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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수련인가 가짜 수련인가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한동안 나는 무척 바쁘고 피곤했다. 거의 매일 항상 수련생이 나를 불러 이것저것을 하도록 했다. 표면에서 보면 모두 법을 실증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거의 기진맥진할 지경이었다. 법공부는 마음에 들어가지 못했고 연공도 보장할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이 교란을 받은 것을 알았지만 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 아주 고민스러웠다.

제19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 원고모집이 끝나는 시간이 거의 다가왔고 이때 수련생은 단번에 몇 편의 응모 원고를 가져와서 나에게 오타를 수정한 후 밍후이왕에 발표하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웠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일찍 가져오지 않는가, 왜 전자문서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이 며칠 동안 나 혼자서 오타에 수정까지 어찌 마감한단 말인가? 진짜로 너무 이기적이다! 남을 대신해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으니 수정하자! 수정을 시작할 때, 나는 온몸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괴로웠는데, 바로 일종의 한 요소가 내가 원고를 수정하지 못하도록 저애하고 있었다. 나는 노력해서 그것을 억제하려고 노력했고 천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지하게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매 수련생들의 원고가 아주 잘 써진 것을 발견했는데 비록 어순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고 사건 서술도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글자 사이에서 나는 수련생의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그 진솔하고 감사한 마음을 보게 되었다! 대법 속에서 자신을 실질적으로 수련하고 세인에 대해 자비롭게 구도하는 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자신의 격차를 느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전에 밍후이왕에 몇 편의 문장을 발표한 적이 있어 일부는 ‘밍후이주간’에 선정되었기 때문이고 거기에 수련생들도 내가 법리가 청성하고 오성이 좋다고 말하여 나는 스스로 수련을 괜찮게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다른 수련생을 깔보고 특히 신수련생에 대해서는 더했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수련을 진지하게 심사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아주 바쁘고 또 법공부를 보장하고 법을 실증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수련생들과도 아주 잘 지냈고 심성을 지킬 수 있었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일종의 느낌이 있었는데 예전에 대법 속에서 법리를 얻고 끊임없이 승화하는 신성한 감수가 없었다. 그런 안을 향해 찾고 뼈를 깍듯이 집착심을 제거한 후 마음속으로 밝아지고 승화하는 느낌이 없어졌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수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1]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두 점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법공부를 해도 법리를 볼 수 없었고 문제와 모순에 부딪혀도 안을 향해 찾지만 늘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끔은 심지어 이런 ‘안을 향해 찾는’ 것이 일종의 덮어 감추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더욱 은밀하게 밖을 향해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 나의 공이 자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수련인가? 진정으로 대법에서 진짜로 수련하는 것인가?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마치 거의 매일 모두 법 실증하는 일에 바쁜 것 같았고 나 스스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대법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또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늘 한 가지 사유가 말하고 있었다. 너 이것도 수련이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비록 직접 진상을 알리는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대법제자는 하나 의 정체이다. 나는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기 시작했고 일을 하려는 마음과 과시심을 찾아냈다.

나는 이런 과시심이 무척 은폐적인 것을 발견했는데 그렇게 명확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무척 겸손한 형식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고 수련생 앞에서 이른바 심성을 좋게 표현하고 있었다. 목적은 수련생으로 하여금 내가 ‘잘 수련’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이고 수련생에게서 칭찬을 듣게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수련생이 앞에서 나를 칭찬할 때 나는 또 거짓으로 말한다. “나는 잘 수련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수련생의 나에 대한 ‘잘 수련했다’란 인정을 더 한층 강화시켰다. 이런 후퇴함으로써 전진하는 식의 과시는 무척 교활하고 무척 사악했다. 이는 어디 진짜 수련인가, 수련이라고 논할 수조차 없다. 이런 변이된 사유가 지시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하고 또 자신이 법을 실증한다고 여기게 했는데 이렇게 나아간다면 위험하지 않는가?

