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엘리트 여성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과 의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의료보험 조건이 좋으며 수련(修煉) 또는 운동방식과 방법이 다양해도 많은 질병에서 여전히 어쩔 수 없으며 수많은 사람은 병마의 시달림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특히 아직도 많은 사람은 가난으로 병을 치료할 수 없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일부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운명이 있으며 현실사회에서 일반인도 백세장수 노인이 있고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명산대천에서 수련하는 사람도 몇 백 살, 심지어는 몇 천 살을 살고 있다.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필경 극히 적으며 손가락으로 셀만 하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진정한 성명쌍수의 불가 수련대법이며 진선인(眞善忍) 법리의 가르침과 간단하고 아름다운 다섯 가지 공법을 보조로 배워 수련하는 사람의 심신건강을 지키고 도덕을 향상시키며 지혜를 열어준다. 수련자는 인생과 우주의 오묘한 비밀을 통찰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1992년부터 1999년, 파룬따파(파룬궁이라고도 함)는 신(神)의 땅 중국에 널리 전파돼 진선인(眞善忍) 법리로 1억 명 수련자의 심신이 정화를 얻고 도덕이 향상됐다. 1995년 3월 리훙쯔(李洪志) 대사께서는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공을 전수하고 설법하시면서 파룬따파가 해외에서 전파됐다. 현재 파룬따파는 이미 세계 1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전해졌다.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면에서 보편적으로 신기한 효과가 있으며 1998년 중국 의학계에서 5차례의 의학 조사를 했다. 그 후 북미와 대만 의학계에서도 관련 조사를 했다. 결과 파룬궁의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치유율이 98%로 밝혀졌다.

밍후이왕 등 매체보도의 수많은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주며 파룬따파의 기이한 건강 치유 효과는 일반인이 보기에 불가사의하고 이해하기 힘드나 전 세계 1억 명 수련자 단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는 청년 졸업생과 연구생이 지병이나 불치병에 걸려 연분과 행운으로 파룬따파 수련을 만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 심신의 건강을 얻은 사례가 많다. 편폭의 제한으로 전형적인 이야기 몇 개로 파룬따파가 좋음을 실증하겠다.

1. 석사졸업생 왕후이롄이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다

왕후이롄(王暉蓮)은 전 중국 동북사범대학교 환경과학학부 석사졸업생이며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강사로 취직했다. 1997년 스무 살 꽃다운 청춘시절 넘치는 활력으로 더 큰 포부를 실현하려고 중국과학기술원 박사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시험에 임박해 갑자기 질병을 얻어 1년 뒤 병세가 가중됐다.

병원진찰 후 의사가 말했다. “병이 이미 매우 위중합니다. 입원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입원 후 전문의는 ‘급성 류머티스성 열(Acute Rheumatic fever)’로 확진했으며 즉시 입원해 호르몬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호르몬을 복용 후 병세가 다소 완화돼 의사에게 질문했다. “나아졌나요?” 그리고 약을 복용하면서 베이징에 석사시험에 참가할 수 있는지 논의했다. 의사는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가족을 불러 “생명은 박사학위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병은 호전된 게 전혀 아니며 호르몬을 복용해 나타난 일종 가상이었다. 일장 악몽과 같았으며 이 악몽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르몬 사용을 여섯 알에서 두 알로 줄였을 때 그녀는 전신의 관절마다 통증을 느꼈다. 스스로 생활할 수 없어 식사는 다른 사람이 먹여줘야 했고 혼자 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침대에 누우면 스스로 돌아누울 수 없었다. 가장 힘든 일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언니가 안아서 변기에 앉히는 일인데 그때마다 통증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중에 왕후이롄 호르몬 약 복용 개수가 여섯 알에서 여덟 알로 증가됐으며 이로 인한 부작용이 전신에 나타났다. 얼굴이 즉시 달덩이처럼 됐고 여드름투성이가 됐으며 외모가 거의 망가지다시피 됐다.

