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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에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다

글/ 중국 대법제자 양판(楊帆)

[밍후이왕] 나는 50년대에 출생했고 현재는 퇴직한 교사다. 1996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지금까지 수련의 길에서 휘청거리고 부딪치고, 사당(邪黨)의 박해로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심지어 한동안 수련을 멈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시종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각종 방식으로 점화해주셨다. 내가 각성해져서 새로 대법에 들어온 후에야 또다시 생명이 존재하는 의의와 힘을 진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린다.

잊지 못할 이야기와 신기한 변화가 줄곧 나와 함께했다. 깨달음이 비교적 깊은 일을 몇 건 써내어 자비로운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1. 사부님께서 나를 흙탕물에서 꺼내 주시자 환경이 좋게 변하다

6개월 전에 나는 집에서 바쁘다 보니 너무 지쳤다. 체력이 바닥났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집안 일로 복잡해졌고 편하지 않았다.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매일 반드시 해야 하는 연공과 법공부 시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침에 눈을 뜨면 저녁에 불 끌 때까지 바빴다.

아들과 며느리는 고령에 자식을 얻었기에 각별히 아이를 총애했지만 자신이 돌보기에는 힘에 부쳤다. 아주머니를 구하자고 건의했지만 그들은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낮에는 거의 나 혼자 한 돌이 안 된 어린 손자를 돌봤다. 씻기고 밥을 먹이며 빨래하고 재우며 시간을 내서 청소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 장보러 갔다. 아침에는 며느리와 어린 손자에게 영양식을 만들어 줘야 했다. 아들은 직장이 멀어서 저녁에야 집에 돌아와 밥을 먹는다. 그리하여 점심과 저녁은 육류와 야채 요리를 해야 했다. 나는 거의 점심 휴식시간이 없다. 경쟁심이 있어서 모든 일에 완벽함을 추구하고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며느리는 내가 바쁜 것을 보고 친정어머니를 모셔와 도와주게 했다. 하지만 도울수록 바빴다. 안사돈은 나보다 몇 살 어렸지만 당뇨를 앓고 있었고 젊을 때 허리를 다쳐 힘든 일을 못했다. 밥도 할 줄 모르는데다가 더욱이 ‘결벽증’이 있어 우리 집이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꺼려했다. 침대에 누우면 빨아놓은 이불에서 냄새가 난다고 잠을 못 잔다. 화장실에 가면 메스꺼워서 구토하려 한다. 문과 창문을 열고 닫아도 손을 씻었다. 나는 끊임없이 씻고 닦아야 했다. 밥과 반찬이 딱딱해지거나 차갑거나 남으면 버리고 새로 만들거나 다음에 밥을 할 때 그녀를 고려해야 했다. 그때 나는 온종일 땀이 등에 배어 있었지만 갈아입을 새도 없었다. 그때 자신은 정말로 사람들이 형용하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급 유급보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안사돈이 아이를 안고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의 할머니는 바쁘기를 로봇 같아.” 나는 즉시 속으로 화가 나서 불쑥 내뱉었다. “나는 로봇이 아니에요, 난 수련인입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불만, 억울함이 단번에 폭발했다. 하지만 냉정해진 후 생각했다. ‘나는 수련인인가?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수련인이라고 말하지? 사부님께서 우리 제자들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다.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모두 우연이 아니다. 내 이런 상태와 집안의 긴장하고 피곤한 환경은 분명 자신의 무슨 마음이 촉성시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승부욕이 강하고 무리한 것은 바로 내 과시심이 아닌가? 과시심의 배후에는 바로 자신이 특별히 유능하다는 것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아닌가? 완벽함을 추구하고 사람들이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 바로 명을 구하고 칭찬을 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이것 또한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이 아닌가?

