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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장기간 수련에서 많은 수련생, 나를 포함해 부정적인 사유로 문제를 생각할 때가 많다. 예전에 나는 이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심지어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할 줄 몰랐다. 이 부정적인 사유가 바로 정상적인 사유라고 여겼기에 수련에서 적지 않게 곤두박질했고 고생을 적지 않게 겪었다. 원래 피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바르지 않은 사유 방식 때문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수련인이 문제를 생각하고 일할 때 정념으로, 긍정적으로 문제를 사고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일찍 이 점을 인식했다면 박해받는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1] 나는 이 좋은 일념이 바로 정념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정념이 있다면 일의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럼 나쁜 일념이나 부정적인 사유는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약 그녀가 거기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하자: 아이고, 난 안되겠다. 여기도 다쳤고, 저기도 다쳤다. 그러면 아마 근육이 끊어지고 골절하여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1]

99년 악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대법제자는 대법에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잇따라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하지만 수련인들은 많이 붙잡히고 현지에 보내져 구류, 노동교양, 징역형을 당했다. 내가 접촉한 대부분 수련생 중에 베이징에 가기 전에 이미 이런 생각을 했다. ‘15일 구류할 뿐이겠지’ ‘베이징에 가면 붙잡힌다’ ‘노동교화소가 가장 좋은 수련 환경이다’. 이런 전형적인 부정적인 사유, 부정적으로 문제를 사고하는 경향으로 많은 수련생에게 나타나지 말아야 할 박해가 나타났다. 사부님께서 “어떤 수련생은 법을 실증하기 위해 모두 구치소에 가고, 노동개조를 당하고, 판결을 받아야만 비로소 가장 좋은 수련이라고 말한다. 수련생들이여, 이런 것이 아니다.”[2]라고 말씀하신 후에야 수련생들이 그렇게 문제를 사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럼 당시 잔혹한 탄압을 어떻게 대해야 정념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수련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법을 위해, 사부님을 위해 베이징에 반드시 가야 한다. 나는 당신들이 붙잡으라고 온 것이 아니라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무슨 노동교화소, 구치소에 가지 않겠다. 그곳은 나쁜 사람을 수감하는 곳이지 좋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니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정념에 따랐기에 결국 평안하게 갔다가 평안하게 돌아왔다. 물론 붙잡힌 수련생의 원인은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하지 않아 조성된 상황을 탐구 토론한 것이다.

1. 부정적인 사유의 근원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수련인도 정념으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일에 부딪히면 왜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사유할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것들이 다 그것의 근원이 있다.”[1] 우리는 부정적인 사유의 근원을 파내야 한다.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기타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부정적인 사유는 구세력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깨달았다. 현실적인 각도에서 보면 악당 문화가 사람을 세뇌하여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당(黨)문화 속에 담겨 있어 조성된 것이다. 오랜 시간의 각도에서 보면 악당은 구세력이 안배한 것이고 그것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구세력이 이렇게 사유하면 그것들도 그런 생각일 것이다. 소위 ‘당신의 정념을 때려서 나오게 하다’는 이렇게 파괴적으로 대법제자를 시험하는 것은 사부님의 정법에서의 요구를 위배했고, 정법 이치 중의 수련 법리를 위배한 것이기에 이런 일이 나타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당시는 아직도 인류가 5, 60년대에 처했을 때인데, 사람은 아직도 비교적 단순하고 비교적 선량했다. 구세력은 사람의 이런 상태는 법을 얻기에 너무나도 쉽고, 사회상의 선념(善念)이 너무나 강한 것을 보았기에, 많은 현대적인 의식, 현대파 예술과 학설을 만들어냈는데, 각 영역마다 현대의 부면(負面)적인 것들로 가득 찼으며, 최후에 이 부면적인 요소가 전반 세계를 점령하도록 했다.”[3] “완전히 부면적인 이런 하나의 사회형식 하에서, 당신이 한 갈래 신의 길을 걸으려 하고, 당신이 정도(正道)로 가려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깊이 알고 있다.”[3] “일단 부면적인 요소가 사람의 의식과 사회형태를 점령하게 되면, 인류는 더는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의 이지가 부면적인 요소에 의해 통제당했기 때문에, 일을 할 때 그 자신은 그것이 자신의 사유인지 아닌지를 똑똑히 분별하지 못한다.”[3] “그럼 이 표면상에서는 이미 부면적인 사회교육으로 말미암아 현대적인 변이의식이 아주 강한 관념을 형성하였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 관념, 부면적인 요소, 그것은 결코 간단하고도 간단한 요소가 아니며, 그것의 배후에는 사령(邪靈)이 있는 것으로, 사탄이든, 공산사당(共産邪黨)의 사령이든, 그것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것의 그런 사악한 생명을 이용해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 현대 사람은 행위가 표현될 때에 자신의 사상인지 아니면 부면적인 요소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는지 똑똑히 분간하지 못한다.”[3]

이 점을 인식한 후 나는 법공부를 강화하고 ‘해체 당문화’를 보고 ‘신전문화’ 프로그램, ‘당문화 제거’ 밍후이 특별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기에 혜택이 많았다. ‘신전문화’ 106회 중의 이야기 하나를 발췌하고자 한다.

공멸(孔蔑)은 공자의 조카고 복자천(宓子賤)은 공자의 학생이다. 두 사람은 모두 현령이 되었다. 한 번은 공자가 공멸을 만난 후 물었다. “너는 벼슬을 하고 어떤 수확이 있고 어떤 손실이 있느냐?” 공멸이 말했다. “수확은 없고 3가지 손실이 있습니다. 군왕이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한 층 한 층 옷처럼 많습니다. 정무가 다망해 근심 걱정이 태산 같으니 학문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배워도 무슨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에 이것이 첫 번째 손실입니다. 받은 복록은 죽 속에 쌀알 정도밖에 되지 않아 친척들을 돌볼 수 없어 친구들이 절 점점 멀리하고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손실입니다. 공무가 다급해 많은 일을 예절에 따라 할 수 없고 환자를 문안하러 갈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또 이해하지 못하니 이것이 세 번째 손실입니다.”