동시에 대량의 한약을 복용해야 했다. 한약이 그다지 쓰지 않았으나 냄새를 맡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지네와 전갈 등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고 말했다.

반년 후 왕후이롄은 호르몬 약을 여덟 알에서 두 알로 줄이자 병이 재발해 전보다 더 심해졌다. 왕후이롄의 신체는 철저히 무너졌고 절망의 극한점에 이르러 모든 생각이 부서져 내렸다!

절망에 이르러 왕후이롄은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갓 입원했을 때 한 친구가 그에게 파룬궁을 추천했다. 그 시기 창춘에서 전해진 파룬궁이 이미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어 자신의 학교에도 연공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부모님 나이의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겼고 자신은 아직 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왕후이롄은 병원의 치료법에 신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렇게 1년 치료받았으나 신체는 갈수록 망가져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후이롄은 친구가 가져온 ‘전법륜(轉法輪)’을 조용히 전부 읽었다. 그의 내심세계는 강렬한 울림이 있었다. “저의 세계관은 철저한 개변을 가져왔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세계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수련인으로서 만약 진선인(眞善忍)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면 건강한 신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정말 기적이 나타났다. 그녀는 더는 호르몬 복용량을 늘이지 않았으나 며칠의 관찰을 거쳐 의사가 말한 그런 무서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1년 동안 처음으로 홀가분함을 느꼈고 신체를 짓누르던 무거운 큰 산이 갑자기 소실된 것 같았다. 점차 얼굴의 붉은 여드름이 가라앉았으며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얼굴의 부종도 내려갔다. 가장 중요한 점은 1년 동안 없던 식욕이 당겼고 체력과 정신력이 신속히 회복됐다. 몇 개월 뒤 왕후이롄은 완전히 건강해졌다.

1998년 9월 왕후이롄은 학교에 복귀했고 젊은 교사가 됐다. 이때 그녀의 심태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캠퍼스가 매우 아름답게 보였고 주변 사람과 일들이 모두 정다웠다.

1999년 7월 박해가 발생한 후 학교 연공장이 사라졌으며 파룬궁 제자들이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박해를 당했으며 왕후이롄도 불법적으로 1년 8개월의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수련생들의 다급한 구출과 그녀의 7개월 단식으로 2개월 더 감금되고 자유를 얻었다.

현재 그녀는 중국에서 탈출해 미국에 온지 십년이 됐다. 해외 매체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심정을 돌이켜 말했다. “수련 후 저의 심태는 변했습니다. 더는 자신의 득실, 성패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진선인(眞善忍)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합니다.”

그녀는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사부님께 매우 감사드린다며 말했다. “수련으로 저는 진정으로 병이 없는 상태의 홀가분함을 체험했습니다. ‘류머티스성 심장병이 평생 간다.’고 한 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20년 전보다 활력이 넘칩니다. 저는 진정으로 대법의 신기함을 체험했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저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2. 미국에 유학한 석사졸업생 다이이웨이의 인생 대역전

다이이웨이(戴宜葳)는 예쁜 대만 여성으로 학업과 직장생활에서 모두 순리로웠다.

그녀는 대만에서 가장 우수한 타이베이 시립 제1여자고등학교와 대만대학을 졸업했다. 유학의 길도 순탄해 미국 코네티컷대학교에서 생물공학과 컴퓨터공학 2개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스로 직장을 찾은 적이 없이 모두 직장에서 그에게 찾아왔다. 그토록 순탄하던 인생이 30살에 접어들며 갑자기 대역변이 발생했다.

2005년 다이이웨이가 출근한지 한 달쯤 되는 어느 날, 퇴근길에 후방 접촉사고로 차가 전부 훼손됐고 신체의 실질조직이 상처를 입었다. 표면에서는 큰 문제를 보아낼 수 없어서 1개월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근했다.

몇 달 후 다이이웨이는 갈수록 힘들었고 전신 관절에 통증이 생겨 나중에는 걷기마저 매우 힘들었다. 다이이웨이는 두려워 직장을 사직한 후 남편을 홀로 미국에 두고 대만에 돌아가 중의치료를 받았다.

