동차 아래에 깔려 발생한 분쇄성 골절을 수술하지 않고, 치료하지 않고, 병원에서 퇴원한다고? 그들은 모두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 했다. 어떤 사람은 창문에 엎드려 구경했고, 어떤 사람은 아예 집에 와서 봤는데, 나는 그들 모두를 진상을 들으러 온 사람으로 대했다. 나의 다리가 끊임없이 호전되자 원래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웃, 친구, 의사와 가족이 모두 처음의 비난, 원망, 심지어 비웃음을 탄복, 이해와 지지로 바꾸었다.

나의 한 이웃은 모 중국인 단체의 책임자였는데, 그 단체는 중국 영사관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여러 차례 진상을 알렸지만, 그는 핑계를 대며 회피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파룬궁을 모함하는 중공의 거짓말을 깊이 믿는 것 같았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우리 집에 온 적은 없었지만, 그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나의 골절 회복의 가장 좋은 증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매번 집에서 나갈 때 그가 나의 일거일동을 거의 모두 주시하며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다리가 날마다 호전됨에 따라 그도 점점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후 어느 날, 내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그를 만났는데, 그는 멀리서 웃으며 소리쳤다.“당신은 정말 위대해요!” 그는 아주 감격한 모습이었고, 진심으로 보였으며,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들었다. 내가 말했다.“파룬궁이 위대한 거예요! 우리 사부님께서 위대하신 거예요!”

또 한 사람의 중국인은 운동 의학을 하는 사람인데, 나를 보더니 말했다.“당신은 의학사에 첫 획을 그었습니다!”

오클랜드의 한 유명인은 주류사회에서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은 후, 아주 불가사의하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그 사람 정신이 정상이에요?” 그는 아주 급히 나를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 수련생의 소개로 나를 만나려 했고, 당연히 목적은 일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 유명인은 큰 회사의 사장이었고, 뉴질랜드 정계, 재계와 언론계에 아주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주 명성이 높았다.

만나자마자 그는 나를 아래위로 관찰했고, 의심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인사를 나눈 후, 그는 통역을 통해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질문은 묻고 나서 스스로 예의에 벗어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것을 묻든 나는 모두 평온하고 상냥하게 일일이 해답해 주었다. 몇 가지 질문 후에 그는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정신에 어떠한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더욱 많은 것을 알고자 했다.

이어서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내가 횡단보도에서 어떻게 부딪혔는지, 차 밑에서 어떻게 끌려 나왔는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한 후에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 의사의 치료방법과 내가 어떻게 귀가를 고집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나는 또 귀가 후에 어떠한 약물과 치료방법도 쓰지 않고, 오로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해 다섯 곳이 분쇄 골절된 다리와 발을 신속하게 회복시킨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넋을 잃고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는데, 눈빛은 탄복으로 가득했고, 칭찬을 연발했다.“대단해요!” 나는 그에게 이 모든 것이 자동이며, 파룬궁이 자동으로 수련자의 신체를 조정하고, 일체의 부정확한 상태를 바로잡는다고 알려주었다.

마지막에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오! 원래 이것이 바로 파룬궁이었네요! 파룬궁에 이렇게 큰 힘이 있었네요!”

나를 만나기 전에 그는 이미 병원에서 찍은 나의 X선 사진을 보았고, 만나자 마자 내가 걷는 모습을 상세히 관찰했으며, 내가 확실하게 자유자재로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나에게서 사건의 상세한 과정을 들으면서 수시로 나의 손을 잡았는데, 대단히 흥분하고 감동한 모습이었다. 그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부탁했고, 특히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사존의 법상을 함께 찍었다.

2016년 5월, 나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미국에 갔다. 나는 뉴욕 법회에 참가해 사존의 설법을 들었고, 당시의 큰 행진에도 참가했다.

'圖3:王久春女士車禍半年後於2016年5月在紐約參加法輪大法日慶祝活動。'
왕주춘 씨는 교통사고 반 년 후인 2016년 5월, 뉴욕에서 파룬따파의 날 경축 행사에 참가했다.

 

원문발표: 2019년 5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9/5/16/386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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