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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리 길 구름과 달, 58일간의 낮과 밤

노수련생이 간고한 그 한 단락 역정의 에피소드를 회억하다

글/ 중국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전설적 색채가 있는 이 노년수련생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라오펑버(老馮伯)라고 존칭하고 있고 1941년에 출생한 다롄사람이다. 1964년 ‘3선(線)’을 지원하려고 우리 성에 왔고 강철공장 차대에서 기사로 있었다. 1996년 3월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다.

처음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1999년 ‘7.20’ 중공이 갑자기 파룬궁에 대해 피비린 탄압을 시작했고 라오펑버는 처음에는 멍해져 어떻게 법을 수호해야 할지 몰랐다. 10월 초에 비로소 전국 각지에서 이미 많은 대법제자가 베이징에 간다는 확실한 소식을 듣고서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안 갔는가?” 하여 그는 10월 5일 차를 타고 갔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해서 그가 얼굴을 드러내자 접대하는 베이징수련생이 바로 알아보고 인사를 마친 후 시외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후에 또 여러 번 이전했다. 베이징수련생들은 아주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사당 우두머리의 눈 밑에서 곳곳을 다니며 청원하러 온 수련생들을 찾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특히 천방백계로 그들을 모아서 법공부와 교류를 조직했다. 교류의 중심화제는 우리가 왜 베이징에 와야 하는가? 베이징에 와서 무엇을 하는가였다. 랴오펑버는 일주일 넘는 심도 있는 법공부와 교류가 진짜로 뼈에 새기듯이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확이 너무나 큽니다. 진정으로 사상에서 대법제자의 현재 세 가지 요구를 명확히 했는데 첫째는 ‘나의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이고, 둘째는 ‘붙잡힌 모든 수련생을 석방하라’이며, 셋째는 ‘나에게 정상적인 수련환경을 돌려달라’입니다.”

교류회가 끝나자마자 라오펑버는 직접 국가청원처에 갔고 면전에서 세 가지 요구사항을 진술하려고 준비했는데 누가 알았으랴. 청원처 기관 대문 앞의 우측 거리로 가자 길가 양옆에 가득 서 있던 경찰들이 벌떼같이 몰려와 막았다. 강제로 붙잡았는데 한 명이 오면 한 명을 붙잡아 수감했다.

라오펑버는 14일간 수감된 후 자신의 성소재지로 송환되었다(그때 본 성소재지로 송환된 청원 수련생은 총 23명이었다). 성으로 돌아온 후 그는 회사 소재지의 어느 구역 공안분국에 수감되었다. 11월 5일 그에게 한 장의 ‘치안관리처벌재판서’ ‘사회관리질서 위해 경고’를 주었고 1주일간 불법으로 구류했다.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한 달 뒤 라오펑버는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갔다.

베이징에는 청원할 곳이 없고 도리를 말하고 억울함을 말할 곳이 없으며 또 불법적으로 체포 수감되었으니 이번에 베이징에 가서는 더는 국가기관에 가지 말고 그는 광대한 민중을 향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그는 바로 톈안먼광장에 갔고 그다음 광장을 향해 바닥에 앉아 다리를 틀고 정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이로써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신분을 알렸다.

과연, 아주 빨리 많은 행인의 주의를 불러일으켰고 에워쌌는데 그 속에 경찰이 있었다. 두말없이 라오펑버를 붙잡아 다시 본 성으로 돌려보냈다. 어느 구역 공안분국에 보냈고 2000년 1월 28일 ‘사회관리 교란’ 죄명으로 ‘치안관리처벌판결서’를 내리고 불법으로 15일간 구류했으며 섣달 그믐날 석방했다.

두 차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라오펑버는 현지 공안이 엄밀하게 감시하는 중점대상자가 되었고, 또 설날 민감시기여서 파출소 주민위원회와 회사에서 날마다 사람을 파견하여 인사하며 라오펑버에게 절대로 다시는 베이징에 가지 말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다가는 일체 후과는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그가 집 문을 나서지 못하게 하고 수련생들과 만나지 못하게 했고 또 그의 가족까지 위협했다.

