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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안으로 찾아 실질적으로 정체를 형성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우리 지역 협조인 수련생 A에게 심한 병업 박해가 나타나 정신이 명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에게 이끌려 입원했다. 우리 지역의 많은 수련생이 A를 돕는 데 참여했다. 그 과정에 나타난 일부 현상과 문제에 대해 일부 수련생이 교류를 진행했으며 그것을 정리해 글로 적어 함께 제고하려 한다. 병업 중에 있는 수련생을 도와 그들이 하루빨리 마난에서 걸어 나오기 바란다.

1. 안으로 찾아 진정으로 정체를 형성하다

다년간 A는 우리 지역의 주요 협조인 역할을 했다. 이번에 심한 병업 박해는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가 하면 매우 큰 정도에서 정체(整體)의 원인도 있다. A는 표면적으로 병업 현상이 너무 심해서 정신이 났다가도 때로는 혼수상태가 되어, 수련생들이 잇달아 찾아와 그가 안으로 찾도록 도왔다. 수련생들은 부동한 수련 층차의 인식이 있었으며 또 각종 사람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A는 저촉하는 심리가 생겨 주변 수련생들이 많이 노력했는데도 뚜렷한 효과가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수련생들은 점차 A에게만 노력하고 그를 개변하려 해서는 안 됨을 인식했다. 참여한 모든 수련생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했으며 이 문제에서 정체적인 인식 제고를 해야 했고 진정으로 A와 하나의 정체를 형성해 강대한 정념을 발해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A와 함께 난에서 뛰쳐나와야 했다.

오랫동안 현지의 많은 수련생은 A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강해 수련 중에서 의지할 언덕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속인의 사람 간의 정으로 그를 지켜주려 했다. 일마다 그를 찾아 온종일 매우 바삐 보내니 거의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할 수 없었다. 또 일부 수련생은 그가 이렇게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여겼으며 모든 일을 그가 짊어져야 했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매우 큰 간격이 형성됐다. 또 일부 수련생은 그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소통을 시도했으나 뚜렷한 효과가 없어 일종 막연한 심태에 처해 있었다.

A에게 마난이 나타난 후 주변 수련생에게서 법에 있지 않은 많은 인식과 생각이 나타났다. 각종 사람 마음, 각종 생각은 수련생들이 A의 일에 대해 사람 마음을 움직였음을 설명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문제라면 과거에 내가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고 아주 많은 수련생은 사실 모두 알고 있다. 수련생에게 엄중한 병업(病業)이 나타나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이다. 하나는 그에게 이 상태가 나타나게 하여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를 본다.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고, 당신이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보는데 바로 이 문제가 아닌가?”[1], “또 한 가지 목적이 있는데 바로 그 본인이다. 병업이 나타난 본인의 수련은 어떠한가? 그가 이런 상태에서 그렇게 강한 정념으로 걸어 지나올 수 있는가? 정말로 자신을 신(神)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1]

A에게 심한 병업이 나타났을 때 많은 수련생이 우선 A의 문제라고 생각해 A에게 찾아와 교류해 그가 안으로 찾는 것을 도와주려 했다. 그를 도와 안으로 찾도록 하는 것만 알았지 그 실질은 그들 자신이 안으로 찾아야 하는 줄을 몰랐다. 사람마다 밖으로 찾는 격이 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정체적으로 안으로 찾는 수련 환경을 형성할 것을 바라셨다. 사람마다 안으로 찾기를 해낼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진정한 정체를 형성할 수 있다.

수련인의 정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속인이 함께 모여 서로 돕고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것이 정체가 아니다. 수련인의 정체는 수련생들이 법에서 공동으로 승화하여 형성한 정체이며, 개개인을 초월하여 하나로 용해하여 형성된 통일체이다. 어떻게 이 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법보는 안으로 찾는 것이며 문제에 봉착해 모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타인에게 눈길을 돌리고 타인의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정체의 일원으로 수련생에게 문제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찾아야 할까? “모든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수련인으로서 문제에 봉착해 언제나 안으로 찾아야 했으며 저는 확실히 제게 많은 집착심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쟁투심……, 정말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거의 모든 수련생이 교류할 때 첫마디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모두 타인의 문제였다. 안으로 찾아야 함을 틀에 맞춘 말로 여겼고 안으로 찾는 것이 형식이었으며 이 말을 하고 나서는 밖으로 찾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된 듯했다. 또 안으로 찾았다고 하나 대충 찾았으며 두루뭉술하게 몇 가지 집착심을 찾고, 말하고는 그만이었다.

