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잠깐 쉼에도 자아 성찰하고 정념을 더하며 부족함을 똑똑히 알아 다시 정진할지어다”[1] 마음을 조용히 하고 청성하게 생각해보니 나는 자신에게 아직도 부정적인 사유가 아주 깊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겉으로 표출되는 양상과 함께 뿌리를 깊이 파 원인을 분석해봤는데, 주로 아래 방면에서 체현되고 있었다.
1. 타인에 대한 악의적 추측이 습관화 된 것
사무실에서 동료가 업무나 처세 면에서 잔머리를 쓰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그가 마음이 바르지 않고 자기가 총명한 줄 여기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 때문에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고 그를 깔보게 되었다. 말할 때 자기도 모르게 각박하게 말하곤 했기에 사무실 분위기가 조화롭지 못했다.
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보면 적대적인 감정이 생길까? 왜 남을 선의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할까? 왜 평온한 심태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진솔하게 생각을 나누지 못할까? 왜 늘 한탄하고 원망하고 회피하거나 감정이 격해져서 큰소리로 다툴까? 이는 마땅히 대법수련자에게 있을 상태가 아니다.
뿌리를 파며 생각해보니 이것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변이적 관념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큰 부분에서는 공산사령이 장기간 주입한 당문화가 조성한 것이고, 거기에 업력과 구세력의 참여로 마성이 커져서 불성이 매몰되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사람의 최초 생명은 우주 중에서 온 것이다. 우주공간은 본래 선량한 것이고, 眞(쩐)ㆍ善(싼)ㆍ忍(런),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태어나서는 우주와 동성(同性)이었다.”[2]
즉 우리의 선천적인 본성이나 불성은 원래 선량한 것이고 우주의 특성에 동화한 것이다. 그러나 후천적인 원인 때문에 서서히 이기적이고 좋지 않게 변했기 때문에, 자신의 후천적인 관념에 맞지 않으면 용인(容忍)하지 못하고 강제로 정복하려는 심리가 있다. 이는 선하지 않고 참지 못하는 것이다. 좀 더 깊고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는 구우주의 생명이 스스로 존귀하고 크다고 생각해 제멋대로 하는 이기적 심태이다. 이른바 눈에 모래가 들어가도 안 되고, 반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에서 생각을 통일하고 속도나 모양을 똑같이 하려 한다. 항상 남들이 자기 생각에 순순히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눈이 항상 밖을 향해 보고 있어서 늘 법으로 남을 판단하려 하고, 남이 어찌어찌 좋지 않다고 여기며 남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늘 원망하고 남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겉보기에는 마치 남을 좋게 하려는 것 같지만, 도리어 자기의 고만한 잣대로 세계를 가늠하려는 것임을 간과하고 있는데, 잘난척하는 것이다.
우주는 풍부하고 다채롭다. 각 층차의 경지마다 그 생존의 표준과 낙이 있으며 각 층차의 시비, 선악, 정사(正邪), 옳고 그름의 표준과 상생상극 윤회 성주괴멸의 운행법칙이 있다. 개개인 모두 자신의 길이 있으며, 남이 강제로 간섭하고 개변할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 당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2] “당신을 강박하고 핍박하여 수련하게 할 사람은 없으며, 수련하고 안 하고는 당신 자신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느 길로 가려하고, 당신이 무엇을 가지려 하며, 당신이 무엇을 얻으려 하든지 누구도 당신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선(善)을 권할 뿐이다.”[2] “우리 우주 중에는, 그 자신이 추구하고 자신이 가지려 하는 것을 일반 정황에서는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다는 이치가 있는데”[2]
이러하다면 왜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불평을 하는가? 왜 싫어하고 원망하는 것인가? 왜 기어코 남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이는 독선적인 이기심이 아닌가? 우주의 이치에 거스른 행동이 아닌가?