왜 계속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기를 견지했는가

이때 라오펑버는 이미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려는 결심을 굳혔는데 진짜로 ‘마음을 굳혔다!’ 후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요?”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6개 글자입니다. ‘앞으로 나서서 진실을 말하자(站出來,講眞話)’입니다.” 그는 대법 속에서 심신이 이익을 얻은 제자로서 대법이 사악에 의해 먹칠 당했을 때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대법을 위해 감히 공정한 말을 하지 못하면 천리와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대법이 박해를 당할 때 대법제자 당신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남이 누가 알겠는가? ‘앞으로 나서서 진실을 말하자’는 세인으로 하여금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전 세계를 향해 파룬궁이 중국에서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의미는 무척 중대하다! 현재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갈 수 없고 모두 감시당한다면 그럼 걸어가자! 바로 걸어서라도 베이징에 가는 것이다.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베이징에 간다’라고 결정

사당이 알지 못하게 하려면 누구에 대해서도 모두 비밀이어야 했고 아내 아들딸도 알지 못하게 하고 먼저 사상적으로 준비를 해야 했다. 당연히 먼 길을 떠날 때 우선 경비를 준비해야 한다. A지역에서 베이징으로 가려면 5000리의 거리가 있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5개의 성을 지나야 했고 최소한 2달 넘는 시간이 걸린다. 충족한 경비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라오펑버의 호주머니에는 가련하게도 54위안밖에 없었고 이 돈은 후에 보행으로 베이징에 걸어가는 길에서 배터리를 구매한 것 외에(철길을 따라서 걸으면 반드시 무수한 길고 긴 터널을 걸어야 하고 또 야외에서 많은 밤을 지내야 해서 손전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다른 것에 사용할 수 없었다. 가족을 속이고(그 당시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함) 또 감시를 당하는 정황 하에서 경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또 이번 행적이 폭로될 수 있어 지체하면 안 되었다. 펑버는 이때 과단성 있게 담대한 모험적인 결정을 했다. 경비가 없어도 보행으로 베이징에 가자였다.

그는 품에 ‘전법륜’ 한 권을 품고 한 세트 갈아입을 속옷과 얇은 담요 몇 개 찐빵을 챙겼다. 우산도 가지지 않고 신년 9일 날 새벽 4시에 조용히 길을 나섰다!

멀고 먼 길에서의 간고함과 마난

1. 어떻게 음식을 얻었는가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 “병마가 움직이지 않아도 식량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인데, 그럼 숙식비가 한 푼도 없는 라오펑버는 또 이 길고 긴 노정에서의 매일 하루 세끼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라오펑버의 말에 의하면, 길에서 음식물을 얻는 가장 주요 내원은 철길 양옆에 승객들이 차에서 버린 먹다 남은 음식물이었다고 한다. 차량 운행 횟수가 많으면 승객도 많고 던진 음식물도 많고 무엇을 주우면 무엇을 먹었는데 물론 되도록 깨끗한 것 비닐에 넣어진 것, 먹을 수 있는 것을 주웠다.

길에서 그는 그와 같이 철길 옆에서 음식물을 줍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대다수는 농민들이고 한 무리 한 무리였다. 그는 또 한 가지 일을 말했다. “바로 우리 성의 어느 시 정거장 근처에서 그날 나는 다른 한 무리 농민들과 같이 철길 옆에서 음식물을 줍고 있었는데 마침 순찰 나온 철도 근로자가 우리를 내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업복을 입은 나를 발견하고 나를 불러 세웠어요. 당신 어떻게 여기 와서 이 짓을 해요? 더럽지도 않아요? 왜 이렇게 못났어요? 나마저 당신 대신 부끄럽네요! 나는 할 수 없이 떠났는데 얼굴이 화끈거렸죠. 안전을 위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데, 말해도 그가 이해할까요?”