공자는 또 복자천이 있는 곳에 가 보니 현지에는 산물이 풍부하고 백성의 생활이 풍요로웠으며 백성들이 성실하고 예의가 있었다. 공자는 복자천에게 물었다. “너 벼슬을 하고 어떤 수확이 있고 어떤 손실이 있느냐?” 복자천은 말했다. “무슨 손실은 없고 세 가지 수확만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번잡한 공무를 처리해도 성현의 이치를 지도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는 진리의 기회로 여겼더니 다시 이치를 배웠을 때 더 투철하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수확입니다. 복록이 죽 속에 쌀알처럼 적어도 친척에게 일부 나누어 주었더니 친구 관계가 더 밀접해졌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수확입니다. 공무가 긴박해도 시간을 내어 환자 문안을 갔기에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수확입니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처지에 직면했는데 왜 공멸에게는 손실만 보이고 복자천에게는 수확으로만 보일까? 이것이 바로 일을 대하는 사유 방식이 다르고 각도, 마음이 다르기에 그 결과도 다른 것이다.

2. 정념으로 사유한 체험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하는 데 대한 나의 이해는 사람의 아주 얕은 층차에서 말하면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향상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생상극의 이치를 알고 있다. 인류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제약한다. 좋지 않은 일에 부딪혀도 모두 좋은 일면이 존재한다. 잘 찾고 좋은 일면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좋지 않은 일면을 찾고 좋지 않은 일면의 영향을 받으면 좋지 않은 일면이 주도를 차지하기에 좋지 않은 측면으로 문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 방면이고 다른 한 방면은 전 인류사회 매체, 선전 보도 중에 부정적인 것이 넘치면 우리 사유는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요소 중에서 문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사악한 당(黨)문화 독해로 더 그것에 순응해 생각할 것이다. 결국, 그 속에 빠져있으면서도 모를 것이다.

한 번은 한 수련생이 진상 전단을 붙이러 갔다가 머리를 들고 보니 정수리 위에 감시카메라가 있었는데 마침 그녀를 향했다. 당시 그녀는 생각했다. “큰일 났구나, 나를 찍으면 안 되는데.” 결국, 얼마 되지 않아 현지 파출소에서 그녀를 붙잡아갔다. 게다가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떤 수련생은 같은 상황에 부딪혔지만 “아무것도 촬영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없다”라고 생각했다. 결국,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이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의 교훈을 받고도 명석해지지 못하는가?!

3. 어떻게 긍정적인 사유와 부정적인 사유를 분별할 것인가?

정념으로 사유하는 것은 대법 수련 원칙에 따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최대한도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해야 한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문제를 많이 사고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납한다면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관용을 체현한 것이고 타인을 생각한 것이기에 상대방에게 적극적이고 향상하며 홀가분한 느낌을 줄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사유는 자기 각도에서만 문제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 명성이 손실을 받을 수 있을 지부터 먼저 생각할 것이다. 가장 주요한 것은 늘 질투심을 품고 상대방의 부족함과 실패를 생각하고 상대방의 성공을 질투한다. 이런 사유는 타인을 칭찬하는 각도에서 문제를 보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모순이 발생하면 먼저 남 탓을 하며 비평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을 승인하려 하지 않으며 사과하려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사유가 없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지금 단계에서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그때는 마음이 즐겁고 홀가분하며 희망이 있고 자신감이 있으며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을 것이다. 부정적인 사유는 두려움, 공포, 방법이 없음, 소극적, 원망, 희망이 없으며 심지어 절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련생이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자기 사유가 바른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바르지 않으면 즉시 바꿔야 하고 다시 다른 한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사유 패턴을 바꾸는 과정이다. 부정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관념을 바꾸면 사태는 단번에 변할 것이다.

나는 한동안 엄중한 ‘병업’ 상태에 처한 적이 있다. 그때 매일 생각한 것은 내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나, 저 병에 걸리지 않았나? 내가 걸어 지나올 수 있을까? 배가 아파 밥을 먹을 수 없었고 물도 마실 수 없었으며 대변도 보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 극심한 통증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죽음을 생각했고 육친을 생각했으며…… 완전히 모두 부정적인 사유였다. 어느 날 한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 내 이런 상태를 보고 한마디 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걸어 지나올 겁니다.” 당시 나에게는 상당히 큰 격려였다. 난 중에 처한 수련생에게는 아주 큰 격려였다. 이 정념이 아주 강한 한마디 말, 그녀의 이런 적극적이고 낙관적이며 향상하는 마음가짐에서 나는 부정적인 사유에서 뛰어나왔다. 나는 다시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래, 나는 정념이 있어야 한다. 사부님을 생각해야 하고 대법에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때부터 일사일념에서 자기 사상을 바로잡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어렵게 부정적인 사유 방식을 바꾸어 나는 병업 가상에서 걸어 나왔다. 이 일에서 나는 고난 속에 처한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이 정념으로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깊이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하는 것인가? 이것은 아주 관건적인 부분이며 수련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일사일념 중에서 매사, 심지어 아주 작은 일에서 우리의 부정적인 사유를 바꾸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일부 작은 일에서 쉽게 홀시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이런 부정적인 사유를 바꾸기만 하면 반드시 이 정형화된 사고를 타파하고 점점 좋아질 것이다.

이상은 나의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니 옳지 않은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합장.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이성(理性)’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5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4/3858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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