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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일을 하면서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다

글/ 독일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2004년 4월부터 대기원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글쓰기를 했습니다. 이 일은 저로서는 쉬운 일이었습니다. 정체자와 고문, 시는 선천적인 기억이 있었고, 간체자와 현대 한어의 문법은 제가 학생시절에 엄격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매니저와 동료들로부터 끊임없는 긍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칭찬하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자만과 자부심이 저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한 동료와 문법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녀가 쓴 글이 문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글이 틀리지 않았는데 제가 고치고 나니 그녀가 표현하려는 원래의 뜻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법공부하러 갔습니다.

‘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을 공부하면서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 “우주 중에는 완전히 같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아마 두 가지 같은 것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극히 적고 적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제 마음이 움직였고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본 적이 없으시면 없는 것인데 사부님의 대답은 “없다”가 아니고 “본 적 없다”였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하시면서 이처럼 겸손하십니다. 저는 자신의 교만과 경솔함에 대조했습니다. 중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데 내가 얼마나 안다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기 시작하는가? 다시 조용히 동료가 쓴 글을 읽어보니 과연 그녀의 작문 방식은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원래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항상 겸손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합니다. 특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맹목적인 자신감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2005년 초, 저는 대기원 본부 사이트의 편집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이트는 매일 24시간 운영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때는 일손은 부족하고 일은 많아 일이 산더미처럼 내리누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연중무휴로 매일 컴퓨터 앞에서 8~9시간 동안 끊임없이 각종 문제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규칙적인 일상이 다 흐트러졌습니다. 점점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등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고음은 발정념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업무가 시간제한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를 빌미로 전 세계 동시 발정념 시간을 자주 놓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발정념 시간에 한 일이 그 15분이 지난 후에 전부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을 서서히 발견했습니다. 때로는 편집 백엔드 플랫폼(back-end platform)에 문제가 생기고 때로는 인터넷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 편집 백엔드 플랫폼은 아직 자동 보존 기능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문제가 생기면 다시 해야 했습니다. 비록 좌절감을 느꼈지만, 저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발정념 알람이 울렸는데 저는 그냥 알람을 꺼버리고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꺼졌습니다. 정전이었습니다. 이 바람에 편집 백엔드 플랫폼의 내용뿐만 아니라 인터넷이 필요 없는 문서까지 다 날아갔습니다.

놀란 나머지, 저는 마침내 멈추고자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닥치는 대로 경문을 집어 들고 봤습니다. 첫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에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념하여 책을 보지 못한다. 특히 대법(大法)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당신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당신들이 책을 보지 않고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을 덮어 감출 수 없는데, 당신이 사부인 나 개인을 위하여 일을 할지라도 역시 날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해야 하며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당신들이 책을 볼 때 난잡한 생각을 하면 그 책 속의 무수한 불(佛)·도(道)·신(神)은 당신의 가소롭고도 가련한 사상을 보고 있고, 사상 속의 업력이 가증스럽게 당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또 어떤 일하는 사람은 장기간 책을 보지 않고 법공부를 하지 않는데, 이 어찌 대법(大法)의 일을 잘할 수 있겠는가? 무의식중에 당신들은 아주 만회하기 어려운 많은 손실을 조성했다. 교훈은 당신들을 더욱 성숙시킬 것이다. 낡은 사악한 세력이 당신들의 사상적인 틈을 타지 못하게 하자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다그쳐 법공부를 하는 것이다.”

저는 자신의 일과를 조정해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법공부, 5장 공법을 하고, 더는 의도적으로 발정념 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컴퓨터는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동안이 지난 후 저의 업무 능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일은 여전히 예전처럼 많았지만 저는 두뇌가 명석하고 속도가 빨라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능률이 배로 늘었습니다.