길에서 음식물의 다른 내원은 길옆 부근의 인가에 가서 밥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이는 펑버에게 더욱 어렵고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체면을 아주 중시했던 사람이고 당당한 사내대장부였는데 재능이 뛰어난 노인장으로서 환갑에 가까운 할아버지로서 난생처음 남의 집에 가서 밥을 구걸해야 했다. 이 어찌 입에서 말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말을 어떻게 할까? 이는 그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고 생존하여 베이징에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해야 하는데 사람이 밥을 먹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당시 음식물을 줍고 구걸하는 것 외에 더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이 모두 핍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곤경에서도 펑버는 여전히 자각적으로 사부님의 ‘출가제자의 원칙’을 준수해서 행했다. 배가 고프면 음식물만 요구했고 돈과 재물은 절대 받지 않았다. 유독 한번은 주인집에 음식물이 없어서 2위안 돈을 주려고 했고 펑버는 바로 부근에서 그 돈으로 작은 봉투의 과자를 샀고 또 농가집 아이에게 주었다. 그때는 정월 초순에서 2월 사이라 기온이 아직 차갑고 먹는 것은 주운 음식물이라 차갑고 더럽고 일부는 심지어 기간이 지나 변질되었고 마시는 것은 또 찬물이었다. 그는 본래 내장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전에 간염을 10년간 앓았었다.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위가 불편함을 느꼈고 메스껍고 붓고 후에는 선명하게 위통이 왔다. 출발한 지 1주일이 안 되어 설사를 시작했고 점점 심해졌는데 한 시간에 한 번씩 설사했고 전부 물 같은 변을 보았다. 한번은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는데 전부 피였다. 후에 그는 다시는 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는 나에 대한 고험이다. 그것을 상관하지 말자! 화살이 이미 쏘아져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길을 떠났으니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이렇게 연속 한 달 정도 설사하고 끝내 멈췄다. 이는 라오펑버가 이겨낸 첫 번째 관이었다.

2.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을 어떻게 견지했는가

펑버는 진지하게 회억하여 말했다. 사실 그 긴 여정에서 ‘먹는’ 문제는 또 최대의 난제가 아니었다. 매일 시시각각 마주해야 할 난제는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완강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멈추지 않는가의 문제였다. 철길선을 따라 걷는 것이 빠른 길이고 또 길을 잃지 않는다. 남북 각 지역 노선 정황이 다소 달라도 펑버의 말에 의하면 늘 이 ‘길’이 모두 걷기 어려웠고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절대다수 시간에 모두 두 갈래 철도 선로 중간의 시멘트 침목(전에는 나무 침목을 사용했는데 전부 바꿔버림) 위를 걸어서 단단하고 탄성이 전혀 없었고 침목 사이의 간격과 사람의 보폭과 일치하지 않아서 걷는 것이 아주 적응되지 않았다. 불편하고 힘들고 쉽게 피곤해졌다. 또 헤아릴 수 없는 터널과 철로 고가다리 등등을 지나야 했다.

연속 한 달이 넘도록 설사하고 혈변을 보니 사람은 무척 허약해졌고 피곤해졌으며 무력해졌다. 일어서면 어지럽고 걸으면 좌우로 휘청거렸다. 사람은 쇠약하여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큰바람을 만나면 사람이 원위치에서 빙빙 돌게 했다.

