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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법외우기 체험

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7, 8년 전 ‘밍후이주간’에 수련생이 법을 외운 많은 체험담이 한동안 실렸다. 그들은 법을 외운 후 많은 현묘한 감수와 빠른 심성제고가 있었고, 마난 중에서 정념정행을 할 수 있었으며 중국 대륙의 박해 환경에서 확고하게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매 편의 사례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고 이는 내가 바라던 것으로 나도 바른길을 걷고 싶어 매일 대법을 통독하던 것에서 법을 외우기로 했다.

그 당시 아이가 아직 어려 퇴근 후 밥을 하고 가사를 해야 했으며 아이의 공부까지 지도하고 나면 밤 9시 반이 지났다. 법공부를 10시 50분까지 마치고 정공을 연마해야 해서 주어진 시간에 따라 목표를 설정했다. 매일 세 단락의 ‘전법륜’을 외우며 긴 것은 한 단락을 외우기로 했다. 이렇게 8개월이 걸려 한 번을 외웠다. 통독하지 않고 단지 법 외우기만 했는데 뒤로 갈수록 그 내용을 볼 때 심정이 매우 격동됐다. 오랫동안 이 부분의 설법을 보지 않아 마치 오랫동안 헤어진 친인을 만난 듯 친절하게 느껴졌고 또 자신이 법 외우기 속도가 너무 느린 것이 유감스러웠다. 첫 번의 외우기는 거의 1년이 걸렸으며 두 번째 외우기는 속도를 내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두 번째 외우기도 역시 8개월이 걸렸다. 거의 매일 세 단락을 외웠으며 속도에 실질적인 제고가 없었다. 아울러 이 과정에 수련생의 체험담에서 언급한 그런 뚜렷한 심성제고 사례와 비슷한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효과가 뚜렷하지 않고 전법륜을 한 번 공부하는 데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아 포기하고 다시 매일 대법을 통독하는 상태로 돌아왔다.

