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전법륜(轉法輪)’을 공부한 체험

글/ 해외 대법제자 샤오저우(小舟)

[밍후이왕] ‘전법륜’ 책 표면의 글은 거의 모두 백화문(白話文-구어체 문장)으로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다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보다 높은 배후의 법리를 보려면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법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나의 체험은 우선 공경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내야 하며 그리고 자신을 비우고 놓아버림을 시도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욕심으로 많이 읽으려도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며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 아래에 적은 내용은 단지 현 단계에서 작고 옅은 이해와 체득이며, 더 많고 깊은 내포는 아직 더 깨우쳐 나가야 한다.

1. 과학관념을 타파하여 법의 내포를 깨우치다

많은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나의 머릿속에도 과학관념의 비중이 매우 크다. 많은 경우 자신도 모르게 과학으로 사고하고 가늠했지 법으로 과학을 가늠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하나의 과학 ‘궤도’가 있어 조금만 경계를 늦추면 그 ‘궤도’에 따라 사유해서 그것을 타파하기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제1강에 사부님의 이런 말씀이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병 하나에 더러운 것을 가득 채워 넣고 그것의 마개를 꽉 틀어막아 물에 던지면 그것은 역시 물밑까지 가라앉는다. 당신이 그 속의 더러운 것을 쏟아버리되 많이 쏟아버리면 버릴수록 그것은 더욱 높이 떠오를 것이며, 완전히 쏟아버리면 그것은 곧 완전히 떠오른다.”[1] 이 말씀과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은 다르며 물리학에서 물체는 물에서 ‘둥둥 뜨는 상태’, ‘부유 상태’, ‘물밑에 가라앉는’ 등 3가지 상태가 있다. 특히 물체의 밀도가 물의 밀도와 같으면 그것은 물속에서 자유로운 위치에서 떠돌아다닌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나를 곤혹스럽게 했고, 나중에야 깨우칠 수 있었다. 첫째,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물리학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설법하셨다. 둘째, 인간 세상의 물은 모두 같은 것으로 하나의 밀도이며 대법은 부동한 층 차에서 부동한 체현이 있다. 수련자가 어느 정도로 순정(純淨)하면 곧 그 층 차에 간다. 셋째, 사부님께서는 물리학으로 예를 들어 제자들의 과학관념 타파에 도움을 주려 하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 세상의 일체는 단지 무수한 우주 층차에서의 단지 하나의 층으로 혹은 특별한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사부님께서 ‘광년(光年)’으로 시간을 표현한 것과 같이 사실은 모두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역시 서로 전환되는 것으로 현대과학도 이 한 점을 인식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사람이 여기길’, ‘현대의학의 발견에 따르면’, ‘과학자가 여기길’, ‘불교 중에서 여기길’, ‘수련계에서 여기길’, 등등이다. 이것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러하다. 이러한 ‘여기길’은 꼭 맞는 이치가 아니며 혹은 한계가 있다고 해도 심지어는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다윈의 진화론) 사부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명사의 개념과 학설을 빌어 우주 대법을 말씀하신 것이며 제자들이 그 배후의 법리를 깨우치길 바라셨다. 만약 처음부터 매우 높이 말씀하셨다면 법을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아주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기본적인 시비 관념마저 혼란에 처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릴 때도 이렇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진상을 듣던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현재 반부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우리는 대답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정의와 양지를 보호하는 태도에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경건한 기독교인에 대해 그의 신에 대한 믿음과 정념을 인정해야 하나 높이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법 공부 문제로 돌아와 관건은 법의 내포를 깨우치는 것이 관건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내려면 우선 우리의 관념을 좌우지하는 것들을 타파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2] 우리가 법 공부할 때 ‘좋고’, ‘나쁨’의 느낌은 자신의 ‘관념’으로 형성된 게 아니겠는가? 매우 그러하다고 여겨진다.

2. 왜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할까?

