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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 일의 관계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쓰촨(四川)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저는 업무상 위챗을 빈번히 써야 했습니다. 이는 밍후이왕에서 교류한, 대법제자가 위챗을 쓰지 않는다는 것에 어긋났기에 저는 다른 직장을 찾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일과 수련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이전에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곤경에 빠졌던 원인을 다시금 되짚어 생각해 보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그 업무에서 겪은 상황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에 있었는데 갓 일을 시작했을 때 노력을 많이 했고 업무평가 성적도 비교적 우수했으며, 부서 책임자들도 저를 중시했습니다. 근무한 지 반년 후 같은 분야에서 일하던 제 가족이 제 근무처 원장(업계 실세)과 업무상에서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후 저는 업무평가 순위가 계속 떨어졌고, 심지어 수업에 문제가 있다는 학생 민원이 접수됐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제 업무 문제를 비평하는 일까지 나타났습니다. 그 후 바로 저를 정직시키고 수업 정지 처분을 하려 했습니다.

저는 당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고 절망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을 보니까 문화대혁명이 양산한 비판 투쟁과 하나도 다를 게 없네” 나중에 가족들은 어쨌건 학교에 가서 자초지종을 분명히 알아보자며, 설령 업무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대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결과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족이 원장을 만나자, 그는 학생이 민원을 제기한 일을 자신은 모르며, 수업 정지 및 정직시킨다는 말은 한 적도 없다는 것을 보장한다고 성명했습니다. 천지를 뒤덮을 것 같던 한 차례 압력은 이렇게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그 밑의 책임자는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저를 교직에서 행정직으로 전근시켰습니다.

새로운 직무에서, 저는 가능한 한 업무상에서 수련인의 심성 요구에 따라 타인과 잘 어울리며 처신하라고 스스로 요구했습니다. 성실하고 착실히 일하니 효율이 높았고, 업무평가 때 부문별 성적이 전 부서 동급 직원 중의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이 부서를 담당하는 부원장급 관리자가 저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을’을 치켜세우기 위해 업무평가 때마다 고의로 저의 순위를 하향 조정했습니다.

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저는 이 부문 및 유관 타 부문 중간관리자와 평사원 사이에 업무효율이 높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게다가 제가 평소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자, 이 관리자는 제 평가순위를 억지로 낮추면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뢰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제 업무와 내용상에서 난도를 가중했습니다. 그들은 부서 내에서 문제와 갈등이 끊이지 않아 보이는 교육 업무를 제가 관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회를 틈타 ‘을’이 책임져야 할 부분의 교육 업무를 전부 제게 떠맡기며, 총괄 관리해야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저 혼자 두 사람의 일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인계받은 후 상기 업무를 꽤 효과적으로 잘했기 때문에 이전에 했던 행정업무와 마찬가지로 유관 부문 책임자들과 동료들에게 호평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 그 일을 잘 하기 위해 저는 업무시간 외의 시간을 대량으로 소모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겉보기에는 마치 속인 간에 있는 이익 다툼 같고, 제가 무고하게 화를 입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기간 이런 처지에 놓이면서 저는 그래도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연공(煉功) 중에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이 나타나면, 당신이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당신 자신이 원인을 찾아야 한다.”[1]

