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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으로 대법을 실증하다

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수련에서의 진실한 이야기로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며, 중생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합니다.

1. 저와 학생들

1999년 7.20때 저는 성 정부에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진실한 상황을 반영하러 갔습니다. ‘전국 인민대표대회’에 보내는 진상편지에 이름을 적은 일로 박해받아 집에서 7~8리 떨어진 한 마을 초등학교로 가서 일하게 됐습니다. 직장에서 나오는 그날 제가 싱글벙글 웃으니 동료가 “조건도 좋지 않고 집과 먼 지역으로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천법(天法)을 담고 있고 ‘진선인(眞善忍)’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잘못이 없고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새로운 직장에 가보니 조건이 좋지 않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부님은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1] “속인의 고락 생각하지 않음이 수련자요 세상득실 집착하지 않음이 나한이로다.”[2]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 학교에 가서 저는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곳에 와 출근하는지 알려주고,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게 하고 박해를 폭로하며 선악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매일 오전 시장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는 선생님들을 도와 장을 본 다음 출근할 때 갖다 주었습니다. 점심 때 집에 가서 식사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더치페이로 학교에서 식사를 하며, 점심 수업이 없는 선생님들이 교대로 밥을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제가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제가 간 후부터 모두 돈도 적게 들이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학생들도 정성을 다해 보살폈습니다. 제가 간 첫 겨울에 1학년을 가르쳤는데, 매일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 난로를 피워놓고 물을 끓였습니다. 보온병을 마련해 학생들 컵에 물을 부어주며 아이들이 추운 날씨에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점심에는 아이들이 싸온 밥을 데워주고, 라면을 가져온 아이들에게는 라면을 끓여 갖다 주었습니다.

저는 또 자주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배달해 주어 학부모님들이 차비와 시간을 아끼게 했습니다. 학부모들은 감동하며 아이들이 복이 있어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며 현에 가서 공부하려던 학생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웃 향에 사는 여학생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됐는데 학교에 있지 않으려고 떼를 써 부모가 속을 썩이고 있었습니다. 친정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우리 반에 보내와 이 여학생은 20여 리 떨어진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자주 외가댁에 머물렀습니다. 이 아이는 저와 인연이 있어 첫날부터 생글생글 웃으며 학교에 왔는데 아이 어머니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 부모는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고 계란을 갖다 주러 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이고 ‘진선인(眞善忍)’ 기준에 따라 처세한다고 알려주고 자연히 대법 진상도 알렸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계란을 가져가라 하고 어느 아이도 똑같이 관심을 가져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완강하게 거절하니 어쩔 수 없이 돌아갔습니다. 제가 집으로 가는데 그들이 다시 나타나 제 길을 막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 부부는 오늘 한 사람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한 사람은 박스를 안고 20여리 길을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선생님께 감사드리러 왔습니다. 어떻게 냉정하게 우리에게 계란을 가져가라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계란을 제 오토바이 디딤판에 올려놓았습니다. 저는 거절하지 못해 계란을 집에 가져왔고 이 일을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계란 숫자대로 돈을 주고, 내일 아이에게 집에 가져다주라고 하면 해결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돈을 준비해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남편도 대법에서 혜택을 얻어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곳에서 3년을 일하고 다시 전 직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표면적인 원인은 담임교사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제 딸이 당시 고등학교를 다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윗선에 집안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때 저는 전근이 수련인에 대한 박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런 박해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고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신다. 내가 수련하는 것은 우주의 대법이다. 가고 오는 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 저는 한 턱 내지도 않고 선물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뜻대로 전 직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전 직장으로 돌아가니 제게 전교에서 가장 혼란한 2학년을 맡게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회초리를 들고 수업하며 수시로 책상을 두드려야 잠시 조용해져 수업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싸워 학부모들은 자기네 집 아이가 손해 볼까 봐 학교에 와서 함께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마음씨 착한 동료가 제게 핑계를 대며 그 반을 맡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아무 압력도 느끼지 못했고 난처하지도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아이들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일을 완성하고 상사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자신감마저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반드시 좋게 변할 것이다.’ 저의 마음속에는 사부님이 주신 법보 ‘진선인(眞善忍)’이 있고 사부님께서는 제게 무사무아를 가르치고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실을 이렇게 장식했습니다. 교실 뒤쪽 벽에 큰 꽃바구니 3개를 붙이고, 한 줄 학생이 꽃바구니 하나에 대응되게 했습니다. 꽃바구니에는 착실·성실, 화목·선량, 관용·인내를 적어 놓았습니다. 오려놓은 꽃과 꽃잎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의 장점을 꽃잎이나 꽃에 적어 자신이 속한 팀 꽃바구니에 붙여서 어느 꽃바구니의 꽃이 만발했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매일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공부를 어려워하는 학생에게 개별지도를 해주었는데, 한 번도 학부모에게 선물을 받지 않았고 문제집은 원가만 받았습니다. 서점 사람들과도 접촉하며 대법 진상을 알렸습니다. 겨울에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면 저는 학생들의 솜옷을 잘 개어 덮어 놓고 먼지가 앉지 않게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을 헤아리고 부모님 속을 썩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끔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하라는 특별한 숙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수업에서 학생들이 집안일을 도운 과정을 이야기한 다음 학생들에게 “난 훌륭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게 해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갈등이 발생할 때 저는 먼저 비평하지 않고 그들을 안정시킨 후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찾아보게 했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갈등을 풀고 서로 사과하며 악수하고 화해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수련 법리, 안으로 찾는 것을 일에 응용한 것입니다.