대만에 돌아와 유명한 중의 골과 전문의 치료를 받았다. 진단 후 그에게 알려줬다. “전신의 모든 관절이 탈구됐습니다. 탈구가 오차범위 내에 있어서 방사선 촬영에 나타나지 않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나아지기 어렵습니다.”

몇 달간 치료를 받았으나 병이 호전되지 않았다. 점차 그녀는 스스로 문을 열 수 없었고 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밥그릇마저 들 수 없었다. 나중에 또 ‘섬유근육통 증후군’으로 세포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통증이 심해 모르핀 주사로 통증을 달랬다.

1년 반이 지나서 다이이웨이는 대만에서 이 불치병을 고칠 수 없다는 생각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대만에서 떠나기 전 다이이웨이는 의덕이 고상한 중의사의 진료를 한 번 더 받았다. 의사는 침혈에서 나오는 검은 피를 보고 말했다. “미국에 간다고 하는데 누구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치료해보세요. 파룬궁을 수련하면 어떤 병이든 다 나아집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파룬궁 진상자료를 그에게 건네줬다.

미국에 돌아간 후 일부 관절이 매우 빠르게 탈구했다. 다이이웨이는 어머니에게 대만에 돌아가 계속 치료할 것을 논의했으나 어머니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이미 치료로 모든 돈을 다 썼다고 했다.

다이이웨이는 3일 울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생하며 30년 공부로 2개 석사학위를 따냈으나 결국은 자신의 밥벌이도 못하게 됐구나. 살아서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것 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구나. 이렇게 더 살아서 뭐하지?”

마음이 너무 괴로웠으나 가족을 위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치료법을 찾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빚을 산더미처럼 쌓아가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나 찾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을까? 다이이웨이는 이런 생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파룬궁을 수련해볼 생각이 들어서 밍후이왕에서 ‘전법륜’을 다운받아 하루 만에 전부 읽었다. 다이이웨이는 흥분했고 크게 감탄했다. “마침내 찾았어! 난 수련할거야! 난 수련할거야!”

이튿날 일어나니 이제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전신에 아픈 곳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길을 걷고 층계를 내려가도 고통스럽게 2년간 괴롭혀오던 증세가 사라졌다.

그 이튿날 일찍 일어난 다이이웨이는 인근의 파룬궁 연공장에 찾아가 함께 신통가지법을 연마했다. 반가부좌로 3, 40분 견지했는데 관절탈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편안해졌다.

다이이웨이는 건강을 회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장애인 보조금까지 신청한 다이이웨이는 파룬따파를 만나 수련으로 전신의 병이 하룻밤에 전부 나았고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건강, 직장, 혼인, 가정을 모두 잃어가며 인생이 거의 끝을 향해가던 그녀에게 다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2008년 5월 12일 파룬궁 수련 8개월이 된 다이이웨이는 처음으로 ‘세계 파룬따파의 날’ 경축활동에 참가했다. 다이이웨이는 감격해 말했다. “오늘은 저희들이 사부님의 탄신을 경축하고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사부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영원히 갚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직 대법을 소중히 여기고 수련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사부님 은혜에 보답하렵니다.”

3. ‘캠퍼스 퀸’, ‘직장 퀸’이 건강 보물을 찾다

슈허(秀荷)는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학습 성적이 우수했고 노래, 춤, 배구, 경주, 스케이팅, 수영 못하는 게 없어 ‘캠퍼스 퀸’으로 불렸다.

졸업해 전국에서 유명한 국영기업에 배치됐고 젊은 공학 기술자로 됐다.