어느 한번 ‘질투심’ 이 단락을 공부할 때 사부님께서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언급하신 것을 발견했다. 세어보니 일곱 번 사용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황으로 자신을 비춰봤는데 많든 적든 조금씩 있었으며 일부 경우는 매우 강했다. 자신이 완고한 관념에 좌우될 때 정말로 누가 자신인지 분명하게 분별해내기 어려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속인은 이 한 점을 보지 못하기에 그는 늘 자신이 마땅히 자신에게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은 다투고 싸워서 이 마음에 아주 큰 상처를 입어, 아주 고달프고 아주 힘들다고 느끼며, 마음속은 늘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1]

션윈 항목을 할 때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구는 마땅히 이것을 해야 하고, 누구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 한다.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더욱 좋고, 그 일은 마땅히 그렇게 처리해야 더욱 적합하다. 어째서 나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지 않는가, 어째서 나에게 그것을 하라고 하는가!’ 등등이다. 자기 생각에 부합하지 않을 때 마음속은 늘 평형을 이루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일을 할 때 소극적이었고 대강했으며 협조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이런 생각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모두 질투심이며 단지 ‘션윈 항목이 잘 되게 하려고’라는 겉옷을 입혀 쉽게 식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실 이런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속이 불편하고 평형을 이루지 못할 때 많은 경우 역시 질투심의 표현이었다. 며칠 전 차이나타운에서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할 때 한 중년남성에게 진상 전단을 한 부 건네면서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의 표현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내가 계속하여 이 사람과 대화를 이끌어가려 할 때 옆에 있던 한 수련생이 말을 가로챘다. 그때 나의 마음에서 한 가닥의 불편함이 일었다. 물론 누가 알리던지 오직 그 사람을 도와 탈퇴하면 좋은 일이며 배후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그 불편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이 질투심의 표현임을 알았다.

3. ‘위타(爲他)’의 기점에 서다

제6강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내게 묻는다: 그 밖에 종교 중의 책이나 기공서를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하는데, 종교 중의 책, 더욱이 불교의 책은 모두 사람에게 心性(씬씽)을 어떻게 수련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불가로서 마땅히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가 있는데, 많은 경서 중의 어떤 것은 번역 과정 중에 이미 잘못되었고, 게다가 아주 많은 경서의 해석 역시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해석한 것으로서, 제멋대로 정의를 내리는, 이것이 바로 난법(亂法)이다.”[1]

어느 한번 이 단락의 법을 공부할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그 밖에 종교 중의 책이나 기공서를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아마 “당연히 볼 수 없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다시 사부님께서 답하신 것을 생각해보니 이런 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위타’의 입장에서, 질문자가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이치를 말씀하셨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릴 때, 수련생과 교류할 때, 가족과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어째서 인내심을 갖고 온화하게 하지 못했을까? 지금 깨달았다. 원인은 기점이 맞지 않았으며 혹은 완전히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든지 ‘위타’의 입장에서 법을 위해 책임지는 처지에서 해야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또 한 점은 어떤 경우 특히 가족과 이야기할 때 나는 단지 ‘나는 당신이 좋게 되길 바란다.’에 만족하고 있었지, 말하고 일하는 방식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며 혹은 진정으로 완전히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로 해낼 수 있는지는 역시 자신의 심성 경지의 체현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사람 마음을 찾고, 끊임없이 타인에게 적합한 방식을 찾는다면 내가 생각건대, 그건 바로 자신을 닦는 것이다.

4. 기타

또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몇 년 전 우리 이곳에서 처음으로 션윈 공연을 할 때 단체 교류에서 한 노년 수련생이 협조인과 조금의 쟁론이 있었다. 그때 나는 노년 수련생이 옳다고 여겨 그를 도와 몇 마디 했었다. 이튿날 다른 한 수련생이 나와 교류하면서 어제 단체 교류에서 내가 말을 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나는 곰곰이 이 일을 생각해봤다.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했는가?

표면에서 볼 때 나는 타인을 위해 그 노년 수련생을 위해 말했고 또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관점에서 말했으므로 맞는 일이다. 나중에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이 ‘위타’ 범위가 너무 작았다. 나는 마땅히 전체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아야 했으며 더 나아가 법에 서서 문제를 보아야 했다. 그제야 자신이 확실히 잘못했음을 발견했다. 비록 이 일은 몇 년 전의 일이나 법 공부를 통해 이 이치를 깨달았을 때 다시 이 일이 생각났다. 이는 크고 작은 것의 구분이다.

