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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할 줄 모른다’에 대한 한 점의 옅은 견해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많은 수련생들을 접촉하면서 ‘수련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표면에서는 세 가지 일을 모두 하고 아주 바삐 보내지만 오히려 법에서 말한 성명쌍수에 도달하지 못해 본체는 젊음이 표현되지 않았다. 피부가 희고도 불그레하지 않고, 갈수록 더 까매졌다. 교류에서는 아무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법리는잘 알지만일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법으로 자신을 닦아야 할지 모름을 발견했다.

나는 자신의 층차에서 본 수련할 줄 모른다는 생활 속작은 구체적 사례로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당문화를 제거하지 않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승화할 수 없다

법에서 우리는 현재 인류의 도덕표준은 이미 진선인(眞善忍)에서 얼마나 멀리 멀어졌는지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을 얻기 전 먼저 받아들인 것이 무신론의 주입이고 다시 말하면 당문화이다. 그것은 ‘진화론’에서 연변(演变)되어 온 것이고 진화론은 사람의 선조가 원숭이라고 하고원숭이는 동물이다. 동물은 전혀 사람의 본성이 없기 때문에 도덕관념을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목적은 반본귀진(返本歸真)이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 기초에서 승화하여 법의 가르침에 따라 승화한다.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반본귀진의 길을 가는 것이며모두 법의 가르침 하에서 수련해 올라가는 것이다. 만약 최소한 사람이 되는 것도 잘 하지 못하면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은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진선인 특성을 위배하면 그것은 나쁜 사람인데 법을 어찌 나쁜 사람한테 줄 수 있는가? 사당 스스로 법률을 만들어서 남을 관할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법 밖에 있고 제멋대로 행하여 하늘이 중공을 멸하는 결말을 얻게 된 것이다. 우주 특성에 순응하지 않으면 우주 특성의 제약을 받게 된다. 법에서는 아주 명백히 말했는데 수련 제고하려면 반드시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당신이 말할 필요도 없다.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행해야만이 비로소 수련이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한 큰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가 아니라, 생활 속의 매 한가지 일 모두 수련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속인의 정상생활 속에서 수련하기 때문이다.

2. 생활 속의 작은 일은 사실 작은 것이 아니다

밥 하고 식사하는 것을 말하면 우리 매 사람은 모두 이를 떠날 수 없다. 만약 개인의 식사가배고프지 않기 위함이라면 교류할 것이 없다. 만약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교류할 필요가 아주 크다. 식사 준비하려면 쌀을 사고 장을 보고 생활 속의 지출문제와 연관되고, 가족 입맛 기호와 연관되며, 또 음식솜씨와도 연관된다. 이런 것을 모두 행하여 가정에서 모순이 없게 하려면 진정으로 법의 요구에 따라 실질적으로 수련해야 하고 선타후아(先他后我)하고 남을 생각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반본귀진하려면 우선 전통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전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어떻게 걸어가겠는가? 나는 주변의 많은 여성 동수들이 밥을 지을 줄 모르거나 밥을 짓지 않는 것을 발견했는데 밥하는 것을번거로운 일로 여기고 대충하는데 이유도 다양하다(법 실증이 바쁠 때를 포함하지 않음). 결국은 역시 당문화를 제거하지 못하여 경박하고, 가혹하며, 혼자 결정하고, 독단적인데 이는 도덕이 타락한 후의 표현이 아닌가? 노인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보좌하고 아이를 가르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데 이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책임이 있는 것이고 수련인은 더욱 큰 책임이 있다. 속인은 법을 보지 못하지만 수련인의 모든 행동을 볼 수 있다. 과거에 이런 말이 있다. “현숙한 아내의 남편은 재난이 적고, 자녀가 효도하면 부모는 마음을 놓는다.” 수련인은현숙한 아내보다 더욱 잘 해야 하는데, 얼마나 되는 이가 이를 행할 수 있는가?

우리 오늘날의 생활방식은 후대인에게 남겨놓을 것이고 책임이 중대하다. 거슬러올라가는 것은 착실하고 착실하게 행하는 것이지, 구호를 외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장을 볼 때 선타후아할 수 있는지 이것도 수련이고 자신의 입맛과 기호에 따라 사는지, 가족의 입맛 기호에 따라 사는지 이것도 수련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밥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는 이것도 수련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장을 볼 때도 이것저것 고르고 손해볼까봐 걱정하는 이것도 이익의 마음이다. 가족의 식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용량을 확대할 수 있고 안을 향해 찾는 좋은 기회이다. 가족이 수련하든 수련하지 않든 이것저것을 고를 때 자신이 어떻게 대하는가는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할 것인지 아니면 속인과 같을 것인지 인데 이는 수련의 기회가 아닌가? 진상을 알릴 때만 수련하고 집에 있을 때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인은 자비를 닦는데 가족에 자비했는가? 집에서 독단적으로 하는 것도 당문화의 표현이고 이런 자아의 방식은 진선인으로 가늠할 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수련생 앞에서는 수련하고 집에서는 제멋대로 하는 이것이 당문화의 이중적인 관념이 농간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아주 작디작은 일이지만, 만약 생활 속의 매 한가지 작은 일도 모두 수련으로 여기고 진선인 표준으로 가늠하고 먼저 사람이 되고 다시 더 좋은 사람이 되는것을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수련이다. 먼저 법을 존경해야 법은 비로소 펼쳐 보여주는 것이고 비로소 좋은사람의 기초에서 승화할 수 있다.

한 점의 옅은 견해로 수련생들에게 참고로 제공하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시시각각 심성을 지켜야 비로소 진수임을 경고하는 바이다.

 

원문발표 : 2018년 10월 23일
문장분류 : 수련교류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0/23/3760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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