대법은 원용(圓容)한 것이고 일체는 모두 가장 좋은 배치이다. 우리는 오로지 법에 동화하고 법을 원용하고 평화롭고 선의적으로 진상을 알리고 선을 권하는 것이지, 강하게 추구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세인은 모두 미혹 속에 있는 것이지 않은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변이되고 타락한 관념에 통제당하고 있다. 또 자신의 업력과 구세력의 흑수, 썩은귀신, 난잡한 신, 공산사령에 조종당하고 있다. 무지 속에서 공산사령이 주입한 당(黨)문화라는 독약을 종일 마시고 있다. 무지 속에서 흐리멍덩해져 악을 따라가고 있고 무지 속에서 공산주의 붉은 악마를 따라 아주 빠르게 지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그들은 당초에 천담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려와 대법에 의해 구도되려 했는데, 그 초심은 무척이나 고귀하다. 이 한 점만 보더라도 마땅히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만 가지 어려움을 무릅쓸지라도 그들을 깨우고 구해야 하는데, 그들이 고통의 바다와 악의 풍랑 속에 몸부림치고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마음속에 원한이 생기는가? 그들은 무지 속에 있는 것이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과 업력, 구세력의 조종하에 악을 따라 내려가면서 각양각색 표현이 있는 것인데, 어찌 관용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들을 구하는 데 따른 마난에서 도피할 수 있겠는가? 당당히 마난을 마주하고 정념으로 교란을 제거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 물론 원한 없이 선을 권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 그리고 아주 깊이 집착심을 숨기고 남에게 진상을 주입하며 강제로 개변시키려는 심태로 선을 권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은 가끔 겉보기에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심성 상에서는 천양지차이다.
2. 의외의 사건에 대해 늘 비관적 태도를 보이는 것
매번 뜻밖의 사건에 부딪히면 우선 보이는 반응이나 생각은 다수가 좋지 못한 발전 추세, 좋지 못한 결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늘 나쁜 방향으로 생각한다. 이는 무엇일까? 왜 마음속에 항상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수동적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을 얻은 생명은 이미 불성이 깨어났으며 생명은 미시적인 데서 신의 몸으로 전화(轉化)가 일어나고 있다. 마땅히 희망적이고 생기가 충만해야 한다. 이는 법을 얻은 초기에는 아주 선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게을러지고 정진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성(神性)한 일면이 후천적인 요소와 무수한 공간에 의해 간격이 형성돼 표면상에서 여전히 연신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것 같다. 인간세상에서 연을 당기는 가늘고 긴 끈은 사람으로 말하면 운명이 오가게 하는 인연이다. 매 생명은 모두 근기와 내원이 다르고 층층이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 중에 각종 인연을 쌓았으며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에서 또 서로 다른 길을 만들었다. 근기가 좋은 사람은 선한 인연을 대량으로 쌓아 돌아가는 길이 비교적 넓고 평탄하다. 반대로 가시와 고달픔이 가득하고 심지어 가파른 절벽이면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타날 때는 사실 바로 자기 공간마당 내의 돌아가는 길에 그러한 억울한 영혼, 빚쟁이 등 부정적인 타락한 것들이 당신을 놀래키고 가로막으며 교란하는 것이다. 일부는 당신을 향해 빚을 독촉하고 또 일부는 이른바 당신을 고험하고 사실상 질투의 불꽃을 태우는 것인데, 당신이 반본귀진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 목적이다. 당신에게 이 ‘당승의 고기’를 먹게 하여 마음속의 원한을 풀려는 것이다. 일단 정념이 충족하지 않아 두려운 마음이 올라오거나, ‘백골정’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할 때, 사악한 마가 틈을 타 박해하는데, 이 때문에 더욱 이지적이지도 머리가 맑지도 못해서 정념이 부족해진다.
