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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념에서 구세력을 부정한 체험

글/ 지린 대법제자

[밍후이왕] 아침에 수련생 A에게 집에 왔다 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집에 갔더니 그가 말했다. “수련생 B에게 이런 소식이 들렸다고 해요, 사장님(나를 가리킴)과 그 주변의 몇 명에게 일이 발생할 거라고요.” 이 소식을 듣고 내 첫 반응은 ‘이 소식은 가짜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이튿날 즉시 B의 집에서 법공부 했다. 그는 간단히 최근에 봉착한 일에 대해 말했다. “이전에 다른 공간의 소리가 들려서 나중에 이건 교란이라고 생각돼 사부님께 청해 닫혔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두 달간 또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울러 3명의 수련생에게서 일이 발생하는 정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진위를 몰라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두명이 수련생 중에서 한 명은 10여 일 후, 다른 한 명은 1개월 후 일이 발생했는데 미리 본 것과 상황이 같았습니다. 이 두 명에게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알려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알려드리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돼 수련생 A에게 전화해 사장님께 알려드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존의 법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다른 사람이 본 후에 당신의 어느 일보에 난이 있음을 당신에게 다 말해 준다면 당신은 또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그러므로 전혀 보지 못하게 한다. 다른 법문의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하고, 동문(同門) 중의 제자도 모두 보지 못하게 하기에 누구도 맞게 말하지 못한다.”[1] 그렇다면 수련생 B가 본 나의 이 난이 존재하겠는가? 전혀 맞는다고 할 수 없으며 사존께서는 동문 중의 제자도 모두 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수련생 B가 본 것은 사존께서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기에 그건 반드시 구세력이 한 것으로 승인하지 말아야 하며 강압적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B가 A에게 이 일을 알릴 때 그의 잠재의식 중에서 이미 이 일이 발생할 것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수련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련생은 그 난이 발생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것이 병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추구한 것으로 그 난이 아마도 짓눌러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일에 봉착했을 때 우선 이것이 사존의 점화인지 분별한 후, 그것의 이런 교란을 부정해 이런 일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사존께서 순리에 따라 우리를 위해 주관하실 수 있으며 이런 구세력의 교란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한층 더 깊이 생각해보면 누가 그에게 이런 일을 예지하게 했겠는가? 이 생명이 대법제자에 대한 소위 시험은 사존의 정법 배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참여는 사존의 정법에 대한 교란이다. 그것의 이런 교란은 사존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이 존재해야 하는가?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소위 시험을 부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 자체를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을 배치한 고층생명을 포함해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다른 공간에서 대법제자에게 시험을 배치하는 데 참여한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구우주의 생명 전부를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교류가 끝난 후 우리는 함께 발정념을 했다.

며칠 후 B가 우리 집에 법공부를 하러 왔다. 그는 그 예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이 들었기에 안전하다고 여겨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매우 유사한 다른 일이 있었다. 2018년 봄, 양회(兩會)가 열리는 기간에 우리 현지의 6개 자료점 수련생이 붙잡혔다. 나에게 소책자를 가져다주는 수련생이 말했다. “지금은 양회 기간이라 매우 긴장된 환경이어서 소책자를 적게 만들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좀 적게 배포하세요, 지나서 보충하시죠.” 또 다른 한 수련생이 찾아와 말했다. “지금은 양회 기간입니다. 당신은 소책자를 배포함에 좀 이지적이어야 합니다. 아파트 한 동에서 나와서 바로 다음의 동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또 한 집, 한 집 이어서 배포하지 마세요!”

이런 충고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럼 이 며칠 배포하지 말까? 며칠 후 배포할까?” 이는 확실히 맞지 않는다. 사람을 구함에 중지할 수 없다. 그럼 좀 이지적이게 배포 방식을 개변해야 하는가? 어떻게 방식을 개변하는가? 어떤 방법이 이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할수록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할수록 이 속에 무엇인가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지적으로 생각할수록 어떻게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소위 그 이지는 ‘두려움’의 구실이었다. 그럼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점차 나는 이런 충고 뒤에는 인정했다는 것이 보였다! 양회 기간에 형세가 긴장함을 인정했고 이 기간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면 박해를 당한다고 인정했다! 이미 박해의 존재를 인정했는데 소위 이지를 담론해도 여전히 박해 속에서 박해를 반대하는 게 아니겠는가! 여전히 그것들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오지 못한 것으로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이런 이지는 작은 총명이며 대법 속에서 수련해낸 지혜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병이 있다고 여기면 그 병이 짓눌러 들어가는 것과 여전히 같은 이치다. 이런 인정으로 그 난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럼 나는 우선 이 기간에 형세가 긴장하다는 설에 대해 부정해야 하며 내심으로부터 그것의 존재를 허용하지 말아야 하고, 아울러 정념으로 이런 긴장한 형세를 만들어낸 구우주의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일체 사악한 생명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법에 대한 이해에 따라 구세력을 부정하고 나는 정정당당하게 예전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해 중생을 구했는데 아무런 교란이 없었으며 중생은 모두 사람을 구하는데 길을 내줬고 효과가 매우 좋았다.

이런 경과를 거친 후 나는 더욱 명석한 인식이 생겼다. 정말로 사상 깊은 층으로부터 구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배치는 표면 물질 공간으로 반영될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고 대법의 지도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이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19년 2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2/16/3828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