사부님의 대법은 제게 끝없는 힘을 주었습니다. 한 달 만에 우리 반 아이들은 180도 변했습니다. 선생님들도 수업하러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됐습니다. 상급에서 수업을 들으러 오면 공개수업은 우리 반에서 하며 제가 학교를 대표해 수업하게 했습니다. 어린이 날 프로그램에서도 우리 반 학생들은 생동감 있고 다채롭게 공연했습니다.

학부모들이 저에 대한 믿음이 깊어 매번 학교에서 비용을 걷으면 우리 반은 아주 빨리 걷혔습니다. 다른 학부모는 우리 반에서 어떻게 비용을 걷는지 알아본 다음에야 마음 놓고 비용을 냈습니다. 우리 반 학생은 모두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한 번은 한 남학생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읽고 잠시 후 이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순조롭게 그에게 삼퇴를 시켰습니다.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 저는 졸업선물로 학생들에게 일기책을 선물했습니다. 선물은 가격이 꽤 나갔지만 저는 제가 적은 말이 그들에게 많은 혜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하고 일하는 것은 진실하게, 사람됨과 처세는 선량하게, 모순에 부딪히면 인내하자.”라고 적어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디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받고 싶은 가장 훌륭한 선물이야! 좋은 사람은 좋은 보답이 있다고 믿자.”

2. 저와 시댁 식구들

남편과 저는 사범학교 동창이고 우리는 1987년에 결혼했습니다. 시어머니댁 구성원은 복잡합니다. 시아버님은 흑사류(黑四類: 문화혁명 기간 중 반혁명분자·지주·부농·악질분자 등 4종류의 숙청 대상)이고, 악당에게 12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으며, 허리가 굽고 곱사등이고 천식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주버님은 결혼하고 분가해 따로 삽니다. 남편은 둘째인데 집에서 유일하게 공부를 해 능력이 좀 있는 사람이라 시댁에 돈을 내고 힘을 보태는 것은 모두 남편이 합니다. 시동생 둘이 있는데 셋째는 정신병이 있어 병만 도지면 사람을 때리고, 막내 시동생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가정에서 살아 저는 법을 얻기 전에는 기분 좋은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딸이 태어난 후부터 몸과 마음이 다 힘들어 원망하고 억울하며 마음의 평형을 이루지 못해 이혼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30이 넘은 저는 머리카락이 누렇고 부스스 했으며 얼굴이 누렇고 목 인대가 튀어나오고 눈꺼풀을 뜨지 못하고, 머리는 항상 흐리멍덩하고 자주 어지러우며 관절염이 있고 날씨가 추워지면 손이 부어 주먹을 쥐지 못하고 배에 가스가 빵빵하게 차고, 기와 혈이 부족하고 저혈압 저혈당이며 신장이 좋지 않아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1997년 5월에 저는 다행히 법을 얻고 ‘진선인(眞善忍)’ 표준에 따라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살며 사사건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사람으로 살아야하는지 알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3]라고 하신 말씀도 항상 기억하며 정진하고 착실하게 수련하자고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각종 병이 아주 빨리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되어 동료는 제가 예뻐졌고 얼굴에도 항상 웃음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덕도 승화되어 다시는 남편을 흘겨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책임감이 있고 효심이 있는 남자로 보였으며, 저는 더는 원망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시댁 식구들에게 성심을 다했습니다. 휴식 시간을 이용해 시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는데, 한 번은 타작을 저녁 12시까지 도와서 온몸이 다 더러워졌습니다. 이튿날에 출근해야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어르신들도 쉽지 않은 것을 보고 일을 도우고 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당시에 저와 남편의 월급은 70여 위안이었고 남편은 대학 본과에 들어가 공부하느라 돈이 들어갔습니다. 우리 둘은 아껴 먹고 아껴 쓰며 가족을 잘 돌보려 애썼습니다. 시부모님이 병이 나면 얼른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약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사 몸보신 시켜드리고,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어르신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 부유하지 않아 개인에게 돈을 빌리지 못하면 직장 회계에게서 가불을 해 시댁에 썼습니다. 어느 해 설 때 시부모님께 설을 쇨 물건을 사드리고 나니 우리 집 물건을 살 돈이 없어 우리는 설날 저녁에 옥수수면 탕을 끓여 먹었습니다. 이웃이 놀러왔다가 보고 “오늘 옥수수면으로 장에 끼어있는 기름을 좀 닦아내야겠습니다.”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나중에 막내 시동생이 장가들었습니다. 동서가 병이 나면 우리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전부 털어서 주었습니다. 2005년 시동생이 젖소를 키우고 싶어 해 저는 딸이 대학에 가면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1만 위안(163만원)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부족해 또 3만 위안(489만원)을 대출받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젖소가 유행병에 걸려 손해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또 매월 대출을 갚아야 해서 남편은 시동생에게 화를 내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제가 “돈을 가지고 바른 일을 했잖아요. 밑지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 돈은 벌면 되고 걱정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아 병이 생기지 않으면 되는 거지요. 생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원망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니 남편도 감동하고 이치가 있다고 생각해 더는 시동생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시동생은 정신적 압력이 크게 줄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저와 마을 대법제자들에게서 파룬따파의 좋음을 보고 거짓 모함을 믿지 않고 지금은 90% 넘는 사람이 삼퇴를 했습니다. 그들은 매년 대법 달력을 집에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진상을 전파하며 파룬따파의 복음을 전합니다.