가장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두 다리 두 발의 부종 통증이었고 시시각각 당신의 마음을 쥐어짰다! 펑버는 진짜로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생각해보라, 날마다 걷고 먼 길을 걷고 장기간 걷고 계속 걷고 중간에 조금이라도 필요한 휴식을 하지 않으면 체력은 회복되지 않고 사람은 계속 체력이 고갈되고 피곤한 상태에 처한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었고 저녁에는 뜨거운 물 한 바가지 얻을 수 없다. 뜨거운 물에 따끈하게 발을 씻으면 두 발의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이른바 근육을 이완시키고 피에 활력을 줄 수 있다. 밤에 안정을 찾을 수 없고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상의 각종 연고로 펑버의 두 발과 두 다리는 시종 충혈되고 붓는 상태였고 완화시킬 수 없었다. 매일 출발할 때 억지로 신체를 지탱하여 중심 잡고 일어선 후 두 발을 들었고 발은 통증뿐만 아니라 또 납을 부어 넣은 것처럼 무거워서 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혼신의 힘을 주어야 했다. 발바닥이 앞의 시멘트 침목을 밟을 때 펑버는 이렇게 형용했다. “그 감각은 마치 신발을 신지 않은 것 같고 발바닥에 근육이 없는 것 같은데 마치 발바닥뼈가 직접 철판을 딛는 것 같이 아주 딱딱하여 당신 가슴을 뚫듯이 아파요.” 또 한 번은 발가락이 침목 변두리에 부딪히면서 엄지발가락 발톱이 떨어져 나갔고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보행이 가장 어려운 시각에 라오펑버는 걸어가면서 사부님의 ‘논어’ ‘홍음’을 읽었고 가끔은 앉아서 ‘전법륜’을 배우거나 혹은 가부좌했고 그다음 다시 일어나서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철길 간선은 모두 쌍행선이고 좌우로 통행할 수 있고 차 유동량이 많고 열차가 아주 많아 남북으로 오가면서 쉴 틈 없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 당신의 옆에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하여 앞으로 길을 다그치면서 또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열차는 좌측에 의지하여 운행하고 쌍행선의 좌측 차도를 점유한다. 행인은 보통 쌍행선의 우측 혹은 오른쪽 외측을 이용하여 걸어간다. 그렇다면 후방에서 오는 차는 사람의 좌측 차도에서 운행하여 사람과 차는 각각 한 칸씩 잡고 가기에 방비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오는 차는 사람의 정면에서 오기에 더 주의해야 하지만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정황 하에서 조금이라도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외의 사고도 발생할 수 있는데 라오펑버는 길에서 두 차례 위험한 상황을 만났다.

첫 번째로 차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은 후난(湖南) 경내였고 이미 화이화(怀化)를 지났고 정월 중순이었다. 그는 마침 산봉우리가 기복을 이룬 지대를 걸어가고 있었고 한 개 터널을 지나 또 다른 터널로 진입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였고 곧 저녁이었는데 하늘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음침했다. 이때 그는 사거리 철길로 걸어가고 있었고 온종일 걸은 라오펑버는 지쳐서 다리를 들 수 없었다. 조심하지 않아 지면보다 높은 사거리 철길 중간의 가로 침목에 걸려 넘어졌고 아주 심하게 넘어져 무릎의 극심한 통증으로 두 가닥 철로 중간에서 몸부림쳤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산과 들 사이에서 갑자기 기차 기적소리가 울렸고 기차는 큰 불빛을 밝혔다. “안 돼!” 펑버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보았는데 100m 박에서 터널 산굴에서 열차 한 대가 나타났고 큰불을 켜고 마침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는 미처 방비할 수 없었고 마음속으로 다급하니 사람은 더욱 움직이지 못하고 손발이 말을 듣지 않으면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기지도 못했으며 뒹굴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이 무겁게 누르고 있어 더욱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는 무엇이라 말해도 늦었다! 이 찰나에 펑버는 큰 소리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외쳤다. “리훙쯔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 리훙쯔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 순식간에 한 가닥 부력이 그의 몸을 받치더니 좌측 철로로 떠밀었고 그다음 철로 옆 작은 길가에 떨어져 천천히 앉았다…… 꿈만 같았다.

한참 지나서 펑버는 비로소 청성해졌고 방금 전 그 가슴 뛰는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무한한 감격을 느꼈다. “이는 완전히 사부님께서 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겁니다!” 라오펑버는 몸이 떠오른 그 감각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일주일 뒤에 발생했다. 이미 후난성 지역이었고 역시 흐린 날의 저녁이었다. 이때 그는 쌍행선의 우측에서 좌측 쌍행선으로 지나가려고 했고 철도 밖의 작은 길로 갔다. 그가 말했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먼저 좌측 후방을 보았는데 뒤에서 차가 오는 낌새가 없었어요. 그리고 조금도 멈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몇 가닥 철길을 연속 건너서 두 발이 갓 철길 자갈에 닿고 몸이 아직 중심을 못 잡았을 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 특급쾌속열차가 뒤에서 달려왔고 나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어요. 열차가 지난 열기와 그 거대한 충격은 나를 거의 휘말아가려고 했고 바로 그렇게 한 치 차이로 진짜로 생사가 바로 그 한 치 사이였어요! 너무나 위험했어요! 이 열차는 기적을 울리고 큰 조명을 켜고 달려왔는데 왜 나는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또 100여 개 되는 기차 터널을 지났고 그중에서 두 갈래는 특별히 길어서 5km를 초과했다. 터널 동굴에는 무장경찰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고 행인이 통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산을 넘어서 길을 에돌아서 가야 했고 매번 하루 반나절을 걸어야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걸어야 터널의 다음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억울한 길을 많이 걸어야 했는데 산길은 걷기가 더욱 힘들고 황폐하고 가끔 길이 없는 곳도 있었다. 몇십km에 인가가 없었고 걸으면서 길을 찾아야 했다…… 보행으로 베이징으로 가는 전반 노정에서 또 경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각 지역 공안과 대량의 청원방지요원의 검문을 피해야 했고 베이징에 가까워질수록 검문이 더욱 심해져 그들을 되도록 멀리 피해야 했고 또 그들을 피하느라고 많은 길을 더 걸어야 했다.