표면의 불만과 억울한 마음을 벗기니 깊은 곳에 홀가분하고 안일한 것을 구하는 마음이 은폐되어 있었다. 더욱 심층에는 불평하는 마음과 원망심, 질투심이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배려해주지 않고 은혜를 몰라준다고 원망했다. ‘남편이 세상 뜬지 7년이 가까워 간다. 나 혼자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너희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는데 너희는 오히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일을 만들어 주다니.’ 안사돈의 인품과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들면서도 그녀가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거나 사람을 부린다고 질투했다. 이러한 마음은 또 모두 ‘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 손자에 대한 사랑, 친척 친구에 대한 사랑, 체면을 봐주는 마음 등 이런 무거운 감정과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이 한데 뒤엉켜 큰 수렁처럼 나를 삼켰다. 그러나 이때 내 주의식은 또 이런 정과 마음, 그리고 외부에서 온 교란에 미혹되어 소극적이고 무기력하며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느 날 사부님께서 일찍이 설법하신 법이 생각났다. “그러나 연공인의 각도에서 보면, 여러 사람이 모두 당신에 대해 그렇게 잘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폭로되어 나오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제고하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소업하겠는가? 이런 문제가 아닌가?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힌 모든 이러한 마난(魔難)에 대해 저촉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바르게 대해야 한다.”[1] 사부님 말씀은 나를 깨우쳐주셨다. 정념이 강해지자 폭로된 마음과 정을 소멸해 버리고 동시에 소업하고 심성을 제고했다. 주의식도 강해졌다. 우리 집은 내가 알아서 한다. 속인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자발적으로 교란을 깨끗이 제거하고 수련환경을 정화해야 한다.

나는 아들 며느리와 상의해 가사도우미를 구해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게 하자고 했다. 그들도 동의했다. 사부님께서는 진작 나에게 사람을 배치해 주셨다. 잘 아는 한 수련생이 마침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연락이 닿아 즉시 우리 집에 오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에게 서로 돕고 서로 독촉하는 양호한 수련환경이 생겼다. 제자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린다!

2. 수련에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다

요즘 변화된 후의 가정환경에는 여전히 집착심을 폭로하고 끊임없이 심성을 제고하는 각종 시험이 존재했다. 나와 아주머니 수련생은 새벽에 연공하고 자기 전에 법공부를 견지했다. 낮에는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가끔 불만스러워했다. 늘 숱한 흠을 찾아내고 또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 아주머니에게 맡겼다. 어떤 때는 한 가지 한 가지씩 지시를 내렸는데 내 마음은 매우 불쾌했다.

아이와 낮잠을 잘 때 수련생에게도 쉬라고 했다. 필경 이 육신도 휴식과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수련생은 가부좌를 잠깐 하거나 법을 읽는다. 며느리도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수련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알기에 이해하고 지지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또 중요하지 않은 일거리를 찾아내 바느질이라도 시켜 아주머니를 쉬지 못하게 했다.

나는 화가 나서 수련생과 말했다. “며느리가 진짜 철이 없어요. 지금 수련인을 1만큼만 존중해도 장래에 10의 복을 받는데 이렇게 우리를 대하면 업을 지을 수 있어요…….” 속으로 밀레르빠 부처가 수련할 때의 일을 생각했다. 그의 사부가 난제를 냈다. 돌로 집을 짓는데 지어서 허물고, 허물고 또 짓는다. 그러데 너는 누구냐? 우리를 괴롭히기만 하고. 이런 마음이 일어나자 집안의 공기도 굳어진 것 같았다.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고 말을 해도 가시가 돋쳤으며 듣기에 속이 답답했다.

저녁에 법공부하고 나서 수련생과 교류했다. 내 이런 생각이 법에 부합되는가? 진선인(眞善忍) 특성에 부합되는가? 나는 아직도 거부감을 안고 속인의 질책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는 건가? 나는 여전히 수련생 간의 정으로 고부간의 정에 대항하는 것인가? 아주머니 수련생은 매우 이지적으로 말했다. “나는 일하러 왔어요. 며느리가 배치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하는 업무입니다. 나는 다른 생각은 없고 며느리가 만족하면 됐습니다.”