3. 저와 친정 식구들

우리는 4형제이고 부모님은 농민입니다.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어머니도 수련을 시작하셨고 두 올케도 박해 전에 ‘전법륜’을 보았습니다. 우리 네 가정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부모님께 모두 잘해 친정 분위기는 화기애애합니다.

1997년 7월에 박해가 발생한 후, 하늘땅을 뒤덮는 거짓말로 파룬궁이 모함을 받았고, 저와 어머니는 여전히 대법을 확고히 수련했습니다. 2000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혼자 남게 됐는데, 할아버지는 거짓 모함에 속아 어머니 집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고 몸이 안 좋아지면 우리는 자주 삼촌네 집에 할아버지를 보러 갔고 평소 즐겨 드시던 음식도 사가고 용돈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사올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강직한 사람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가난이 두려워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저와 어머니가 가급적 할아버지를 위해 생각하니 할아버지도 점차 편안해하셨습니다. 나중에 숙모가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모셔오기로 하고 할아버지와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재산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면 우리 몇 집에서 할아버지를 잘 모시겠습니다.” 부모님은 월급이 없고 우리 네 집은 월급을 합치면 1만 위안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며 잘 돌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 집에 오신 후 우리 형제 네 집은 함께 노력해 약속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당시 60이 넘으신 어머니는 불평 한 마디 없이 할아버지를 돌봐드렸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마쳤는데 할아버지가 마작을 하고 돌아오셔서 밀전병을 드시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두말없이 가서 해드렸습니다. 시어머님이 놀러 오셨다가 이런 장면을 보시고 감탄해하며 어머니를 찬탄해마지 않았습니다.

파룬따파가 어머니에게 건강한 몸과 관용적인 마음을 주고, 명리를 담담히 보게 하며,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게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할아버지께 녹화 기능과 재생 기능을 갖춘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사드리고 할아버지에게 진상 CD를 보여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법을 인정하며 “수련하는 사람이 중국인뿐만이 아니고 외국인도 있구나. 연공인은 원래 다 간단하지 않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토지개혁’에 참가했던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도 가끔 우리에게 공산당의 폭정을 말씀해주시곤 했습니다.

한 노인이 ‘진선인(眞善忍)’을 마음속에 심어 두니 몸의 부종도 사라지고 얼굴에도 빛이 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잘 먹고 잘 입는 것은 마을에서도 손에 꼽힙니다. 마을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말합니다. “저 어르신은 양로하실 곳을 제대로 찾으셨네. 정말 복이 있으셔.”

많은 친척들이 친정에 오게 되고 여러 해 오지 않던 사람들도 왔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들에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잊지 않고 알려주었습니다. 친척들은 악당이 주입한 거짓말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2005년부터 삼퇴를 시작한 후 잇달아 모두 삼퇴를 해 자신을 위해 좋은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파룬따파는 전 세계 100여개 나라와 지역에 전파됐고 파룬따파의 은혜는 온 세계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대법제자는 파룬따파의 실천자이고 더욱이 수혜자입니다. 20여 년간 수련한 일부 내용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더 많은 사람들이 대법에서 혜택 받기를 희망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 ‘홍음-마음고생’
[2]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삼계(三界)를 벗어나다’
[3]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 착실한 수련’

 

원문발표: 2018년 8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8/8/13/3723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