물론 다른 한 방면에서 길을 따라 차를 얻어 탈 수 있는 기연도 있었는데 이는 많은 길을 적게 걸을 수 있다. 펑버는 보행으로 허난 쉬창에 도착하여 국도를 걸어서 화베이 대평원의 국도를 걸을 때 그는 화물차 혹은 큰 트랙터를 모는 마음씨 고운 기사들을 몇 차례 만났고 그를 태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펑버는 사절했는데 고생을 해야 비로소 소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보행으로 베이징에 가겠다는 걸음을 내디뎠으면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바로 이렇게 펑버는 차를 얻어 타지 않았다.

3. 노숙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라오펑버는 길에서 또 해결하기 힘든 큰 문제가 있었는데 매번 노숙하는 문제였다. 매번 석양이 서쪽에 드리우고 밤이 다가올 때 그는 쉴 곳이 없음을 느끼면 조금 처량하게 느껴져 걱정을 면할 수 없었다. 오늘 밤은 어디에서 쉴까?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지? 중국에는 무료 투숙이 없고 그는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친척 친구가 있으면 투숙할 수도 있는데…… 그는 길을 걸으면서 길에서 먹고 지금은 또 길에서 ‘자야’ 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그는 철길 옆 멀지 않은 곳에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밤을 보냈다. 환갑인 노인이 혼자서 어두운 황야에서 밤길을 걷고 밤잠을 자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몇십 일간을 계속했다! 이는 일반인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다!

그는 이 몇십 번의 길고 긴 밤을 어떻게 간고하게 지냈을까? 상세한 구체적 정황은 이미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금 단지 가장 좋은 야숙은 철길 옆 작은 정거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켓을 지니고 차를 기다리는 승객이 아니면 아예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겨우 세 군데 작은 정거장이 선심을 내서 그가 안에 들어가서 휴식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쉽게도 겨우 3번의 밤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철길 옆 철거하지 않은 폐기된 당직실이 있어도 행운이었다. 비록 창문과 문이 없어도 지붕이 있고 삼면에 벽이 있어 마른 풀을 찾아서 깔면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다.

먼 길을 걸은 사람은 너무나 지쳐서 앉아서 조금이라도 쉴 수 있으면 모두 큰 행복을 느꼈다. 저녁이 되면 사람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고 너무나 졸리고 졸렸다! 바닥이 있어 몸이 누울 수만 있다면 고개를 젖히고 바로 잠이 든다! 그러나 펑버는 철길 터널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오가는 열차가 지나는 차가운 바람은 특별히 강해서 터널 안에서 소리가 아주 컸는데 귀가 찢어질 지경이라 전혀 잠들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폭우나 폭풍 혹은 천둥이 치는 밤에 잠시 들어가 피할 뿐이고 오래 멈출 수 없다. 후난, 후베이의 농촌 밭에서 임시로 만들어 놓은 우물초막이 있고 삼면이 돗자리로 막혀있어 지면이 너무나 습하고 심지어 물이 차 있는데 만약 벽돌을 찾아 작은 자리를 잡을 수 있어 앉을 수 있거나 기댈 수 있으면 밤을 새울 수 있었다. 하늘 아래 노숙하는 것보다는 낫고 인가의 처마 밑에 서서 조는 것보다 낫다! 아무튼, 큰비가 내리지 않으면 더 나았는데 사람이 너무나 졸리면 마른 작은 지면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예를 들어 수림에서 마른 풀이 있는 바닥, 관목숲, 농가의 풀더미라면 모두 들어가서 잠깐 잠을 잘 수 있었다.