최근 2년 ‘밍후이주간’에 또 계속해서 수련생이 법을 외운 체험이 실렸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법에 대한 이해,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책임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제고가 있었다. 대법을 통독할 때 마음이 조용하지 못했기에 속도를 늦춰 한 글자씩 읽었다. 매일 법을 읽는 시간을 1시간 반으로 한 강의의 절반만을 읽었다. 그렇게 했더니 처음에는 마음에 파고들게 할 수 있었으나 얼마 안 돼 또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이 다른 데로 흘러 어떤 때는 방금 읽은 한 단락에서 사상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중지했다. 이에 나는 끔찍해졌다. 이 어찌 법공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법공부를 마음에 파고들게 하지 않으면 법공부를 아무리 긴 시간을 해도 헛된 공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나는 다시 법외우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나는 자신에게 임무를 정하지 않고 속도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하기로 했다. 진정으로 법을 한 글자도 빠뜨림 없이 기억했으며 한 단락씩 외워나갔다. 외운 후 시간이 날 때 다시 외워보면 또 외울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책과 대조해 외우기를 수정했으며 공고히 한 후 비교적 착실하게 외웠다고 생각돼서야 다음 단락을 외웠다. 어떤 단락은 일주일 넘는 시간을 들여서 외웠으며 동시에 매일 한 강의의 절반 정도 통독하는 것을 계속했다. (이미) 외운 내용은 (통독하지 않고) 외우며 공부했다. 이렇게 했더니 이번의 외우기는 많이 착실해졌고 매 단락에서 단지 몇 글자만 기억하지 못했다. 관건은 내가 법을 통독할 때 질에도 제고가 있는 데다, 마음이 아주 조용해진 것이었다. 또 일부 자투리 시간도 이용할 수 있어 대법 속에 녹아드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번의 법외우기에서 나에게도 수련생들이 말한 그러한 현묘한 감수가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단락마다 진일보로 법리를 명확하게 설명하셨고 단락과 단락 사이의 연결성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또 다양한 입장에서 설법하셨으며, 자신의 문제를 찾아냈는가 하면, 법에 부합하지 않는 표현도 발견했으며 닦아 버려야 할 집착과 욕망도 찾아냈다. 사실 나는 이번에 제1강의 “왜 연공(煉功)해도 공(功)이 자라지 않는가”[1] 까지 외웠으나 실제로 사부님께서 조금씩 나를 깨끗이 씻어주시는 것을 체험했다. 내가 고층차로 승화할 수 있게 이끌어주셨다. 일사일념은 적극적으로 법에 동화했고 정말로 외운 법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전에 다른 사람들이 일사일념을 닦아야 한다고 해서 나도 일사일념을 닦았으나 그때는 표면에 머물렀고 실질적인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었다. 전에 법외우기는 글을 쓴 수련생과 같은 뚜렷한 작용은 없었지만, 이번의 법공부에 일정한 기초를 마련해줬다. 많은 글자와 단어를 그때 노력을 들여 외웠기에 글자와 단어의 연관성도 처음에 외울 때와는 크게 달라 외우기가 아주 편해졌다. 나는 또 자신에게 법을 외우는 속도와 법을 외우는 효과에 대해 추구하는 집착이 없어짐을 체험했다. 더욱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의 내포를 체험할 수 있었으며 매일의 통독과 결합해 사부님께서 여러 차례 부동한 입장에서 법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을 보았고 이로써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대조했다. 전에 지나온 심성고비를 떠올리며 또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됐고 더욱 높은 표준을 알 수 있었다. 법을 외우는 난도와 두려움에 대한 정서가 전혀 없었다. 대법 법리로 법공부를 지도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법을 외우기는 정말로 너무나 현묘했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1. “선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는데, 자비심이 나오기만 하면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움을 보게 되므로 곧 소원을 품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 한다.”[1] 여기까지 외웠을 때 나는 자신이 자비심을 수련해내지 못한 것을 고민했다. 늘 알면서도 잘못을 범해 사람들에게 수련인의 아름다운 형상을 체현하지 못해 사람을 구하는 힘이 크게 꺾였다. 하여 이 구절을 외울 때 왜 선을 수련하면 자비심이 나오는지에 대해 사색해봤다. 외우면서 생각하다가 어느 날 중생의 고통이 생각났다. 법에서 생로병사, 업력윤보, 생명의 윤회 등을 말씀하셨고 사람은 모두 이 층차에 머물러 있기에 고통을 모른다. 하지만 수련인이 고층차에서 사람의 표현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는 업을 짓는 것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자신을 해치며 지옥에 떨어지고 끝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 업력의 빚은 갚아야 하는데 심지어는 생명이 소멸되는 “형신전멸(形神全滅)”[1]에 이르기도 한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로 수련인이 중생을 보았을 때 고통스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도덕이 패괴된 후의 표현, 특히 불법(佛法)과 수련인에 대한 박해에서 수련인이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없어 원한과 억울함이 나타난다면 법에서 문제를 보지 않은 것이며 사람의 이치로 가늠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과 다투고 빼앗는 일이 나타나며, 각종 집착심을 버리기 싫어하고, 알면서도 범해 심성이 제고되지 못하며, 공도 자라지 못해 층차가 제고되지 못한다. 법공부에서 깨달았는데 일체 여의치 않은 일과 마주했을 때 심성을 지켜 사람과 따지지 않는 것을 진정으로 해내야만 층차가 제고될 수 있으며 더욱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여 가족, 동료, 상사, 이웃,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곤란을 당할 때 나는 더는 전과 같이 자신이 업력을 갚고 참아야 하는 문제만 고려하지 않고 중생의 고통, 그들도 업을 지을 수 있음을 생각했으며 동시에 그들을 나의 거울로 삼아 나의 원한, 억울함, 업신여기는 마음, 질투, 과시, 의지하는 마음 등등의 사람 마음을 비춰냈다. 이렇게 생각했더니 순간에 그러한 사람 마음이 녹아내려 조용해졌으며 탄연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도 고집하려는 염두가 사라졌다. 최근에 이 법리의 지도로 나는 매일 심지어는 시시각각 이 방면에서 수련하고 있으며 고험이 수시로 나타났다. 마음이 불편할 때 상대방의 표현에서 자신에게도 이러한 집착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예를 들면 남편이 설 전날 딸이 국외에서 돈을 많이 썼다고 화를 내다가 손찌검을 할 때 나 자신도 매번 딸애가 사용한 내역의 문자메시지를 보며 속으로 딸애를 원망하고 책망했던 것을 보아냈다. 이웃이 내가 잘 사용하지 않는 방의 열쇠를 가져가 몰래 식량을 놓아두어 그곳에 벌레가 끼고 나방이 날아다니게 한 일이 있었는데, 발견한 후 나는 비록 표면에서 평온하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속으론 이를 갈며 원망했다. 또 곳곳마다 그가 잘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다시 그 이웃을 만났을 때 그는 매우 심하게 나를 째려보았다. 이 눈길에서 나는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표현을 보아냈다. 직장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는데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잡담하면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다. 속으로 그들을 책망하다가 더 참기 어려우면 큰 소리로 “조용히 하세요! 당신들은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했었다. 사실 나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흥분하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타인의 감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정직 간부가 ‘고집스레’ 자신의 사람을 중요 직위에 배치할 때 불평을 쏟아냈다. 자신은 부직 간부에 있으면서 ‘고집스레’ 일과 관련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며 그를 반대하고 들이박는 등등이다. 모순 속에서 밖으로 보는 게 많았는데 다른 사람을 거울로 해 자신을 비춰보니 깜짝 놀라게 됐다. 아울러 지금 전에 넘었던 관과 난을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 일에서 일부 집착심을 찾았으나 지금은 모순의 배후에 또 원한과 남을 질책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고 더욱 깊이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어서 나는 또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일거사득(一擧四得)”[2]의 법리를 체험했다. 나는 그들에게 정말로 감사드려야 했고 그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속에서 나를 돕고 있는데 내가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더 수련해 올라가지 못한다면, 정말로 그들에게 미안한 것이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장계취계(將計就計)”[3]를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마난을 이용해 대법제자를 성취하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고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으며 결과를 볼 수 있든 없든 사부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바로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로 가는 것으로 그건 하늘로 통하는 대도(大道)이다.

