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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에 소양이 있다’에 대한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이전에 교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청년 대법제자가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자신이 반신불수가 된 것을 발견했다. 왼쪽 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대법제자는 급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행동이 자유로운 반신으로 말을 듣지 않는 반신을 억지로 끌고 일어나 제3장 공법 연마했다. 비록 손을 들 수 없었고 발을 제대로 평형을 유지할 수 없어 자세가 바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연공을 견지했다. 이렇게 구구 팔십일(九九八十一) 여든한 번을 연공했다. 마침내 반신불수가 된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몸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매우 놀랐다. 비록 곁에서 이 기적을 보지 못했지만, 그 당시를 상상할 수 있었다. 반신이 마비된 대법제자가 이렇게 거듭 연공하는 것을 보고, 게다가 전혀 기죽지 않고 의지가 금강처럼 움직이지 않고, 대법에 대한 확고한 그의 의지를 보고 천상의 신들은 감탄했다. 구세력도 이 대법 제자의 확고한 신념을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생명이든지 이 대법제자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배를 보냈다.

이 병업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이 마난을 어찌 넘기지 못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수련에 소양이 있는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수련인들이 모두 이 대법제자처럼 될 수 있다면 ‘왜 원만하지 못할까, 어찌 악을 제거할 수 없을까, 왜 마난을 돌파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수련에 소양이 있다.”라는 이 말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이지, 속인들이 말한 것이 아니다. 속인이 말한 ‘훈련에 소양이 있다.’라는 것은 평소 엄격한 훈련을 해왔다는 뜻이다. 만약 수련으로 바꿔서 보면 표면적인 글자 뜻은 아마 평소 엄격한 수련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 평소에 어떻게 엄격하게 수련을 해야 할까? 나는 이것이 수련 초기의 정진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심성을 엄격히 수련해 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뜻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수련인이 수련의 소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 문장에서 언급된 이 대법제자를 놓고 보면 그의 수련의 소질은 완전히 법 속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한 결과이다. 병업 관이나 마난에 부딪혔을 때 연공의 방법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도리를 알았기에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수련의 소질이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수련에 소양이 있다는 함의를 더욱 강조하여 설명할 수 있다. 몇 명의 대법제자가 수련생을 도와주려고 집으로 가서 철창을 운반하였다. 1000kg인 6짝의 PVC 창문이 화물 수송차에 묶여 있었는데, 차를 후진하다가 마침 다른 대법제자에게 부딪쳤다. 차를 후진시키는 관성의 힘(慣力)이 그를 쓰러지게 했고, 6짝의 PVC 창문이 화물 운송차에서 떨어져 단단한 물체들이 그의 몸을 눌렀다. 상체부터 하체까지 모두 엄청난 중력과 관성의 힘을 받았다. 옆에서 창문을 막는 것을 돕던 수련생도 손에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선혈이 온 바닥에 흘렀다. 쓰러진 수련생은 온몸이 눌려 으스러져 채 숨도 쉬기 힘들었다. 그는 억지로 소리쳤다. “빨리 와서 도와줘요.” 이때 수련생들은 급히 그를 구해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신념을 일으키라고 말해 주었다.

이 대법제자는 하룻밤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연공하고 법공부를 견지했다. 분쇄성 골절된 다리의 통증을 참고 꾸준히 연공을 견지했더니 40여 일 만에 분쇄성 골절된 다리가 정상으로 회복되고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자주색 업력이 그의 다리에 휘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릎부터 발끝으로 매일 조금씩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발가락까지 내려가자 새까만 자주색 업력이 발 위로 나가더니 다리는 완전히 나아졌다. 이런 이야기는 외부인들에게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에게 일어나는 것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변화이다. 많은 일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거대한 마난이 일어나면 병업 관은 자신에게 발생하게 된다. 일이 일어났을 때의 첫 번째 일념이 가장 중요하다. 바로 사람이냐 신이냐 하는 것이다. 일념 사이에 결과는 같지 않다.

밍후이왕에 20여 년의 정법 수련에서 많은 경험과 교훈을 써낸 대법제자들의 많은 글이 있다. 이런 문장들은 모두 우리 수련 노정에서의 지팡이와 거울이다. 다른 사람들이 관을 넘고 난을 넘는 것을 본다면, 만약 자신이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 속에 자신을 넣고 생각해 보라. 어떤 체득은 총결하는 방법으로, 어떤 교류는 심성을 높인 경험담으로, 어떤 것은 신통력을 발휘한 부분으로 썼다. 각양각색의 수련인의 상태와 다양한 해결 방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사람마다 수련하는 길이 다르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반드시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련생들이 교류 체득 문장에서 안으로 찾는 것을 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험을 법리적으로 이해하고 융통성 있게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

나는 수련의 소질이 관을 넘거나 난을 넘을 때만 체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련하는 각 방면에서도 체현되어야 한다고 이해한다. 석가모니 부처 제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 제자는 시장 거리에서 밥을 빌어먹었다. 속인들은 이 제자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고 깊이 탄복하였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본즉,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제자를 따라 함께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수행하였다. 이 불제자의 수련 자질은 바로 풍모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에게 경모의 마음이 떠오르게 하는 것도 불법을 널리 알린 것이다. 불법에서 수련한 사람이 체현한 기질, 풍모, 언행, 예의 등의 소질은 모두 그 사람에게서 불법의 표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법을 바꾸거나 그 사람의 법을 전도하는 대각자에 대한 선념과 경앙(敬仰)이 생기게 한다.

대법제자의 수련 소질 중에서 더 많이 체현되는 것은 세 가지 일을 하는 중에서 대법에 동화되어 체현한 경지일 수 있다. 어떤 이는 십수 년을 하루와 같이 진상을 말할 수 있고 자비로 세인을 대하여 구원받게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20여 년을 쉬지 않고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고 젊은 신체의 용모와 진실하고 선량하며 포용적인 성격을 수련했다. 어떤 이는 구세력의 방해와 박해를 당해도 충족한 정념으로, 심지어 신통력으로 악을 제거하고, 사악한 박해의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어떤 이는 일사 일념으로 자신을 늦추지 않고 법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보고, 해결하는데 여러 가지 신통과 법리를 수련하고 심지어 세간에 신적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세상의 명, 이, 정, 색, 욕, 질투 등등 사람 마음을 명백하게 똑똑히 볼 수 있었고 초상(超常)의 지혜를 수련해 낼 수 있는 등등, 하나뿐이 아니고 아주 많다. 비록 대법의 법리는 오묘하지만 우리는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수련자로서 이것들은 모두 수련자가 갖추어야 할 소질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수련의 특징이 다르고 성취도 다르긴 하지만 지혜가 충만한 대각자라면 이런 면에서 아마 할 수 있으리라! 세상에 있는 수련자로서 그렇게 잘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이 방향으로 노력해야 비로소 정진하는 것으로 인정해 준다.

이런 수련의 소질을 갖추었다는 것은 결코 수련 목적이 아니고, 우리 수련의 최종 목적은 원만 득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련의 소질을 갖추는 것은 우리 수련인에게 매우 필요한 일이다. 오직 이런 수련의 소질이 있어야만 비로소 수련의 장애를 넘길 수 있고 끊임없이 제고하여 수련의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상 개인적인 깨달음에 불과하니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바로잡아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2018년 워싱턴 DC 법회’

 

원문발표: 2019년 1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6/3799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