누군가가 펑버에게 물었다. “밤에 나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말했다. 사시(沙市)의 먼 정거장의 교외에서 날이 이미 어두워졌지만, 그는 계속 노숙할 곳을 찾지 못해 철길 옆에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한 무리 폭도가 나타났고 십여 명이었다. 우두머리가 손에 철몽둥이를 들고 큰소리로 서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철곤봉을 들고 흉악하게 말했다. “빨리 돈을 나에게 내놔라. 빨리!” 펑버가 말했다. “나는 거지에요. 어디에 돈이 있어요? 오늘 밤 잠잘 곳도 없는데? 돈이 있으면 이러겠어요?” 우두머리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눈을 흘기며 말했다. “꺼져!” 이 한 무리는 부랴부랴 되돌아갔다!

이 한 무리 사람들은 모두 아주 젊었고 10여 세, 20여 세였다. 또 누군가가 펑버에게 물었다. “당신께서 이렇게 연세가 있는데 혼자서 밤에 황야에 무섭지 않았나요?” 펑버가 말했다. “무섭기도 하고 무섭지 않기도 하죠,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비현실이죠.” 펑버는 그가 전반 노정에서 “편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늘 깊은 밤 추위에서 놀라서 깼고 악몽에서 놀라서 깼고 깨어나면 그렇게 끝없는 어둠과 고독에 도움을 바랄 수도 없고 방법도 없고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놀라서 불안하고 심지어 등골이 오싹했다. 이 노정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겠는가?

펑버가 또 말했다. “근데 나는 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두려우면 감히 집을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사부님이 계시고 사부님께서 저를 상관하기에 나는 진수제자이며,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모두 제 곁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야숙 고달픔의 심리적 압력을 감소하기 위해 펑버는 또 전에 그의 생활방식을 개변한 적이 있는데 북방의 경내에 진입한 후 그는 비록 2월이지만 날이 맑으면 낮에 기온이 높은데 북방은 항상 맑은 날이었다. 하여 그는 낮에 점심 이후에 길옆에서 자리를 찾아서 잠을 잤다…… 야간에 길을 걸었다.

길에서 만난 기이한 인연과 베이징에 도착할 때의 마음

라오펑버의 이상의 경험은 지금까지 이미 20년이 지났다! 지나간 일은 꿈만 같고 펑버 또한 이미 연세가 많은 노인이다! 많은 일을 회억하지 못했지만, 이 속에서 인상이 아주 깊어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은 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길에서 기이한 인연들을 만났고 다른 하나는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의 그 특별한 감수이다.

– 기이한 인연 몇 가지를 열거

첫 번째 예: 남들의 주목을 피하려고 이렇게 먼 길을 떠나면서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고 또 구매할 돈도 없었다. 길을 떠난 후 펑버는 돌발적인 생각을 했다. 만약 길에서 비옷이나 우산을 주우면 좋겠다. 그는 길에서 조금 신경을 썼다. 과연 본 성 지역을 지나서 터널 공지에서 낡은 비닐 천을 주었고 또 길옆 쓰레기더미에서 낡은 비옷을 주었다. 깨끗이 씻은 후 입고서 비바람 속에서 앞으로 걸어가면서 추위도 막았다. 야간에는 비닐 천을 바닥에 깔고 비옷으로 몸을 덮었고 폭풍 폭우도 모두 안전하게 막아냈다. 이는 진짜로 마음으로 생각하니 일이 성사된다였는데 아주 기뻤다.

두 번째 예: 보행하는 도중에 음식물을 줍고 구걸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펑버는 ‘끼니’를 거른 적이 없었고 배가 고픈 적도 없었는데 이는 기적이 아닌가? 펑버는 그의 음식물 주머니는 한 번도 빈 적이 없었고 늘 풍족한 음식물이 속에 담겨 있었다고 했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가끔 온종일 주운 음식물이 모두 똑같은 음식물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 주운 것은 전부 왕만두였다. 내일은 아침부터 찐빵을 주우면 온종일 모두 찐빵을 주었다. 다음날에는 모두 육류였다…… 진짜로 너무나 일치했다! 하늘 아래 어디 이런 일이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일은 전후로 8~9회 넘게 발생했다.

