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의료보험’에 대해 수련생과 교류” 문장을 보고 내 생각을 수련생과 교류하고자 한다.
문장에서 박해로 뇌출혈(장기적으로 고혈압 병업 가상이 있음)이 발생한 50세 여성 수련생을 보러 갔다고 언급했다. 수련생은 그녀의 병업은 박해로 조성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한 상황 중에 병업의 방식도 분명 있다. 여기에서는 박해당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는데 박해의 요소를 크게 보고 자신이 마땅히 감당하고 갚아야 할 고통을 경시한 것은 아닌지.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이 자신의 수련에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마땅히 새로 자세히 살펴보고 수련해야 하는바 목적은 심성과 경지를 제고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증세의 소실은 부수적인 것이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병’이란 이 글자를 꺼내기만 해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줄곧 이 구절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불경스럽게 생각했었다. 병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가? 그리고 사부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
얼마 전에 한 가지 일이 발생했다. 새끼손가락이 갑자기 곧게 펴지지 않았고 내 의지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마음속으로 좀 당황했는데 이런 느낌이 들었다는 자체가 좀 이상했다. 이는 소업이 아닌가? 왜 좋은 일로 간주하지 않고 두려워하는가? 후에 연속 며칠 동안 점점 심각해졌다. 붓고 아픈 느낌이 들었는데 통풍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깜짝 놀라 생각했다. 수련인은 병이 없어. 진수(眞修)하는 사람은 병이 없어.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고 진수(眞修)하기에 병이 없어. 그럼 이는 무엇이지? 네가 무슨 장삼이사(張三李四)라 해도 그건 사람이 붙인 명사일 뿐이다. 그럼 이는 무엇이지? 오, 업력, 바로 업력이다. 그럼 나는 인정하고 갚을게.
이 일에서 수련인은 ‘병’이란 개념이 없고 다만 업력의 개념이 있을 뿐임을 이해했다. 이는 ‘병’이라 부르는가 부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속인과 수련인이 병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속인이 말하는 병은 생리 혹은 심리상에 나타나는 건강하지 못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속인은 병의 내원(來源)의 진상을 모른다. 사람이 이전에 좋지 않은 일을 하고 나쁜 일을 한 인과응보이며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하늘의 이치를 모른다. 오로지 현실의 증세만 중시한다. 우리 수련인은 소업한다. 사부님께서 책임지시기에 그중에서 자신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일부분만 감당한다. 하지만 속인은 업을 갚는 것이기에 얼마가 있으면 얼마를 갚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같은 개념이겠는가. 사부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 또한 매일 발정념하기에 사악의 교란이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문장에서는 또 특수한 상황을 겨냥하여, 병업 가상으로 조성된 경제손실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 의료보험을 가입하되 마음을 담담하게 내려놓고 그것을 중시하지 말 것을 건의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건의는 좋지 않다. 수련 중에는 무슨 특수 상황이 없다. 법은 표준이 있는 것이고 엄숙한 것이다. 어떠한 생명도 똑같이 대한다. 이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수련인의 정념을 망가뜨릴 것이다. 까놓고 말하면 이미 수련인은 속인을 초월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속인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련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때는 잠재의식 속에서 이미 자신이 장래에 병에 걸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돈을 써가면서 그것에 가입해서 뭘 하겠는가. 겉으로 가입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단지 아파서 입원했을 때 돈을 좀 적게 쓰려는 것이다. 돈을 좀 적게 쓰는 것은 작은 일이다. 관건은 자신이 수련인이 맞는지 의심을 하게 되는데 이는 큰 문제이다. 사부님께서 법 속에서 매우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수련인은 병이 없으며, 이는 수련인이 금방 수련의 문에 들어왔을 때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당신이 한편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한편으로 자신에게 나는 수련인이며 병이 없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데 이는 모순되고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회사에 근무하면 월급에서 직접 5대 보험을 공제하는데 그 속에 의료보험이 들어 있는 것은 다른 문제인바 그건 회사에서 행하는 것이다.
문장에서 또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언급했는데 이는 자신에게 물러설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만약 예기한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한 갈래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병에 걸릴 수 있는가 이 문제에서 물러설 여지를 남긴다면 기타 문제에서도 여지를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 심각하게는 원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자신에게 여지를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수련은 하나의 믿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기왕 우주대법-파룬따파 수련을 선택했으면, 기왕 사부님의 제자가 되는 행운을 만났으면 또 다른 선택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현재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도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은 개인의 관점이며 현재 층차의 인식이기도 하다. 옳지 않은 곳은 수련생들께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9년 4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9/3848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