진정한 안으로 찾기는 겨냥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A에게 의지했던 그런 수련생은 자신이 어찌하여 협조인 수련생에게 의지했는지를 찾아야 한다. 혹시 자신의 마음에 법이 없어 일에 봉착하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상에 타성(惰性)과 안일한 마음이 있어 스스로 사고하기 싫어 협조인을 따라 일을 덜려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두렵고 담당하기 싫고 붙잡히는 것이 싫어 협조인을 따라 그 흐름을 타며, 나중에 문제가 나타나면 ‘키 큰 사람’이 받쳐낼 것이라는 생각이 아닌지를 찾아야 한다. 각종 심태의 배후에는 모두 각자의 집착이 그 속에 은폐돼있는데, 그것을 벗겨내지 않고 그것을 폭로하지 않는다면 또 어찌 그것을 닦아버릴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해내어야 수련이로다”[2]라고 말씀하셨다. 안으로 찾기는 착실한 수련의 시작이지 결속이 아니다. 문제를 찾은 후에는 금후의 착실한 수련 중에서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견뎌내며 집착을 버리는 과정에서 그것을 닦아내야 한다. A는 이번의 마난을 겪기 전 기타 일부 마난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 안으로 찾은 적이 있었으며 또 일에만 매달려 바쁘게 보내서는 안 되며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하고 착실히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주변의 수련생들도 늘 협조인에게 의지하려 하지 말며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마난이 지난 후 습관적으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수련인은 문제가 나타났을 때 반영되는 첫 일념이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어야 하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는 동시에 선의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한 수련생이 이것을 해내면 그 수련생의 수련상태는 질적인 변화가 발생해 비약할 수 있다. 한 무리 수련생이 해내면 곧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는 정체를 형성할 수 있어 일체 사악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박해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2. 대도무형(大道無形)의 정체형식

A는 협조인이다. 다년간 우리 지역의 정체 조율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협조인 수련생이 당한 박해 정황도 매우 심하다. 여러 가지 문제에 마주하여 우리는 정말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박해 초기 단계에 가혹한 박해 형세를 마주하여 많은 수련생은 막연한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정황에서 일부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걸어 나와 수련생들을 이끌어 반박해, 진상 알리기, 중생 구하기를 해 매우 중요한 작용을 발휘했다. 수련생의 정체와 협조인 개인이 수련에서 성숙하지 못해 과정에 많은 문제가 나타났고 협조인 수련생이 박해당하는 정황이 매우 심했다. 하지만 그 협조인들이 박해당하면 바로 새로운 협조인들이 걸어 나오는 식으로 오늘까지 연속해 왔다.

오늘 이 일보에 이르러 정법 형세에 매우 큰 변화가 발생했다. 박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악의 힘은 매우 약해졌고 수련생들이 보편적으로 성숙해졌다. 대법제자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하며 문제가 있을 때 더는 협조인을 찾고 습관적으로 협조인의 배치에 따라 일을 하며, 협조인이 없으면 수련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협조인은 더욱 성숙하고 이지적이어야 하며 법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지며, 자신의 수련에 책임지는 심태로 이 일체를 대해야 한다. 과거 그 시기에 대법의 필요로 걸어 나와 협조해야 했다면 걸어 나오는 것이 지당하다. 오늘 만약 법에서 이 협조인 역할을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협조인은 아무런 주저 없이 포기해야 한다. 협조를 위한 협조 일을 하지 말며, 정체를 위한다는 명의로 협조라는 형식을 이용해 수련의 실질에 영향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 시의 일부 지역 협조인은 이를 매우 잘 파악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현지 수련생과 함께 대도무형의 수련의 길을 걷고 있다. 수련생과 함께하면서 협조인이라는 개념을 담담하게 했다. 각 법공부 팀 수련생들이 스스로 팀을 이루어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손을 놓았다. 일이 나타났을 때 누가 조율할 수 있으면 누가 조율의 일을 했고 누구의 협조가 필요하면 그가 협조해 나섰다. 사람마다 협조인이었다. 수련생이 경험이 부족해 도움이 필요하면 그들은 묵묵히 도움을 제공했으며 묵묵히 보충하고 묵묵히 원용했다. 정말 그들이 나서서 조율할 필요가 있으면 그들이 나섰고 기타 수련생이 조율할 때와 마찬가지로 구별이 없었다.