얼마 후 동료와 협력해 얻은 과학연구로 인한 몇 편의 논문이 국가급 간행물에 발표되면서 국내 같은 업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업적이 특별해 직함, 급여, 주택 등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20세기 80년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특수한 공헌이 있는 공학기술자 급여만이 1급 반 정도 오르며 모유 수유자 급여는 절반도 오르지 않는다. 슈허는 출산 후 출근하며 하루에 여덟 번 수유방에 달려가 아이에게 젖을 먹였으나 급여가 1급 반이나 올라 현지에서 반향이 매우 컸다.

남편도 사업형이라 슈허는 일하면서 가정의 모든 일을 돌봐야 했다. 점차 체력이 딸려 30대 초반에 각종 병에 걸렸다. 신장 기능 저하, 부종, 결장염, 갑상선 기능항진증,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시달렸다. 좀 지나서는 고막이 내려앉아 이명이 생겨 정상적으로 생활과 직장 일을 할 수 없었다. 수술하려면 얼굴 절반을 드러내야 해서 외모가 망가지고 수술비도 매우 높았다. 고결함과 ‘캠퍼스 퀸’, ‘직장 퀸’으로 불리던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치료는 죽는 것만 못했다. “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새로운 패션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명성을 얻은 저에게 있어서 만약 얼굴에 큰 상처가 남는다면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속수무책일 때 설상가상으로 아이에게 문제가 나타났다. 감기로 병원에서 가짜 약을 주사해 열이 내리지 않아 검사결과 열로 심장병이 변형돼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다시 성 아동병원에서 구급치료를 해서 생명은 건질 수 있었으나 심근이 손상됐고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과학연구 부서에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있는 직원 훈련소로 전속했다. 여러 해 도처로 다녔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깊은 밤이면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넋두리를 했다. “제가 어디에서 잘못했나요?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어 누군가를 해쳤나요? 만약 그러하다면 아이의 건강을 위해 모두 되돌려 주겠습니다.”

아마 그의 간절한 마음이 신을 움직였는지 며칠 후 그는 한 파룬궁 수련생을 만나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단지 3번 연공장에 갔었는데 이명이 없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모든 병이 나아졌고 이에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즉시 아이를 데리고 연공장에 갔는데 이틀 만에 사부님께서 아이의 신체를 조절해주셨다. 그 후 아이는 사부님의 지난(濟南) 설법을 듣고 병이 신기하게 나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의사는 아이의 심장이 금방 태어난 아기처럼 건강하다고 알려줬다.

슈허는 사부님 법상 앞에 꿇어앉아 하염없이 흐느껴 울면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뵙지도 못했고 저에게서 한 푼 요구하지 않으셨는데 사부님께서 제 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저의 일가족의 생명을 구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후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순리롭게 직장생활을 했다.

슈허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심신 건강을 회복했고 곳곳마다 타인을 위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깊은 체험을 말했다. “저는 원래 명리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각박한 말로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남들을 계략에 빠뜨리는 일은 없었으나 자신이 남의 계략에 빠질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파룬따파 수련 후 남을 업신여기고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는 타인과 우호적으로 지내지 않으면 모두 덕을 잃고,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으면 더 많은 덕을 잃으며, 덕이 없으면 모든 복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수련 후 저는 점차 명리를 담담하게 여기고 양보와 포용을 배웠으며 모든 일에서 자연스럽게 되어 감을 따랐습니다.”

파룬따파 수련 후 얼마 안 돼 슈허의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없어졌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으며 동료들은 슈허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1998년 현지에 독감이 유행했는데 직장의 1백여 명 직원 중에서 슈허 외에 모두 피해가지 못했다. 나중에 같은 사무실 직원이 토로했다. “독감이 가장 심할 때 우리 직장에서 몇 명의 중병 환자는 날마다 당신이 없는 틈을 타서 당신의 컵으로 약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당신이 감염되는지 보려 했습니다. 결과가 증명하다시피 파룬궁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당신은 공력이 높아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은 정말로 건강 보물입니다.”

이 일은 직장에서 널리 퍼져 여러 명의 동료는 그를 찾아와 파룬궁 책을 보고 싶다고 했고 파룬궁을 수련하겠다고 했다.