그는 한번은 길에서 앉아서 휴식할 때 음식물 주머니에서 남은 음식물을 분류하여 길옆에 내놓고 바람을 쐬었고 상한 것이 없는지를 검사했다. 품목을 보니 7~8가지였다. 육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계란, 생선, 물만두, 왕만두 등. 그렇게 풍부한 것이 마치 파티를 하는 것 같았고 그 자신도 신났다!

세 번째 예: 후난에서 어느 날 점심이 지났고 아직 밥을 구걸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밥을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 마침 앞의 철로 밖의 평평한 지면에 세 무더기 국수가 놓여 있었다. 다가가 보니 익혀서 냉각시킨 후 기름으로 비빈 국수(남방에서는 냉면이라고 부름)였고 노랗고 반짝거렸고 유성이 또 커서 바싹하게 말랐고 아주 신선했으며 아주 깨끗했다. 이렇게 좋은 국수를 이렇게 많이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주위를 보니 멀리 가까이에 모두 사람이 없었다. 그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세 무더기 국수의 윗부분을 전부 담아갔다. 이 국수는 아주 맛있었고 연속 3일 동안 먹어도 많이 남았다. 상하면 아까우니 길에서 만난 농촌여인에게 주었다. 그 여인은 국수를 보더니 매우 놀라서 물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어디서 이렇게 좋은 음식을 얻었어요?” 그녀한테 철길 옆에서 주운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나는 왜 한 번도 줍지 못했죠?”라고 했다.

네 번째 예: 펑버가 말했다. “후베이 경내에서 음력 2월의 어느 날 오후 길옆 한 농가에서 결혼식을 했어요. 집 안팎으로 20여 개의 연회상을 차렸고 아주 경사스러웠어요! 나는 다가가서 먹을 것을 조금 얻어서 가려고 했는데 이 집 주인은 아주 호방하여 나를 연회석에 청하여 같이 식사하게 했어요. 하여 나는 무척 감동했어요!”

다섯 번째 예: 어느 날 한 농가에서 구걸하는데 이 집은 아주 빈곤했고 형제 두 명만 있었다. 형은 밖에서 일하고 동생은 마당에서 광주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침 점심때라 동생은 나의 말을 듣더니 바로 일손을 내려놓고 방에 들어가서 준비된 점심을 가져왔다. 큰 찐빵 한 개에 따끈한 야채수프였고 계란프라이가 한 개 있었다. 나보고 앉아서 식사하라고 했는데 내가 한창 먹고 있는데 밖에서 일하던 형이 돌아왔다. 남동생은 바로 방안에서 똑같은 점심을 내와서 형한테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일을 했다. 형은 그에게 식사했는가 하고 물었고 남동생은 형을 한번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식사를 끝내고 그들한테 작별인사를 고할 때까지 그의 남동생이 식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알게 되었는데 남동생의 그 식사 분량을 내가 먹은 것이었고 그는 배고픔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너무나 부끄럽다.

여섯 번째 예: 행각하는 중에 펑버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허난의 한 철난간을 세운 마당이 있었고 오전 시간이라 철난간이 열려 있었다. 마당에는 젊은 부녀가 있었고 옆에는 7, 8세 되는 어린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길을 가는 사람인데 미안한데요. 나에게 먹을 것 조금 주세요!” 그녀가 연속 말했다. “없어요! 없어요!” 말하면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때 그 어린 여자애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외쳤다. “엄마! 엄마! 그에게 조금 주세요! 그에게 조금 주세요!” 외치면서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엄마의 마음이 약해지며 말했다. “기다려요.” 어린 여자애를 끌고 방에 들어갔고 어린 여자애는 두 손으로 국 한 그릇을 가져왔고 조심스럽게 떨면서 나에게 건넸다. 흰 목이버섯국이었고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고 그릇도 약간 뜨거웠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고 두 눈이 모호해졌다! 이는 내가 구걸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저도 모르게 흘린 뜨거운 눈물이다.

