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전(明眞)
[밍후이왕] 오후에 영화 ‘당신을 위해 왔노라(爲你而來)’를 보면서 나와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화의 줄거리와 대사가 너무나 진실해 한순간에 나를 20년 전으로 이끌고 갔다.
1999년 4월 24일 저녁, 어머니는 연공장에서 돌아와 톈진(天津) 수련생이 붙잡혔다고 했다. 내일 일요일에 모두 국가 민원실에 상황을 알리러 간다고 해서 나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모녀는 일요일(4월 25일) 오전 7시쯤, 집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국가 민원실로 가자고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그때 아침에는 안개가 비교적 많고 날씨도 습하여 사람이 별로 없었다. 택시기사는 나는 듯이 달려 20분도 안 되어 우리를 베이신화(北新華)거리와 창안(長安)거리가 교차하는 대로변에 데려다주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 베이신화거리와 푸유(府右)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국가 민원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한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이 우리에게 뭘 하는 사람인지 물어 당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국가에 문제를 반영하려고 청원하러 왔어요”(내가 이렇게 커서 어느 날 청원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를 따라 이쪽으로 오시요.” 경찰이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따라 도로 맞은편에 있는 퓨유거리로 갔다. 도로를 지나자 경찰은 안쪽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감사를 표하고, 푸유거리 안쪽으로 가서야 이미 많은 수련생이 푸유거리에 있는 것을 보았다. 국무원 정문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멈춰선 우리는 나와 어머니 직장의 동료들이 모두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대략 9~10시쯤에, 주룽지 총리가 몇몇 공무원들을 데리고 국무원에서 나와 국무원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련생들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이렇게 많이 와서 뭘 합니까?” 이때 한 수련생이 “총리님, 우리는 모두 파룬궁 수련생입니다. 우리는 정부에 문제를 반영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총리는 “이렇게 많은 여러분과 얘기할 수 없으니 누가 책임자입니까……”라고 말해 한 수련생이 “우리는 책임자가 없이 혼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에 총리는 “그럼 당신들은 대표 몇 명을 뽑아서 나를 따라 들어와 얘기합시다.”라고 말하고는 국무원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와 함께 왔던 공무원들이 몇 가지 조건을 말하면서 국가기관에 있는 국장급 간부, 군대에 있는 무슨 계급 이상의 장교, 고급 지식인……이 있느냐고 했다(여기서 다 기억할 수 없음). 그리하여 한 수련생이 푸유거리를 따라가면서 물어보자 즉시 십여 명의 수련생들이 공무원을 따라 국무원으로 들어갔다.
그날 안개는 오전 10시 넘어서야 흩어졌다. 총리에게 가서 상황을 알리는 수련생들이 돌아오길 모두 조용히 기다렸다. 이때 많은 수련생은 하늘에서 거대한 파룬(法輪)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정오가 되자 한 수련생은 아주 순조롭게 상황이 반영되어, 들어갔던 수련생들이 아주 빨리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오가 다 지났는데도 수련생들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우리 앞에 서 있던 경찰은 일찌감치 경계를 늦추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던 그들이 정오 때는 몸을 돌려 앞줄에 서 있는 수련생과 한담까지 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몇 대의 방탄 승용차가 국무원으로 빠르게 진입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또 방탄 승용차가 와서 푸유거리에서 가다가 멈추곤 했다 (그 차가 장쩌민의 승용차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음). 그런 후 경찰력이 많이 배치되었고, 경찰들 사이에 흰 셔츠 사복을 입은 경찰까지 끼어들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사복 경찰들 사이에 또 헬멧을 쓴 군인들이 끼어들었고,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도 조용히 설치되었다. 또 카메라가 도로변에 있는 수련생들을 천천히 촬영하고, 줌 카메라를 든 기자도 수련생들을 사진 찍었다. 오후 4시 반 후에 날씨가 다시 흐려지고 이따금 찬바람이 불어왔다.
89년 6.4를 경험한 베이징 시민은 눈앞의 광경에 대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했다. 이때 우리의 일부 젊은 수련생들이 앞줄에 서서 만약 중국공산당이 학살하기 시작하면 뒤에 서 있는 아주머니와 어르신들은 아직 한 가닥 삶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희 아버지는 그 후로 우리 모녀가 여기에 올까 봐 걱정했을 것이다(그때 아버지는 국내에 있지 않아 우리 모녀가 청원한 사실에 대해 몰랐음).”라고 말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갈 때까지, 푸유거리의 가로등은 우리를 등진 병사들의 철모를 비추었다. 완전무장한 그들은 침묵을 지켰고, 우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갑자기 국무원에 가서 상황을 설명한 수련생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모두에게 톈진 수련생이 이미 석방되었고, 파룬궁 서적은 정상적으로 출판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리하여 온종일 푸유거리에 서 있던 수련생들이 재빨리 떠나갔다.
월요일 아침 베이징에 비가 내렸다. 나는 출근길에 푸유거리를 지나다가 같은 차에 탔던 동료로부터 “어제 여기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만 명이 넘었다고 해요……”라는 말을 들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해 조용히 서 있던 수련생들을 회상하면, 아주 평온하게 그날을 보낸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생사를 내려놓고 대법을 위해 진실한 한마디 말을 하는 위대한 수련의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몹시 설렌다.
원문발표: 2019년 4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온고명금(溫故明今)>4.25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23/3854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