점차 나는 아주 평화로워졌고 갑자기 모순에 봉착하거나 대법 진상을 알릴 때 대법에 저촉 정서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조용히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일 수 있었고 그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급히 반박하려 했던 예전과 같지 않은 포용력이 강화됐다. 물론 한 번에 해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매우 빨리 집착을 붙잡아 그것을 배척하고 멸했으며 일정한 층차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매우 편안해졌고 상화하게 변해 처음의 여의치 않던 상황이 순간에 해체됐다.

최근 나는 대법의 법리로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게 됐다. 과거 한동안은 무엇을 보나 눈에 들지 않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법에서 대각자는 사람 이 층의 이치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하는 것으로 속인사회는 바로 이러하다. 하지만 대법제자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하고 사람의 상태에서 닦아 올라가야 하며 승화해야 한다. 사람이 수련하지 않겠다면 그들에게 요구할 수 없다. 말하기 전에 우선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며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들은 말이든 아니면 자신 혹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다음의 일념이 일어난다. 일체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며 사부님께서 주관하신다.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하는 것으로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는데 이것이 바로 신사신법이다. 수련생에 대해서도 아주 너그러워졌고 자신의 장점으로 다른 사람의 단점과 비교해 상대방이 화나는 일이 없게 했다. 전에 외운 사부님의 법 구절이 떠오른다. “자비는 수련해낸 것이지 표현해내는 것이 아니고,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영원히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4] 지금은 자신의 깨달음이 있다.