또 큰 것에 착안하는 것과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은 문제를 말해보겠다.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정당당하게 큰 것에 착안하여 수련하라고 하셨고, 또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懷大志而拘小節),”[3]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큰 것에 착안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 병업 고비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일부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큰 부분에서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나는 그렇게 큰 잘못이 없으며, 법에 대해 매우 확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사악이 틈을 탈 것인데, 많은 수련생은 작은 일 때문에 심지어 가버렸다. 정말로 아주 작은 일 때문이었다.”[4]

이 문제에서 나는 한동안 곤혹스러웠다. 나의 관념 속에서 표면에서 보면 모순됐으며 나중에야 사실 모순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물론 나는 현재 두 가지만 깨달았다. 하나는 대상이 다름과 다른 하나는 방식에서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타인에 대해 우리는 큰 것을 보아야 하고 작은 일에 얽혀있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히 요구하며 아무리 작은 집착이라도 그건 모두 큰일이다. 극단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하는 이것 역시 내가 늘 잘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그 때문에 큰 것에 착안해야 하며 정정당당하게 수련하고 차례로 점차 수련해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한번 법 공부를 할 때 사부님께서 우리의 오성 제고를 지도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함’에 봉착했을 경우 반드시 “깊게 생각해보아야!”[縱深想一想(원문 제6강 연공초마 제2단락에서 발췌)-종심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그 ‘종심’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봤다. 이렇게 생각됐다. 한 방면으로 ‘시간’에서, 예를 들면 역사상 빚을 진 것, 다른 한 방면으로 ‘공간’에서, 예를 들면 고층공간에서 내원한 마의 교란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정말로 일종 갑자기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내가 이런 원인의 배후에 있는 집착을 찾았을 때 진정으로 수련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할 때, 수련생과 얽혀있을 때, 가족과 일상생활의 문제로 부딪힐 때 얼마나 많은 ‘이상함’이 있었던가! 일부 경우 나는 단지 그 ‘이상함’의 일에서 미끄러져 나가 ‘종심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 아내가 밥을 짓고 있었고 나는 수저를 가지러 갔다. 부엌에 두 쌍의 사용한 젓가락이 있어서 그것을 싱크대의 그릇에 던졌다. 왜냐하면, 나는 아내가 나에게 씻지 않은 젓가락을 주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그때 머릿속에 이런 일념이 있었다. “물에 던졌으니 어쩔 수 없이 씻어야 할 거야!”

2분도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자신이 방금 사용했던 젓가락을 찾았다. 아내에게 싱크대 그릇에 넣었다고 알려줬더니 크게 화를 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이렇게 깨알 같은 일에서 트집을 잡는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그건 물론 진심이 아니었으며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과한 후 뜻밖에 아내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더욱 화를 냈다. 이에 나는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몇 마디 큰소리를 쳤으며 즉시 목이 쉬었다. 아내는 목이 쉰 나를 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으며 아마 그도 자신에게서 찾고 있는 듯했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상함’으로 나에게 사람 마음을 버리도록 한 게 아니겠는가?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과 쟁투심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제로 아내에게 젓가락을 씻도록 했으며 그건 모두 악한 염두이며 ‘위타’의 법리는 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법 공부로 돌아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종심’으로 그 ‘이상함’을 깨달으라고 한 원인은 우리가 각자 배후의 집착심을 찾아 그것을 없애고 제고가 있기를 바람이었다. 왜냐하면, 업력과 집착심은 상보상성(相輔相成)의 관계로 집착심을 버려야 사부님께서도 우리를 도와 업력을 없애주실 수 있다. 이 과정에 자신이 감당하는 것은 단지 상징적으로 작디작은 것에 불과하며 혹은 그건 우리의 오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글을 여기까지 쓰다 보니 감개무량하다! 글을 쓰는 것은 수련이며 문장을 수정하는 건 더욱 수련이다. 한 수련생이 수구를 이야기할 때 구강에 궤양이 생긴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서일 수 있으며 또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내가 생각건대, 글을 쓰는 것도 역시 그러했다!

여기까지 수련생과 나누려 하며 부당한 곳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불성(佛性)’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성자(聖者)’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3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3833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