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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인다’에 대한 재인식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속인의 성어 중에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인다(自欺欺人)’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고 풀이한다. 이것은 속인의 해석이다. 속인은 사상 속의 각종 염두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며, 어쨌든 이 두뇌에서 반영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자기’로 여긴다.

우리 수련인은 속인사회에서 수련한다. 수련이 잘된 부분은 즉시 격리되고, 남아있는 속인의 부분을 여전히 닦아야 한다. 사람의 부분에는 사람마음, 집착, 욕망, 취미가 있다. 수련자가 정진하지 못하고 자기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 주이스(主意識)를 느슨히 하면 표현되는 것이 속인과 별다른 구별이 없으므로,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고, 진선인(眞善忍)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아는데도 그런다.

예를 들면, 업무를 할 때 추세에 영합해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휴대폰 위챗 인터넷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기한 것에 이끌리며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중독되어 통제된다. 법 공부, 연공, 발정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일함이나 일 욕심에 통제되어 대법 책을 들고 보기 싫어하거나 대법 책을 보면 마음이 급해져 속도를 내서 읽고 얼른 임무를 완성한다. 또는 발정념 할 때 허튼 생각을 하거나 아예 ‘달게’ 한잠 잔다. 진상을 알리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우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고 각종 ‘이유’로 한 번 또 한 번 기회를 놓친다.

그러나 어쨌든 수련인이므로 대법 표준을 알고 그렇게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난 뒤에 후회하고 자책한다. 명석해졌을 때는 본인이 속인의 행위와 혼동된 것에 대해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였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현재 나는 발견했다. 우리가 속인처럼 이것을 ‘자기를 속인다’고 여기는 것이 틀렸다. 우리의 진아(眞我)는 본성이 순진하고 진선인에 동화되었는데, 어떻게 자기를 기만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의 주이스가 대뇌와 육신에 대해 통제를 느슨히 하면 사상업과 사악한 외래 영체가 집착, 정, 각종 욕망 등의 틈을 타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그것들은 교활하게 우리 주이스를 마비시키고, 주이스로 하여금 그런 일을 ‘별일 아니야, 다 언급할 필요도 없는 자잘한 일이야’라고 여기게 한다. 그래서 주이스는 대뇌와 육신에서 ‘순순히 물러나’ “여기서 잘들 놀아라, 나는 자러 갈테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는 자기가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요소(사람마음, 집착, 욕망의 다른 공간에서의 실질은 사악한 영체)가 우리의 주이스를 기만한 것이다. 왜 중대한 일 앞에서, 박해의 압력 앞에서, 엄중한 병업 가상에서는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찾고 잘할 수 있을까? 그때 주이스는 사태가 심각해, 심지어 생사의 존망과 연관된다고 생각했기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주이스가 그에 따라 하지 않고 대뇌와 육신의 통제권을 빼앗아온 것이다. 열심히 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발정념을 중시하며 자기를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 법으로 돌아오면 주이스가 강해지므로 재빨리 악을 제거해 이쪽이 정상으로 된다.

그러나 이때의 정념은 ‘강박으로’ 나온 것이다. 정법 수련에 작은 일이 없다는 것을 내심에서 진정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수련의 엄숙함을 인식하지 못해서 평소에는 사상 속의 생각 하나 염두 하나마다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는 사상이 있으므로, 수련을 ‘일’로 잘못 알고 있고, 박해받지 않고 고통이 없는 것이 수련 목적으로 된 것이다.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면, 일이란 마무리될 때가 있고 일을 다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느슨해진다. 수련을 ‘일’로 여기면 일하고 퇴근해야 한다. ‘출근 중’일 때는 자기를 수련인으로 여길 수 있지만 ‘퇴근’해도 자기를 여전히 수련인으로 여길 수 있을까? 수련의 목적을 박해받지 않고 고통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면, 박해가 지나가거나 환경이 느슨해져 압력과 위험이 없고 몸이 편안하면 정진하려는 동력을 잃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수년간 같은 문제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보기에 작은 일인 것 같은 곳에서 여러 번 넘어졌고 문제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압력과 어려움 속에서 나의 주이스는 정신을 차리고 한동안 정진했지만 지나면 또 느슨해졌다. 압력이 커지고 어려운 상황이 또 오면 또 한동안 정진하다가…… 이제야 나는 분명히 보아냈다. 이런 ‘정진’은 진정한 정진이 아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정신병 환자처럼 의사가 전기봉을 들면 전기충격을 받을까 겁나서 그의 주이스가 정신차리고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안일함을 구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런 ‘정진’, 가짜 정진의 원인이다.

속인의 말로 하면 그런 가짜 정진이 바로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인다’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평소 주이스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중요한 때에 언제나 사악한 요소에 반복적으로 마비되고 기편당하는 것이다.

수련이 잘된 일면이 격리된 요소가 있지만, 지금 나는 이를 구실로 스스로 회피한다면 사악한 요소가 빈틈을 타 이용당해서 자기를 마비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련이 잘된 일면이 격리되었으니 느슨히 해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된 원인은 자기가 수련하는 목적이 명확치 않고 자기를 높은 표준으로 요구하지 않아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더 깊은 각도에서 보면 근본적인 집착을 버리지 못한 요소가 있다. 당초 수련하러 왔을 때 ‘재난을 없애고 어려움을 제거하고 병을 치료하고 좋은 생활을 누리려는’ 근본적인 집착이 그 속에 있을 수 있다. 장기간 수련하면서 한 일은 적지 않지만, 그 근본적인 집착을 제거했는가? 없애지 않았고 덮어 감춰져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근본적인 집착이 자기를 진정으로 정진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그 마음을 집어내어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이 매우 빠르다.”[1] 나는 인식했다. 사부님의 안배 속에서 집착과 사람마음이 폭로되어 나오는 것은, 그것을 제거할 좋은 기회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선결조건이지, 사악한 요소가 박해하는 구실이 아니다. 집착을 보면 중시하고 그냥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단번에 지나지 못해 넘어지더라도 빨리 일어나 계속 걸어가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엄격히 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높은 표준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 점을 해내려면 반드시 자기의 주이스를 강화해야 한다. 주이스를 강화하려면 법에 동화되어야 하고 시시각각 법에 있어야 한다. 법에 동화하고 법의 각도에 서 있으려면 법이 마음에 닿게끔 배워야 한다. 나는 발견했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선결조건은 진정으로 법을 잘 배우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2]

많은 수련생의 교류 문장에서 보았다. 법이 마음에 닿게 하려면 법을 외우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 말이다. 특히 장기간 각종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련생이라면 마음을 굳게 먹고 법을 외워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울하고 퇴폐적이 되며 무기력해 어쩔 수 없어 하고, 뉘우치고 후회하며 소중한 시간을 흘려버리면 안 된다. 시시각각 법에 녹아들어야 비로소 정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정진이다.

개인의 인식이므로 부족한 점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幹擾)’

 

원문발표: 2019년 4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16/3841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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