이런 기이한 일들은 우연한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고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두 번이 아니라 시리즈로 발생했고 모두 그렇게 기이하고 특이했으며 그렇게 초상적이었다! 해석할 방법이 없다.

펑버는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배치이고 질서 있는 배치입니다! 사부님께서 제자에 대한 정성 어린 보호였습니다!”

–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의 몇 차례 독특했던 마음의 감수

1999년 ‘7.20’이후의 베이징은 ‘곳곳마다 피비린 구름이고 온 거리마다 늑대들이었다’. 음침하고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라오펑버가 세차례 베이징에 들어갔는데 매번 그의 두 발이 베이징 이 땅을 밟을 때 내심은 무척 평온하고 순정하고 차분하게 변했다. 그의 말로 말하면 “그 마음이 마치 맑은 물과도 같았습니다.”였다. 사악을 마주하고 펑버는 두려움도 없었고 조급하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나는 대법제자이고 나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일념뿐이고 기타의 일체 일체는 모두 마음에 두지 않았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고 완전히 생사를 내려놓았다! 전혀 있어 본 적 없는 완전히 자신을 잊은 초탈한 사상 경지였다. 몸을 떠난 적 없는 운전면허증, 신분증은 그가 처음 베이징에 갔을 때 베이징에 던져버렸다. 다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았다.

결속어

라오펑버가 그 해 ‘돈 한 푼 없이 베이징에 걸어간’ 여정은 58일이 걸렸고 끝내 소원대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 58일 동안 식당에서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이 58일 동안 여관에서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이 58일 동안 차 한번 타본 적이 없었다.

이 58일 밤낮 그는 모두 ‘길’에 있었고 이 58일 동안 밤낮 그는 혼자였고 갖은 천신만고를 겪고 얼마나 많은 마난을 이겨냈고 일 분 일 초를 일 년과 같이 간고하게 보냈다.

A지역에서 베이징에 온 전 여정은 5천 여리 길이고(길을 에돌아간 것은 또 포함하지 않음) 하루 평균 90리 길을 걸었는데 이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것이다. A지역 자신의 집 문 앞에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까지 걸어갔다.

이는 얼마나 큰 용기와 끈기가 필요한가. 이는 얼마나 단호한 의지와 단호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가.

라오펑버는 이 일체를 대법의 위력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침 내가 대법제자였기에 비로소 그렇게 대담하고 모험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겁니다. 마침 내가 대법제자였기에 비로소 그렇게 많은 기이한 인연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내가 대법제자였기에 비로소 마난 속에서 한번 또 한 번 위기에서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대법에 감사합니다!

조우와 결말

라오펑버가 보행으로 베이징에 들어간 후의 조우는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갔을 때의 조우와 똑같았다. 그가 또 한 번 톈안먼광장에 갔을 때 그는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아주 빨리 진정하고 즉시 가부좌하고 연공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얼마 안 가서 일부 관객들이 몰려왔고 라오펑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 무리 경찰들이 덮치더니 그를 끌고 갔으며 즉시 본 성으로 송환했다.

비록 이렇지만 라오펑버가 보행으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사적은 깊은 감동을 준다.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지 모든 관련 기관과 부서를 두려워 떨게 했다. 그들은 라오펑버에 대해 보복성적인 잔혹한 박해를 가했다. 하여 펑버는 먼저 불법적으로 3년간 노동교양이란 고역과 혹형을 받았다. 이어서 또 4년간 지옥 같은 감옥 철창생활을 했다. 마주한 것은 진짜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1]였다. 펑버는 100% 신사신법의 단호한 신념으로 일체 마난을 모두 이겨냈고 2008년 11월 4일 끝내 집으로 돌아왔다.

이 20년간 사당의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는 계속 지속되고 있다. 펑버의 “앞으로 나서서 진실을 말하자”의 정의로운 행동도 계속 견지되고 있다! 지금까지 펑버는 아주 건강하고 뚝심도 그대로이고 더욱 용맹정진하고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홍음-마음고생’

 

원문발표: 2019년 3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7/3843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