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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을 제고하여 당문화를 닦아버리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2년, 직장 때문에 나는 각 나라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외국인이 각종 원인으로 중국에서 업무를 봐야 하는데 내가 그들의 동료가 됐다. 그들과 만나면서 내가 가장 크게 감명받은 것은, 바로 자신의 당문화가 원래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이런 한 단락의 설법을 하셨다.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안 된다. 나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나는 영업 전문 외근사원으로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영업 상담을 할 때, 특히 외국인과 영업 상담을 하고 교제를 할 때, 당신은 음료를 청하고, 그는 생수를 청하며, 그는 맥주를 청한다. 당신을 억지로 마시게 할 사람이 없다. 당신 자신이 자신의 것을 마시는데, 마실 수 있는 만큼 당신은 마시라.”[1]

솔직히 말하면 나는 줄곧 이 한 단락을 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글자 표면 뜻에서 이해했고, 사부님께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문제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국인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이 한 단락 법에서 인식상의 승화가 있었다. 한번은 나와 영국 동료 몇 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어떤 말이 한 동료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여 급히 사과했다. 뜻밖에 그는 다그쳐 해석했다.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저는 근본적으로 개의치 않아요(당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그의 얼굴 표정과 말투는 마치 내가 이런 일로 난처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 시각, 나는 원래 당문화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갑자기 여태 없었던 아주 편안한 마음이 생겼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외국인의 그런 심태였다: “당신을 억지로 마시게 할 사람이 없다. 당신 자신이 자신의 것을 마시는데, 마실 수 있는 만큼 당신은 마시라.”[1] 여기에서 당신이 다른 사람과 표현이 다르다고 당신에게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다시 보니 여기에 앉은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이고,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우리가 이야기 나누는 화제도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고 어떤 다툼도 없다.

해외에서 공부한 중국인이 쓴 댓글을 본 적이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처음 외국에 갔을 때 그리 좋지 않다고 느꼈는데, 오락생활도 중국보다 풍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되자, 해외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누가 당신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고, 무엇을 하든지 막론하고 누가 당신을 이상하다고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밍후이(明慧) 라디오에서 ‘군자는 화목하지만 다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중 어떤 비유가 매우 구체적이다. 한 솥에 파, 소금, 향료, 기름 등 서로 다른 조미료를 넣어야 비로소 맛있는 한 솥의 국이 되는데, 만약 설탕 혹은 소금만 넣으면 국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문화에서 자란 사람의 사상은 이미 당문화의 어떤 틀에 고정됐다. 그리고 이런 틀에서 각자 특성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이미 선명한 개성이 존재하지 않고 독립적인 사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문화가 몸에 밴 중국인은 스스로 이미 느낄 수 없다.

서양인과 지낼 때 나는 또 일종 강렬한 느낌이 있는데, 바로 그들의 질투심은 아주 적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영국인이 모든 동료 앞에서 현장에 있지 않은 다른 동료를 칭찬했다. 그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내가 생각한 것은 ‘자리에 있지 않은 동료의 직위는 여기에 있는 분의 직위와 비슷하고, 맡은 일도 비슷해요. 당신이 이렇게 그녀를 칭찬하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후에 나는 깨달았다. 당시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이런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내가 강렬한 질투심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을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칭찬하든 뒤에서 칭찬하든 마찬가지다. 아울러 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만약 듣는 사람이 자신이 얕보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듣는 사람이 자신에게 질투심이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명확히 말씀하셨다. “서방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동방질투 또는 아시아질투라고도 한다. 온 아시아 지역은 모두 중국 유교의 영향을 비교적 깊게 받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데, 유독 우리 중국에서 비교적 강렬하게 표현된다.”[1]

현재 나는 아시아 국가의 사람도 접촉하는데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 태국, 한국, 타이완과 홍콩인도 있다. 비록 아시아 국가는 서로 다르지만 서양인과 비교하면 아시아인은 전체적으로 내성적이다. 아시아인은 칭찬에 대해 서양인보다 아낀다. 그 원인을 찾아보니, 여전히‘아시아질투’의 문제다.

당문화가 없는 그들은 더욱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당신의 관점에 찬성하지 않아도 그들은 조용히 당신의 말을 다 듣고 관점을 발표한다. 하지만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의 말을 끊어버리고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말을 끊어버리면 나는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의 관점을 발표할 때 당문화가 없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관점을 진술하고, 그들은 전혀 조급해 하지 않는다. 당문화가 있는 사람이 관점을 발표할 때 조급해할 뿐만 아니라 ‘진술’도 아니고 무엇을 상대방에게 주입하려는 느낌이다. 이렇게 할수록 듣는 사람은 더욱 배척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관념을 주입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문화를 가지고 진상을 알릴 때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

한번은 우리 업계에서 혁혁하고 유명한 선배가 우리에게 2차 대전의 경험을 진술해 주었다. 그는 이미 80여 세고 유태인이다. 사실 당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의 영어 능력은 한계가 있고, 게다가 그의 말투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기본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그의 평생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진술하는 것을 듣고, 나는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왜 눈물을 흘렸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나중에 나는 깨달았다. 원래 당문화가 없고 선량한 사람은 집착심이 적고(이미 80여 세), 수련하지 않는 속인이라도 그가 말한 말은 선(善)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당문화가 없는 사람과 많이 접촉할수록 자신의 사상이 깨끗하지 않고 ‘교활하다’는 것을 느꼈다. ‘교활하다’ 이 단어로 나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주 적절하다. 예를 들면, 나는 대만인 동료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수련인이 아니지만 우리는 같은 조상을 가진 같은 뿌리 같은 민족의 중국인이다. 그는 일을 할 때 아주 직접적인데, 어떻게 해야 하면 곧 어떻게 한다. 설령 이 일이 도리어 무슨 좋은 일이 아니라도, 그는 숨기지 않고 둘러말하지 않고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설령 나는 한 가지 좋은 일을 해도, 나는 돌리고 돌려서 하거나, 혹은 어떤 행위나 말로 자신의 동기를 감추려 한다.

당문화가 있는 나는 일을 할 때 정말 교활하다! 이런 ‘교활’로 중국 대륙 환경에서 일하고 생활해도 나는 오히려 타당하지 않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전체 환경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당문화가 없는 사람과 환경을 만나야 비로소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어떤 수준과 각도에서 말하자면, 나 이런 수련인의 심성은 아직도 일부 속인보다 좋지 못하다.

나는 깨달았는데, 당문화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어떤 지름길이 없다. 왜냐하면 당문화가 아무리 악독하고, 사람 몸에서 표현돼도 사람의 집착심에 붙어 표현된다. 사람이 집착심이 없으면 당문화 역시 존재하는 공간이 사라진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12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23/3788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