나는 단번에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의 각도에 서서 수련인과 속인을 대립시킨 것이다. 마음을 닦고 고비를 넘기는 기회를 속인 간의 옥신각신 다툼으로 여겨 분개하고 원망했다. 뿌리를 깊이 파니 여전히 사람의 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에는 어떤 조건도 없는바, 수련하려고 생각하면 수련하라.”[2] 우리가 번거로움이나 괴롭힘을 만났을 때 웃어넘기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바로 층차를 제고하고 고비를 넘는 것임을 깨달았다.

사람의 관념을 바꾼 후 다시 발정념하니 변화가 일어났다. 나와 수련생은 공통 인식을 갖게 됐다. 며느리의 이런 작태를 수련인이 심성을 제고하는 계단으로 여겼다. 정말로 며느리에게 감사해야 했다! 틀어진 내 마음이 돌아와서 더는 며느리를 원망하지 않았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또 다시 평소와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작은 일이 내 큰 원망심을 폭로했다. 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아이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구매해주었다. 포장을 뜯고 보니 공안 경찰차였다. 수련생이 한 마디 했다. “우리는 경찰차를 제일 싫어하는데…….” 며느리는 얼른 이런 규격과 모형을 선택한 원인을 설명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으면 아이의 외갓집에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아들도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 그분들은 이런 것을 가장 증오해.”

이 말들을 듣고 속인이 우리에 대해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가족들도 우리가 이것을 증오하고 저것을 증오하며 자비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이후에 사람을 구하는 데 장애를 조성할 수 있다. 나는 얼른 말했다. “그건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고 공안 경찰차로 좋은 사람을 붙잡아 감옥에 감금시켰기에 우리에게 너무 깊은 인상을 남겼어. 우리가 미워하는 건 좋은 사람을 붙잡는 나쁜 사람들이야.”

그리고 나와 아주머니 수련생은 즉시 발정념으로 다른 공간장의 구세력의 교란과 박해를 제거했다. 한가할 때 우리는 만사에 극단적으로 가면 안 되겠다고 교류했다. 특히 수구(修口)에 주의해야겠다고 했다. 대법제자는 세인에 대한 증오가 없다. 사당문화의 상용어 ‘밉살스럽다, 증오한다’를 버려야 한다. 대법제자는 시시각각, 곳곳에서, 모든 일에서 안으로 찾고 선을 수련해야만 자비심을 수련해낼 수 있고 속인이 언제 어디서든 대법제자에게 바다와 같은 흉금이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진정하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법 수련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자비는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사람을 구하는 도다”[3]

생활 속의 시험은 꼬리를 물었다. 지난달 어느 날 아들이 퇴근하고 와서 걱정에 싸여 말했다. “최근에 회사의 자금이 부족해서 이미 정식으로 공문을 내려 20% 감원한대요. 제가 감원될 수도 있어요.” 아들의 직장은 큰 회사다. 업무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수입도 괜찮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생각했다.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배치 중에 있다. 아들은 진작 진상을 알고 ‘삼퇴’했기에 뒷걱정이 없다. 나는 아들에게 알려줬다. 직장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연스러움에 따르라고.

그 며칠 동안 아들의 압력은 확실히 매우 컸다. 어떤 때는 한숨을 쉬기도 했다. 며느리도 걱정하며 말했다. “나이가 40인데 다시 안정적인 직장을 찾으려면 그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어느 날 아들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어쩌면 다음 달부터 저도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봐야 할지도 몰라요.” 나는 아들을 설득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어. ‘우리 수련인은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름을 중시하는데, 당신의 것이라면 잃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다퉈서도 얻지 못한다.’[2] 역시 자연스럽게 되어가는 것에 따르거라.” 아들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매우 동감했다. 이번에도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이틀 전에 아들이 돌아와서 알려줬다. “회사에서 감원 계획을 취소했어요. XX기관에서 이미 이직 수속을 다 밟은 직원도 떠나지 못하게 했어요. 우리 부서는 더욱 감원을 안 할 겁니다.” 나는 사부님께서 또 한 번 제자의 가족과 가정을 가호해주셨다는 것을 안다. 속으로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에 묵묵히 감사드렸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뉴질랜드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2-법정건곤’

 

원문발표: 2018년 9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9/17/3739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