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가정 난관에서 벗어나 가정을 수련환경으로 간주하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이가 좀 많은 수련생들이 가장 넘기 어려운 한 가지 고비가 바로 가정 난이다. 어떤 자녀들은 수련하지 않는데 부모에게 얹혀살면서 노년 수련생에게 아이를 돌보게 하고, 또 노년 수련생에게 돈을 달라고 하며 그들을 도와달라고 한다. 수련생은 온종일 늦게까지 아이를 돌보면서 바쁘게 보내야 하고 또 자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갈수록 법공부는 점점 줄어들고 어떤 이는 몸 상태에 문제가 생기는데, 갈수록 심각해져도 어찌할 수가 없어 한다. 사실 혈육의 정에 미혹된 것으로 구세력에게 조종을 당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가정을 잘 꾸리고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집착하면 법에 있지 않은 것이다. 자식의 운명은 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지 부모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풍부한 물질적 삶을 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운명 중에 없기 때문으로, 부모가 기어코 그들에게 물질적 재산을 더 많이 주려 하는 것, 즉 자식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심전력으로 가정을 잘 안착해 놓으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라야 한다. 물론 자식을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떤 자녀들은 결혼했고 자식이 있는데도 부모에게 의지하는가 하면,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자신의 책임은 모르고 손을 내밀어 달라고만 한다. 부모가 주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데 부모가 주지 못하면 원망한다. 이것이 바로 심각하게 남에게 의존하는 독립성이 부족한 사람의 마음이다.

어떤 부모는 어릴 적부터 보모 노릇을 하는데 습관이 되어 자식을 대신해 모든 것을 다 하는데, 즉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해 아이의 독립성을 키우는 것을 홀시했기에 어른이 된 후에도 자녀는 일을 할 줄 모르고 부모에게 의지하는데 익숙해져 무엇이든 부모에게 요구하고, 부모가 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주지 못하면 부모를 미워한다. 부모의 지나친 사랑이 자식을 원수로 키운 것이다. 자식의 능력이 약하면 부모로서의 마음 때문에 차마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해 보모 노릇을 하는데, 시간을 여기에 낭비하여 자기 몸도 망가지고 수련도 지체됐다.

민간에 “위급한 것은 구제할 수 있지만 가난은 구제할 수가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의 도리가 있다. 무엇이 가난한 사람인가? 돈이 있고 없는 문제가 아니라 의존심이 너무 강해 무슨 일이든 남에게 손을 내밀기만 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누가 가서 그를 도와주면 그는 누구에게 달라붙는데 그를 도와주려면 그의 보모가 되어야 한다. 가장 간단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비록 거액의 재산이 있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이다.

속인에게 의존심을 보았다면 당연히 자신도 찾아봐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의존심이 매우 크다. 의존하는 습관이 몸에 뱄고 자신 역시 지나친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다 보니 심각한 의존심이 길러졌으며, 자기도 모르게 이 습관을 다음 세대로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을 해치고 자기도 해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생활상에 의존심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의존심을 수련에도 쓰는데, 사부님께 의지하며 자신에게 혜택을 주길 바란다. “저는 매일 법공부, 연공을 하고 진상을 알립니다. 사부님 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저는 또 날마다 아주 경건하게 사부님을 존경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저를 원만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혹은 사부님께 어떤 일들을 해결해달라고 청을 든다. 결국 구세력에게 약점을 잡히고 박해를 받게 된다. 병업 상태가 나타났고 오랫동안 이렇게 집착을 찾지 않았기에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진다. 그리하여 사부님께서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시작하고 법에 대해서도 믿지 않게 된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 이 방면의 예를 드신 적이 있다. 그 부처를 믿는 거사는 향을 피우고 부처에게 절을 하면 그녀에게 혜택을 줄 거라 생각했고, 그녀에게 삶의 어려움과 갈등을 해결해주고 생활을 행복하고 평온하게 해줄 줄로 여겼다. 나중에 어려움이 생기자 그녀는 보살에게 간청하고 부처에게 빌면서 해결해주기를 바랐는데, 보살과 부처가 상관하지 않자 그녀는 부처를 원망하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수련한 것은 불교였고 아무도 그녀에게 법리를 명백하게 가르쳐주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었기에 전부 그녀를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대법이고 사부님께서는 모두 명백히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자신과 대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가정의 난을 어떻게 대하고, 가족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마땅히 법을 지도로 삼아야지 속인의 인정과 도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살아 있는 게 바로 자식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모든 생활이 자식 걱정뿐이다. 자식이 잘 지내지 못하고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면 자신도 못 먹고 잠도 못 잔다. 이럴 때는 자신의 정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처음에 이런 집착이 나타난 것은 정상적이지만, 안으로 집착을 찾지 않고 장기간 정에 교란을 받고, 장기간 고난 중에 있다면 마가 틈을 탄 것이다.

어떤 자녀는 사당(邪黨)이 무서워 수련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일부러 부모에게 일들을 찾아 시킴으로 법공부와 세인을 구도할 시간이 없게 만든다. 어떤 수련생은 좋은 사람 역할만 하는데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자식들이 맡긴 일은 열심히 다 한다. 또 어떤 이는 속인 자녀들이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오로지 부처로만 되려 한다”는 누명을 씌울까 봐 두려워한다. 자신이 대법에 먹칠할까 봐 거역하지 않고 무조건 양보하고 순종만 한다. 다음은 또 집안일을 밖으로 말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가정박해를 폭로하지도 않았기에 인위적으로 사악의 요소를 키웠다.

이런 난에 부닥치는 것은 모두 자신이 법의 기점에서 자녀와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며 모두 속인의 생각과 관념으로 자녀와의 관계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속인이 이런 관계를 처리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사실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가정과 자식을 수련에서 정을 버리고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최고의 환경으로 간주해야 한다. 자식은 바로 가장 좋은 거울인데 자녀들의 일부 행동은 모두 자신의 그림자다. 자신의 많은 집착과 나쁜 마음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식들이 좋거나 나쁜 것은 모두 수련에 쓸모 있는 것이다. 자녀가 좋으면 당신은 기쁜데 왜 기쁜가? 당신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인간세상의 천륜지락(天倫之樂: 가정의 단란함)을 누리게 되어 기쁜 것인가? 당신은 여전히 이 삼계를 떠나려 하는가? 이것은 시험이 아닌가?

자식이 당신에게 나쁘게 대하면 당신은 억울하다고 느끼는가? 원망하는가? 사실 바로 당신을 도와 정을 버리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당신에게 깨달으라고, 정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정은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하물며 자녀마저 이런데 아직도 정에 집착해 뭘 하겠는가? 당신에게 빨리 정을 없애고 자신을 잘 수련하라고 독촉하는 것이다. 어찌 육친정을 얻으면 더없이 즐겁기 그지없고, 얻지 못하면 삶이 암담하고 세계종말이 온 것만 같다고 느끼며 기어이 정처 없이 떠다니는 짧고 애처로운 육친정의 행복감을 추구한단 말인가?

자식이 좋든 나쁘든 간에 자녀가 자신에게 정을 버리고 집착심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데, 자신의 수련을 도와주는 것이다. 정을 닦아 없애면 자기를 성취하고 자녀도 득을 본다. 정에 빠지면 자기를 망칠 뿐 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자녀도 해치게 된다.

 

원문발표: 2019년 3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18/3840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