4. 캐나다에 정착한 마오펑잉의 굴곡적인 인생사

마오펑잉(毛鳳英)은 간쑤성 간호사 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란저우 의학원 부속병원 외과 간호사로 취직했다.

1978년 마오펑잉은 중학교 시절에 급성간염에 걸려 장기적으로 치료를 했으나 질병은 계속 자랐다. 간질환은 때때로 그를 괴롭혔고 늘 피곤하고 구역질이 나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동년배 소녀와 마찬가지로 어린 마오펑잉도 많은 장밋빛 꿈이 있었고 미래에 대해 환상으로 가득했다.

마오펑잉은 간호사 학교를 졸업하고 란저우 의학원 부속병원 외과에 배치된 첫날 건강검진에서 병이 발견돼 입원했다. 본 병원과 베이징 몇 개 큰 병원의 혈액검사에서 모두 C형 만성 활동성 간염으로 확진됐다. 의학을 배운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데 C형 간염은 세계에서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간염이며 계속 진행되면 간경화 혹은 간암으로 된다.

장기적인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이 없었다. 1995년 췌장이 붓고 간이 굳어지며 적혈구 수치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견되면서 베이징 중의원에서 간경화로 확진했다. 그러면서 정상적인 생활과 직장생활이 모두 심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입원하여 가장 좋은 약물을 사용했으나 병세는 통제되지 않았고 단지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철저한 치료를 하려고 민간요법, 기공연마, 부처에게 향을 올리기, 점괘 후 종이 태우기, 중약치료 등 모든 방법을 찾아다녔다. 성에서 1급 유명 노 중의사와 전국에 유명한 간병 전문의에게서도 치료를 받았다. 한약과 양약을 하루 세 번씩 복용하는 일을 끊어본 적이 없었다. 치료로 빚이 산더미가 됐으나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또 심한 위축성 위염, 신우신장염, 수신증, 저혈압 등 갖은 중병을 앓았다. 1996년 초에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위해 마오펑잉은 여러 차례 베이징에 다녀왔다. 한번은 전국에서 유명한 간질환 전문의의 직접 진료를 받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간질환 환자와 24시간 줄을 서서 대기했다. 왜냐하면 이 전문의는 일주일에 단지 환자 20명만 진료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으로 마오펑잉은 치료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다. 하루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주치의에게 물었다. “제가 이제 몇 달 더 살 수 있습니까? 알고 싶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고 몇 가지 일도 처리해야 합니다.” 의사는 동정심으로 그에게 위안의 말을 건넸다. “1~2년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마오펑잉의 정신은 그 순간 무너졌다. 인생이 매우 고달프고 힘들었으나 절망 속에서 자신이 여전히 매우 인생에 연연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이 왜 자신을 이 세상으로 보냈는지, 자신을 일찍 데려가려하는지 원망스러웠다. 내심의 고통이 극한에 달해 늘 눈물이 났고 성격도 매우 거칠어졌다. 남편이 옆에 없으면 고민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 옆에 있는 80여세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했다. 또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아이를 욕하고 때렸다.

그때 간경화는 이미 말기였고 심하게 야위었다. 30대 초반인데 60여세로 보였으며 얼굴에 주름으로 가득했으며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 간질환 외에 또 신우신염, 수신증으로 늘 혈뇨를 보았다. 심한 위축성위염, 저혈압, 부인과 질병도 앓았다. 허리는 통증으로 바로 설 수 없었고 두 다리는 부종으로 두 개의 납덩이를 달아맨 것 같았으며 신체 면역기능도 매우 저하됐다. 딸도 비슷한 증세를 앓고 있었다. 어찌 더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마오펑잉이 생명의 변두리에 서서 절망에 시달릴 때 우연한 기회로 인생에 전환점이 생겼다.