우리 시의 일부 협조인은 자신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없으며 혹은 감당하려고 나설 사람이 없다고 강조한다. 사실 이는 이 지역의 협조인이 수련생과 함께 대도무형의 수련의 길을 걸어 나가지 못해 현재의 이런 국면이 나타났음을 설명한다. 더 조율하지 않으면 길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 글에서 억지로 한 지역에 협조인이 있어야 하는 문제를 강조하는 게 아니며 각 지역의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 정해야 하며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지역의 협조인과 수련생은 법을 위해 책임지는 기점에 서서 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개인의 모든 관념과 집착을 내려놓고 일체는 대법에 필요한지에 따라 정하고, 수련의 실질에 따라 정하며, 형식이 수련의 장애로 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다. “여러분이 단체로 일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단독으로 일을 하든지 여러분이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일이며 이것이 바로 정체이다. 모두 진상을 알리고 발정념을 하며 법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하는 일이 같지 않으나 질서 있게 분담한다면, 모이면 형태를 이루고 흩어지면 입자로 된다.”[3]

3. 근본에서 전반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다

A가 병업의 박해가 이미 몇 달 지속했고 그사이 방문하고 교류하러 온 수련생도 끊임없었다. 많은 수련생이 대량의 시간과 정력을 투입했다. A에게 단체 발정념하도록 수련생들에게 통지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일부 수련생은 단체 발정념에 대해 좀 열의가 식었다는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수련생이 붙잡히고, 심한 병업 박해가 나타나거나, 난법의 일이 나타나며, 사악이 또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등 현상이 있을 때마다 늘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을 하라고 통지했으며 몇 년간 이렇게 지나왔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력의 존재 자체마저 인정하지 말라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구세력의 배치 속에서 대응하는 데 피로해져 구세력의 존재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력에 이끌려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고 있다. 이러니 어찌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수련생이 박해당하면 우리는 상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이 일체를 어떻게 평형 시킬 것이며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중 하나의 원인은 우리가 박해를 중히 여기고 박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박해를 부정하는 것은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법에 대한 구세력의 배치와 교란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법리에 명백하고 경지에 도달하면 우리는 쉽게 그것에 이끌려가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문제를 보는 것에 과분하게 빠지지 않아 수련인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지혜를 갖추게 된다.

20년의 박해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음영을 드리우게 했고, 많은 수련생은 구세력이라는 가위에 눌렸으나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며 우리에게는 자비롭고 위대한 무소불능의 사부님이 계신다. 20년의 정법 수련을 지나왔고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를 제자리로 밀어주셨다. 우리는 어찌하여 대법 수련에서 자신감을 닦아내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감히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뎌 진정으로 신(神)과 같이 되지 못하는가? 보잘것없는 구세력에 마주하여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가.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물론 수련은 엄숙하며 확고한 정념은 평소의 착실하고 착실한 수련에서 온다. 일사일념, 일언일행, 매번 정념의 선택은 모두 신의 길로 내딛는 확고한 걸음이다. 어떨 때 우리는 자신감이 없어 하는데 이는 사람의 관념이 너무 많아 지혜와 능력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4] 우리는 오직 법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자신을 제고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며, 일체에 모두 사부님의 배치가 있는 것으로 인간 세상에서의 표상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마치 ‘우공이 산을 옮기다’에서의 우공처럼 마음의 경지가 도달하면 신이 산을 옮겨주나, 지수(智叟)는 사람의 사유로 문제를 고려해 산은 옮겨갈 수 없는 것이라고 당연시했다. 만약 지수에게 산을 옮기는 책임을 맡겼다면 그 산을 영원히 옮겨가지 못했을 것이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洪吟(홍음)-착실한 수련’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3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6/3843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