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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는다.’를 다시 언급하다

문장 ‘수련 중 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를 읽은 소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의 ‘수련 중 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문장에서 수련인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제를 언급했고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이미 ‘죽이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는다.’에 관한 법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련생들 중에는 줄곧 반려동물을 기르고 고양이를 기르며 개를 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2008년 여름 저와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수련생이 개를 길렀습니다. 그녀는 강아지를 데리고 밖에서 산책을 했습니다. 그 강아지는 저를 보자마자 ‘멍멍’ 짖었고 그녀는 강아지에게 말했습니다. “얼른 이모라고 불러야지.” 저는 듣자마자 재빨리 수련생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그것의 이모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녀 집에서 강아지를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도 주인의 이불 속에 들어갔으며 정말 개를 아이처럼 키웠습니다. 하루는 강아지가 병이 나서 그녀는 병원에 가서 개에게 주사를 맞혔습니다. 20여 일 동안 밤낮없이 간호하고 곁에서 도와줬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박해를 당해 감옥에 있었고 몇 년 후 저는 자유를 회복하게 되어 다시 그녀를 보러가기도 전에 그녀가 갑자기 남편 품에서 사망했으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수련인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제를 이야기하려 했었으나 그녀의 고집이 센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고 모두 사람 마음과 정이 저를 가로막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지금 수련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또 한 수련생은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으며 말하기를 아이가 기르고 아이가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 고양이는 마치 매우 영기(靈氣)가 있는 것 같았고 한 번 부르면 바로 다가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각종 자세와 동작을 보여주었고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면서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 저도 이 고양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았으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친절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매우 놀라워하며 맞장구를 치면서 그것을 몇 마디 칭찬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수련하는 사람이 어떻게 동물을 감상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요? 수련생은 보고 또 가서 그것을 안았으며 그것이 어떠어떠하다고 모두 칭찬했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에는 모두 에너지가 있으며 대법 수련인 신체의 에너지장이 동물에 대해 어떤 작용을 일으키고 무엇을 개변시키고 있을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이야기하신 법의 내재적 함의는 거대하고 무한한 것이므로 우리의 유한한 층차에서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우리는 할 수 없으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이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죽이지 않음’은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 ‘기르지 않음’은 여기에 두 가지 이치가 있다. 하나는 수련할 때, 이런 동물들은 쉽사리 영기(靈氣)를 얻는다. 만약 단번에 영기를 얻는다면 그것이 아주 나쁜 일을 많이 할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요귀가 되었다’는 한 마디 옛 말이 있는데 동물 자체를 수련하지 못하게 했다. 또 하나는, 이런 것들을 키우면 매우 신경을 써야 하며 마음을 분산시킬 수 있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도 집착이며 수련에 영향을 준다. 물론 수련인으로서는 동물을 좋아하는 것 또한 집착이다.”[1]

우리는 사부님의 제자이고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명백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일을 우리는 해냈을까요?

몇 년 전 제 언니는 한사코 저에게 화분 몇 개를 주려고 했습니다. 한 개는 박하였는데 며칠 안 되어 매우 높은 가지가 위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비로소 기르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력과 귀중한 시간을 소모시켰고 제 취향과 집착을 키웠습니다. 수련은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해야 하지만 오히려 저는 매일 그것을 봐야 했고 사상 속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가꿔야 했기에 인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바와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취향은 점차 자신의 주의력도 전이시키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수련의 의지도 약화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식물을 기르는 것은 이러하며 동물을 기르는 것은 사람에게 더욱 정이 생겨나게 합니다. 인류가 정 속에 잠겨 있으므로 정은 우리가 닦아 없애야 하는 것이며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수련은 극히 엄숙하고 극히 어려운 것으로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수련에 장애를 설치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휴스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8년 9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9/8/3735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