도대체 제게 무슨 문제가 있던 것일까요? 당시 저는 깨닫지 못했고, 다만 인심이 너무 험악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이유로 이 일을 그만두었지만, 저는 여전히 회상하면서, 원인을 깨달을 수 있길 바랐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대법제자가 대법에 대해 확고한지 아닌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또 ‘나는 신사신법하고 있지 않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일을 하면서 명리심이나 질투심, 쟁투심을 제거하지 않아 조성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근본 원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전의 그 일을 회상해보니, 지금은 두 가지 일이 아주 특별하게 생각됐습니다. 아마 사부님께서 점화해주신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당시에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한 가지는, 당시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 문화대혁명의 산물 같다고 한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공산 사령(邪靈)이 박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요소가 배후에 없다면, 학교에서 한 교직원에게 어떻게 갑자기 문화대혁명의 일련의 것들을 만들어내어 가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한 가지는 전반 과정에서, 가족으로부터 정직 및 수업 정지와 관련하여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런 관련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심지어 책임을 회피한 것입니다. 그다음은 곧 천지를 뒤덮을 듯한 태세였고, 단번에 기세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저를 점화해주시는 것으로, 이는 정말 업무 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외래적인 요소가 없다면 사람이 감히 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사회의 표현은 다만 고층생명의 조종으로 조성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정념이 강하고, 잘한 그러한 대법제자와 비교할 때, 당신의 대법에 대한 근본적 인식은 정말로 사람 이 층에 머물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수련하는 것인가?”[2] 왜 사악이 감히 함부로 박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분명 저의 수련에 큰 누락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번에 되짚어 보면서, 저는 수련과 질병의 관계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수련하면서 만약 그가 늘 ‘내 병은 나았는가, 언제 나을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병이 나으면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홍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법 공부를 하고 연공했으며, 홍법과 진상을 알리는 일을 했으니, 내 병도 마땅히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든지를 막론하고, 이것은 모두 사부님과 대법에 조건을 논하는 것이며, 진정한 수련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저는 똑같이 위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 단지 병이라는 이 집착을 업무에 대한 집착으로 바꿔봐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수련이 아니지 않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수련과 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분석한 후, 저는 당시 저의 최대 집착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수련이 제게 안정적인 좋은 일을 갖다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직장 구하기도 어렵고 나는 수련하고 있는데, 사부님과 대법이 내게 좋은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갓 일을 시작하자, 이 집착은 업무평가에서 좋은 순위를 얻어 세인들에게 대법제자가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를 희망하는 표면 밑에 가려졌습니다. 업무가 바뀐 후에는, 수련인으로서 일에 부딪혀 심성을 닦을 때 이 기회를 빌려 동료와 책임자들의 인정을 받아, 업무평가 때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생각이 섞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일과 수련의 관계에서 저는 현재 제 개인적인 얕은 인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일에 부딪히면 진정하게 수련해야 합니다. 업무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며, 구체적으로 직면했을 때, 수많은 외부 환경의 교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단순하게 법에서 깨닫고 고려하며, 대법제자로서 이 일에서 대법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고, 속인의 평가가 어떨지를 생각지 않는다면, 쉽게 빗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법이야말로 가장 바르며, 만약 정말 행한 바가 법의 표준에 부합한다면, 결과는 자연히 나쁠 리 없다고 믿으면 예상 밖의 수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이 과정에서 고려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속인의 평가라면, 아마 첫 시작부터 함정에 빠질 수 있고, 심지어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만약, 인위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설정했기 때문이라면, 우선 이 목표 설정은 자신이 머문 층차에서의 인식입니다. 원래 수련인이 부딪히는 어떠한 일도 모두 심성 제고를 위해 설치된 것입니다. 자신의 심성은 모두 이번 차례의 난관을 넘는 과정에서 제고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의 결과는 관을 잘 넘는가 못 넘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먼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자신을 틀에 가두게 되지 않을까요?! 이 때문에 소위 목표 달성을 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집착이 생겨나거나 아예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어, 한이 맺히고 실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한 걸음씩 더욱 깊은 집착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면, 사악에게 약점을 잡혀 박해를 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한 점은 바로 신사신법입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당신은 단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실제 마음속으로는 결코 믿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진정으로 믿는다면 당신의 언행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3] 저는 신사신법은 반드시 진정한 수련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오로지 법의 요구에 따라 했을 때 자신이 진정하게 신사신법했다고 말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업무에서의 체현은 바로 한 수련인으로서, 일체는 모두 사존께서 안배해주신 것이므로, 일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업무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수련의 길 위에 놓인 관입니다. 업무 과정에서 순조로운 것과 순조롭지 못한 것, 잘 한 것과 잘 하지 못한 것은 모두 이 과정에서 수련의 체현입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을 배우는 것이 곧 복이다.”[4]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에서는 우선 사존께서 요구하신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만 대법제자로서 이 복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며, 층차의 한계가 있으므로, 수련생 여러분들께서 자비로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정법 중에서 정념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갖지 말라’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유럽법회 설법’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03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19/3840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