2007년 9월, 저의 주 업무가 사무직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무실 업무를 할 때 A수련생과 호흡을 맞춰야 했습니다. 그녀와 저는 사고방식과 관념이 매우 달랐고, 때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제가 그녀의 일하는 방식대로 협력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불만과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쌓인 것이 많아지자 차츰 마음에 매듭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스위스법회 설법’을 공부하면서 “나는 최대한도로 나의 모든 일체를 포기할 수 있으므로 나는 이 일체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신 사부님의 말씀을 보면서 저는 순간 탁 트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사고방식과 후천적인 관념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A수련생이 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제가 자신의 관념으로 그녀를 가늠하고, 저와 다른 부분을 모두 좋지 않거나 나쁘게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매듭을 풀고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니 더 이상 저의 표준으로 A수련생과 저의 차이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이전에 A수련생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던 부분이 바로 저의 업무에서 부족한 부분이고 반드시 보완해야 할 부분임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전에 일하면서 어려움에 부딪히면 뒤로 물러나는 습관이 있었는데, A수련생은 과감하게 앞으로 밀고 나갑니다. 그녀는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만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녀가 너무 강해서 그녀와 함께 일하면 저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가 예전에 어려움에서 물러난 것은,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일을 완성하는 것보다 자신의 느낌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련인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의 관념을 바꾸고 나니 저의 업무 효율은 크게 제고되고 갈수록 좋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업무가 추진되면서 우리 팀의 구성원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니 제가 직면해야 할 일도 갈수록 복잡해졌습니다. 새 구성원들은 더 많은 사고방식과 업무 습관을 가져왔습니다. 모두 개성이 강해, 한꺼번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가 어려웠고, 서로 간의 심성 마찰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유럽법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순이 생길 경우 각자 나름대로 안을 향해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 관계없이 말이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 당신이 모두 자신을 찾는다면 당신은 문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일이 절대적으로 당신과 관계없으며 당신이 마땅히 버려야 할 마음이 없다면 당신 몸에서 이 일은 아주 적게 생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마음이 없다면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즉 당신의 수련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당신 몸에 모순이 생기고 당신 여기에 나타났으며 당신들 사이에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당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며 당신이 버려야 할 것이 있다.”

그래서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찾습니다. 저는 우리 사무실 업무는 다른 부서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가 잘해야 전방에 선 동료들이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아마 저를 좀 더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인내심을 가지고 각 팀원들의 사고방식과 근무 습관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최대한 그들의 방식대로 업무 지원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노력은 모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2015년 8월, 저는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업무 내용, 주변 환경과 접하는 사람들이 다 크게 바뀌었습니다. 성숙된 팀에서 아직 많이 부족한 팀으로 들어가니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고 점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시정(糾正)’에서 “문제가 나타나면 책임을 찾지 말고 자신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하기보다 그 시간에 팀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환경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만 할 게 아니라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팀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습니다. 책임은 저에게 있지 않는데 매니저는 저를 나무랐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화가 치밀어서 잘못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따지려 했습니다. 이전에 저는 어떤 일에 부딪히면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려고 고집했습니다. 제가 잘못 했으면 책임지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절대로 저에게 책임을 지우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저는 두 가지 법에 부합되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이미 없다고 생각하는 쟁투심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관념으로 쟁투심을 감추었습니다. 저의 이 ‘누가 나를 건드리면, 나는 반드시 분명히 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강한 쟁투심입니다. 또 하나는 ‘인(忍)을 잘 수련하지 못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려 하지 않고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벌어진 수련생과의 심성 마찰에서 저는 곧 폭발하려는 순간 억지로 꾹 참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에서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저는 소극적 양보를 관을 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가 물러섰기 때문에 모순을 격화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해야지, 이 정도 수련하면 다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하게 관을 넘긴 상태는 마음이 고요하고 밝은데 지금 이렇게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또 무엇일까요?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나는 수련생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는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 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수련인은 마땅히 자신의 상처에 신경 쓰지 않고, 상대방의 상처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부족한 자신을 보완해 더 이상 자신의 부족으로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수련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무의식중에 수련생에게 상처를 준 데 대해 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 팀의 매니저는 제가 그의 관리 업무를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관리 업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뒤에서 묵묵히 협력하는 데 익숙해졌고, 누구를 관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줄곧 이러한 저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는 것이고 아무런 욕심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러한 사고 패턴에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매니저는 계속해서 이런 임무를 주었습니다. 한동안은 제 마음이 많이 불편했고 힘들었습니다.

수련생과 교류할 때 수련생은 이것이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저는 흠칫 놀라며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은 잘할 수 없지요. 잘하지 못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해요.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해보지도 않고 잘할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면서 큰 뜻을 품지 않는 것이 올바른 상태라는 말인가요? 구세력의 요소들은 시시각각 우리를 노려보고 있어요. 각종 수단을 다해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방해하는데 어떻게 있는 대로 받아들여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우리의 구도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우리가 어떻게 큰 뜻을 품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직언했습니다.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돌이켜 보니 정말로 계속 몰래 안일을 추구하면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속인의 생각은 당연히 따뜻하고 안일한 곳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저는 속인이 아니며 저의 목적지는 반대인 것입니다. 물론 관리 업무는 대량의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처리해야 하며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 우리 미디어가 중생을 위해 더 좋은 성과를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많은 중생이 구도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부님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이 일에 있어서 어떻게 자신의 노력과 시간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저는 수련인이 직면하는 어떤 문제든 모두 자신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정진요지-수련자는 자연히 그중에 있다(修者自在其中)’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수련자로서 속인 중에서 만나는 일체 고뇌는 다 고비를 넘는 것이고, 만나는 일체 찬양(讚揚)은 다 고험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18년 11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1/15/3770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