나는 계속 안을 향해 찾았고 이런 일하는 마음과 과시심의 배후는 무엇인지, 무슨 요소가 이 두 가지 마음을 이용하여 내가 대법 속에서 실수(實修)하고 진수(眞修)하는 것을 막고 있는지 찾았다. 이때 나는 깜짝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일종 정법에 개변되지 않고 동화하지 않으려는 요소가 배후에 있었고 그것들은 자신을 보존하려 했고 정법에 저촉하고 정법 속에서 개변되지 않으려고 했다. 일하려는 마음과 과시심을 이용하여 나를 가로막았고 목적은 내가 실수(實修)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대법 속으로 실수(實修)한다면 그것들은 개변되거나 훼멸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들은 또 그것들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고 완고하게 자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더 깊이 찾아가니 나는 그것들이 바로 후천의 자아와 구우주의 속성 ‘사(私)’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들이 취한 방법은 바로 그것들의 각종 배치를 이용하여 내가 실질적으로 수련하지 못하게 하고 그런 후에 이번 우주의 겁난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진수(眞修)하지 않는 일은 여전히 아주 많았고 나는 일부 수련생들이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산굴 속에서 소도(小道)수련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가 가부좌와 정력(定力), 고통을 겪음에 의거해 위로 수련할 때 그는 역시 공이 자랄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그의 그 속인의 집착심이 길고도 간고한 세월 중에서 서서히 닳아 없어지고, 서서히 그 마음을 제거해서 자라 올라온 공(功)임을 모른다.”[1] 나는 일부 수련생들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신에게 좋지 못한 사상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일괄적으로 억제하고 억제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에 모순에 부딪히면 또 이렇게 억제하는데 이 모순 속에서 뛰쳐나오지 못했고 자신의 그 당시의 사상 반영을 보지 못했고 그런 반영이 어떤 마음이고 어떤 요소인지를 보지 않고 있었다. 더 깊이 찾지 않는데 왜 이런 반응이 있는지 배후의 동기를 찾지 않고 일괄적으로 억제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그런 소도수련과 같지 않은가. 천천히 자신의 집착심을 닦아내는데 물론 역시 공이 자라지만 무척 느리고 이는 대법수련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그 마음을 집어내어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이 매우 빠르다.”[1] 대법수련은 직지인심이고 진정으로 그 마음을 지적하고 그 마음을 제거한다.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는 무슨 마음에 의해 조성되었는지를 찾아야 하고 그 마음을 인식해야 비로소 그것 배후의 동기를 찾아낼 수 있고 비로소 근본에서 집착심을 제거하고 제고해 올라올 수 있다.

또 일부 수련생들은 자신의 시간을 가득 차게 배치하는데 무슨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아주 상세히 배치하고 매일 순서에 따라 절차를 이행하고 있는데 문제에 부딪혀도 안을 향해 찾지 않고 무조건 밖을 향해 본다. 역시 진짜로 수련하지 않도록 배치된 일종이다. 또 일부 수련생들은 매일 나가서 진상을 알리지만 자신을 수련하지 않아 속인들과 쟁론한다. 문제에 부딪히면 사람마음으로 대하고 법에서 인식하지 못한다.

또 일부 수련생은 매일 ‘NTD TV’의 어느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날마다 보아야 하고 머릿속에 어느 사회자의 분석을 담고 있다. 매일 순서에 따라 법공부하고 연공한 후 다급히 ‘NTD TV’를 켠다. 이 며칠 동안 ‘NTD TV’ 신호가 갑자기 사라지자 매일 안절부절못하고 끝없이 집착한다. 매일 이렇게 집착하는데 이는 또 수련인가? 그럼 매일 법공부도 좋고 연공도 좋고 누구에게 연마시켜 주는 것인가! 이는 푸왠선 수련과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한 수련생이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다고 할지라도 만약 많은 수련생들이 모두 이렇게 ‘NTD TV’에 집착한다면 그럼 ‘NTD TV’의 중생구원에 대해 사악이 교란하도록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NTD TV’의 사람 제도를 저애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알고 있는데 우리 지역에서 이렇게 ‘NTD TV’에 집착하는 수련생들이 소수가 아니다. 이런 수련생 다수는 대법 속에서 실질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표면형식에 이른바 정진하는 것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이런 집착은 인위적으로 더한 것이 아닌가? 그럼 이런 집착심은 또 더 고생해야 제거되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나는 사부님의 설법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더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단지 소업이지 심성제고가 아니다. 정법수련은 본래 고심하고 험난한데 또 스스로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난을 설치했는데 어떻게 넘어가겠는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실수(實修)하지 않게 하고, 진수(眞修)하지 않게 하는 이런 각종 배치는 모두 낡은 요소와 구세력의 소행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치려고 하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사부님의 정법을 방해하고 대법제자의 수련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자신에게 진짜로 수련하는지 가짜로 수련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개인의 한 점의 인식이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은 수련생들이 시정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12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10/3776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