1996년 7월 22일, 마오펑잉은 영원히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마오펑잉은 딸과 함께 야채가게로 가면서 알고 지내는 아줌마를 만났다. 그 아줌마는 파룬궁을 소개하면서 자신도 파룬궁으로 모든 병이 나았다고 말했다. 또 과학기술원 마당에 연공장이 있으니 내일 아침 6시에 연공장에 오면 된다고 알려줬다.

한번 해보려는 마음으로 이튿날 아침 6시에 그는 딸과 함께 연공장에 갔다. 보도원은 연공동작을 가르친 후 ‘전법륜’(파룬궁 주요 저서)을 그에게 빌려 주면서 돌아가서 잘 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쳐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읽기를 계속했다. 그는 여태 이런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인생의 많은 문제를 매우 투철하게 말했고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이치를 전부 말하고 있었으며 병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왜 기공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튿날 또 연공장에 공을 배우러 갔고 집에 돌아와 다시 책을 읽었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마오펑잉은 갑자기 모든 병이 단번에 없어진 것을 느꼈으며 마치 몇 십 킬로그램의 돌덩이가 몸에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피로와 무기력함, 간장과 췌장의 극심한 통증, 밤에 식은땀을 흘리는 현상, 구역질, 복부팽창, 추위에 대한 두려움, 다리부종 등이 단번에 모두 소실됐다. 반대로 전신에 열이 나고 신체가 매우 가벼웠으며 걸음에 바람이 일었고 층계를 오르기 매우 쉬웠으며 자전거를 타면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아 힘을 줘 밟지 않아도 매우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마오펑잉은 격동된 심정이 말로 표현이 안됐다. 18년의 고통이 단번에 없어졌고 죽음의 변두리에서 몸부림치던 자신이 순간에 정상인으로 회복됐다. 꿈과 같았으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딸도 마오펑잉과 함께 파룬궁을 수련해 병증이 전부 없어졌으며 병으로 앓은 사람 같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했다! 1개월 후 마오펑잉은 딸과 함께 병원에서 전면 검진을 했다. 결과 원래의 증상이 전부 정상으로 회복됐다. 모녀의 간질환이 전부 나았다!

1996년 3월 마오펑잉의 남편 예퉁구이(葉同貴)는 방문 학자로 미국에 갔다. 마오펑잉과 딸은 병세가 심해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예퉁구이는 미국에 도착한 후 아껴먹고 아껴 쓰며 남는 돈을 모녀에게 보내려 했다. 미국에 도착한 3개월 후 예퉁구이는 문득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우리 모녀의 병이 다 나았어요.” 남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돼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 되물었다. 마오펑잉은 전화에서 격동된 심정에 울면서 말했다. “우리의 병이 정말로 다 나았어요. 지금 파룬궁을 수련해 병이 철저히 나았어요. 우리도 미국에 갈 수 있어요.”

1996년 10월 마오펑잉과 딸도 미국에 도착했다. 정말로 완전히 나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예퉁구이는 그들에게 전면적인 건강검진을 받게 했다. 결과 전부 정상으로 나타났으며 그들은 모두 건강한 사람이었다. 이 결과를 보고 셋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예퉁구이는 아내와 딸이 건강을 회복한 기적을 보고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미국에 입국한 지 1년 후 마오펑잉은 임신해 포동포동한 남자 아기를 출산했다. 이 소식이 국내로 알려졌으나 동료와 친척들은 믿을 수 없었다. 의학 입장에서 간경화 환자는 임신이 불가능한 것이다. 태어난 아들은 건강하고 활발했으며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다.

나중에 마오펑잉 일가족 4명은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했다.

죽음의 선상에서 사경을 헤매던 고통은 일찍 그들 모녀에게서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마오펑잉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마의 고통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만약 중국공산당의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었더라면 그들도 파룬궁을 수련할 수 있었을 것이며 역시 행복과 건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늘 관광지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중국 관광객에게 들려주고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또 국내로 전화를 돌려 중국대륙 민중에게 자신의 일가족이 겪은 일과 친구들의 몸소 겪은 진실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알려줬다.

 

원문발표: 2018년 9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 이야기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9/7/3734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