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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수련생들은 표면적인 바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하자

헤이룽장성 전화 걸기 항목에 참가한 소감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이번에 전 세계 전화 걸기 팀에서 헤이룽장성 다칭(大慶)과 하얼빈(哈爾濱)의 전문 안건을 겨냥한 전화 통화에 동참해 감회가 새롭다. 국내외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다. 국내 헤이룽장성에서 2018년 11월에 파룬궁 수련생을 대규모로 붙잡은 데 관해 우리는 올해 3월에야 이 특별 안건에 전화 통화를 할 차례가 됐고, 많은 수련생이 여전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비록 RTC플랫폼은 공안기관, 검찰청, 인민법원 이 기관들을 상대로 진상전화를 하지 않았지만, 다른 중요한 기관과 현지 주민에게 진상을 널리 알리고, 발정념으로 사악을 청리한 것도 현지 수련생들과 정체를 이루어 그들과 협조해 사악을 제거하고 중생을 구도한 것이다.

밍후이왕(明慧網)이 전하는 사건들은 물론 모두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것들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수련생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공감하지 못하면, 경찰은 이들의 이른바 ‘범죄 증거’를 수집해 불법적으로 재판을 준비하고 형을 선고한다.이 중요한 시점과 긴급한 정념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만약 해외 수련생들이 그 중요성과 긴박감을 인식하지 못하면 전화를 걸 때 위력이 없다.

명백히 말하면 국내외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다. 해외 수련생은 중국의 사악한 환경과 이탈해 있기에 국내 수련생들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기가 쉽다. 표면의 안일한 환경은 바로 사악이 해외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교활한 수단이다. 수련생에게 이처럼 중요한 항목의 전화를 거는 것을 개의치 않는 태도와 서두르지 않는 태도, 무감각하고 마음을 쓰지 않는 등으로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중국 수련생들이 여전히 사악한 박해를 받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원인은 사악 때문에 심각하게 교란을 받는 상태이기에 이런 느낌인 것이다.

나는 전화하기 전에 밍후이왕에서 관련 기사를 보고 상황을 알아보기를 제안하는데 이렇게 하면 흐리멍덩하지 않고 지피지기(知己知彼-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구절에서 유래함)하기에 여러 지역과 사람을 대상으로지혜롭게 더 많은 전화를 할 수 있다. 나는 하얼빈 제2구치소의 현황을 특별히 찾아보았는데 대기원(大紀元)에도 보도되어 있다. 끌려간 여성 수련생들은 보편적으로 옷을 다 벗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몸수색을 당한다. 턱을 다른 사람에게 힘껏 잡혀 입이 강제로 벌려져 검사를 받고, 두 다리를 벌리는 동시에 두 팔은 죄수 두 명에게 강제로 붙들려 제자리에서 세 번 뛰어야 하며 항문 부위에 무엇을 넣지 않았는지도 검사를 받는다. 변호사를 만나거나 경찰의 이른바 ‘심문’ 후에 감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죄수들은 감옥 경찰의 의도대로 매번 파룬궁수련생의 모든 옷을 벗기고 바닥에서 쪼그려 뛰기를 시키는 등으로 인격을 모독한다.

감금 중인 이들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죄수, 감옥두목(죄수지만 식사나 야간 초소를 관리하는 죄수)들의 끊임없는 제멋대로 행하는 구타와 욕설, 체벌과 능욕을 당한다. 밤에 잠을 잘 때 반듯이 눕지 못하게 하고 몸을 뒤집으면 안 되며(늦은 밤에 통일로 한 번 몸을 뒤척이게 함) 잘 때 하나하나 측면으로 바싹 붙여 눕히는데 머리와 발을 맞댄 채 서로 거꾸로 누워 빽빽이 붙어있어 숨쉬기도 어렵다. 마치 갈치처럼 옆으로 다리를 곧게 뻗고 자야 했다. 이런 자세로 누우면 두 다리와 양쪽 관골이 눌려 밤새 형벌을 받은 것처럼 아파서 전혀 잠을 잘 수 없다.

이 기사는 2018년 5월 4일 글인데 그리 오래전의 기사가 아니다.

수련은 표면 형식이 아니라 닦는 것은 마음이다! 해외 수련생들은 표면 형식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는데, 나는 무슨 항목에 참여했고 무슨 행사든지 다 참석했는데 보면 모두 빠지지 않았다는 등이다. 온종일 바쁘게 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는데 또 시간이 되면 밤에 일찍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등이다. 수련인이 반드시 있어야 할 정진의 상태와 용맹한 수련으로 끊임없이 층차를 돌파하는 기세는 어디 갔는가? 중생이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대법제자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들의 목숨을 그들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 생명의 근원과 세상에 내려온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마저도 너무나 조급한데, 당신들은 도리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그러나 최후에는 울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1] 우리는 조급해서 안달이 난 적이 있는가? 해외 수련생의 편한 환경에서 수련에 서두르지 않고 혼자 잘 살면 되는 상태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중국 대법제자와 잘 협조해 제자가 조사정법(助師正法)해야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수련은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하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절대 스스로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6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4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2/3846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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