2. 며칠 전 나는 갑자기 정부기관 비밀유지 부서에서 컴퓨터 비밀유지 검사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컴퓨터에 대해 검사를 진행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때 나의 첫 일념은 나와 몇 명 동료의 컴퓨터로 대법 진상 글을 읽은 적이 있으므로 즉시 삭제 프로그램으로 이 몇 개 컴퓨터에 대해 처리한 후 발정념을 하여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깨끗이 제거했다. 이튿날 갑자기 몇 년 전에 다른 사무실에 있는 동료에게 션윈 VCD를 준 일이 생각났다. ‘혹시 그가 직장의 컴퓨터로 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두려운 마음이 사람 마음을 따라 이 일의 후과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올 거라는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염두는 즉시 소멸됐고 발정념에 다음의 내용을 추가했다. “직장에서 대법 진상과 션윈 VCD를 본 적이 있는 컴퓨터에 씌우개를 내려 검사 시스템이 이러한 컴퓨터에 대해서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효력이 없다!” 동시에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일체 사람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모두 사부님의 보호가 계신다는 신념을 확고히 했다.

난관이 올 때 신속하게 자아를 보호하는 염두를 부정하고 사상을 중생 구도에 놓으며, 중생이 대법에 죄를 범해 도태되지 않게 하고, 사부님에 대한 믿음, 흔적 삭제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은 모두 법을 외우는 중 사부님의 우주에 대한 배치, 진선인(眞善忍) 우주 특성은 모든 사물에 관통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한 데서 내원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며 우연히 한 가닥 두려운 마음이 나타나도 즉시 정념으로 깨끗이 제거할 수 있다.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으며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해야 할 일체를 하면 된다.

3. 한동안 갑자기 왼쪽 엄지가 떨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떨리지 않았고 생각만 하면 떨렸다. 의식할수록 더욱 떨렸으며 특히 발정념할 때 떨려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없었다. 잠잘 때 떨리면 엄지를 밑에 깔아도 그것은 말을 듣지 않고 떨렸으며 나의 통제를 듣지 않았다. 법에서 나는 자신의 사지는 나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지휘할 수 없다면 그건 절대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또 이런 현상 역시 정상이 아니다. 방금 외운 법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가 떠올랐다.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5] 나타난 일체 바르지 않은 상태는 수련인에 대한 고험이라 여기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에서 문제를 가늠해 사람이 병을 얻는다는 관념을 바로잡고 인식을 제고한다면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신체를 청리해주시는 것으로 깨달았다.

비록 머릿속에 사람의 파킨슨 등 질병이 생각났으나 매우 빨리 억제할 수 있었고 더는 생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무런 병이 없으며 사상을 통제해 그것이 떨리지 말라고 생각했고 그것의 표현에 영향을 받지 않기로 했다. 발정념할 때 염력을 집중해 정신을 딴 데로 돌리지 않고 마음을 분산시키지 않았는데 그것을 잊은 듯했다. 더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엄지가 떨리지 않았다.

이번의 법외우기에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깨달은 법리를 연결하고 관통시켜 정체적으로 문제를 볼 수 있었으며 자신을 한 수련인의 상태로 유지하도록 애써 노력했다. 아울러 이 교류 글을 쓰는 과정 역시 전방위적으로 귀납하고 총결하는 과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심성제고의 인식이 있었으나 대부분 그 일에 국한돼 있었고 자신에게 어떻게 할 것을 요구했었다. 지금은 그런 내가 맞고 당신이 틀렸다는 일들을 서술하기도 쉽지 않으며 생각마저 하기 싫다. 오직 중생이 구도되고,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멸하는 겁난에서 지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더욱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대법을 위해 왔고 모두 사부님의 친인이다. 단지 이곳에서 미혹된 것으로 이 방면의 감수가 최근 갈수록 강해졌다.

사존께서 나를 구도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중생에 대한 자비로운 은혜에 감사드린다. 제자로서 계속하여 대법에 동화하며 최후의 길을 잘 걷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3년 워싱턴DC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원문발표: 2019년 3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10/3830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