사실 마땅히 소극적이고 비관하며 절망하는 것은 속인이다. 하늘로 통하는 길을 걷는 수련자가 어떻게 미혹될 수 있는가? 마치 경을 얻기 위해 서천에 가던 당승과 제자들이 통천하를 만나건 화염산을 만나건, 건너가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마음이며 사람의 관념이다. 수련인으로서는 각종 신통을 지녔고 사부님과 호법신의 보호가 있으며, 길은 일찍이 잘 닦아져 있다. 단지 당신이 믿을 수 있는가,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불바다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3] 훼멸되는 창우(穹於)를 구원하는 위대한 사존이신데 우리가 어떤 비관할 것이 있고 소극적이고 두려울 것이 있는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일체 정서는 모두 우리의 선천적인 순진(純真)한 본성이 아니다. 모두 후천적인 요소이고 구우주의 생명이 교란하는 것이다.
3. 혐오하는 정서가 쉽게 생기는 것
우리 농장은 병아리를 좀 키우는데, 닭들이 늘 떼지어 농장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저 멀리 수풀에 들어가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매번 그것들을 잡아오느라 너무 힘이 많이 든다. 그래서 닭을 잡아오다보면 나는 늘 화가 많이 났고 멍청하게 집을 나가는 닭들이 너무 미웠다. 심지어 그냥 포기하고 싶기도 했고 죽든지 살든지 상관하기 싫었다.
또, 매년 봄·여름·가을이면 노루들이 대거 농장에 뛰어와 과일 야채 묘목 꽃과 풀을 해쳐서 생산량에 큰 타격이 있었고, 내 실적에몹시 나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많은 방법을 생각해 큰 힘을 들여 울타리를 대거 조성했다. 그래도 노루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때문에 두려움과 원한이 생겼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일부 동료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너무 더럽고 저속했는데 나는 이것이 너무 역겨웠다. 또 일부 동료들은 틈만 나면 사악한 공산당(이하 사당)의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생각 없이 사당이 주입한 관념과 설을 받아들이고, 사당의 각종 비뚤어진 정책과 죄행을 변호했다. ……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항상 깔봤고 마음속에 혐오스러운 대상(사람, 사물)이 아주 많이 생겼다. 나는 이렇게 원한 맺힌 상태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장기간 늘 내려놓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째서 늘 이런 일에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분산되는 것인가?
항상 타인이 눈에 거슬리고, 무의식중에 남들이 내 표준에 따라 행동하기 바라는 것이다. 자기가 인식하는 표준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 싫어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고 심지어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이는 구우주 생명이 지닌 본성을 체현한 것이다. 이기적이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 말이다. 그것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여러 다른 의견이 강하게 도전해오는 것은 더욱이 마주할 수 없어 한다. 사실은 경계심이고, 열등감, 질투심 등등 사심과 악념이 뒤섞인 표현이다. 공산사령이 인간세상의 공산당에 붙어, 일체를 의심하고 일체를 무너뜨리려는 오만함, 두려움, 열등감, 폭력적 심리를 낱낱이 드러낸 것이다.
이 세계에는 좋고 나쁨, 선악이 모두 존재하며 다들 각자의 귀속 방향이 있는데, 하필 무엇 때문에 질투해서 원수가 되는가? 하물며 혐오하고 불안해하는가? 쓰레기는 마땅히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고 쓰레기통에는 아주 많은 쓰레기가 있다. 쓰레기와 쓰레기통에 대해 무슨 싫어할 가치가 있는가? 한 각자(覺者)가 저층 우주 생명의 우매와 무지를 보고는, 타락하고 업을 짓는다며 마음에 악념이 생기고 이 일체를 훼멸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말법(末法) 말겁(末劫)시기에 우주의 구세력 생명은 확실히 이러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대단하다 생각하고 저층 생명을 깔본다. 그것이 인식하는 표준에 맞지 않으면 훼멸하려 하고 타인의 기분과 처지를 애당초 고려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4]
즉, 당신이 똥구덩이에 떨어지고서도 깨끗하려고 생각하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똥구덩이는 원래 더러운데 깨끗해지려고 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잘 수련해서 똥구덩이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그 수련은 소업(消業)하고 집착을 없애는 것이 아닌가? 소업은 바로 빚을 갚는 것이고, 즉 고통이다. 고생을 두려워하는 것은 도피하려는 것인데, 가능한가?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세간의 망념과 정감을 전부 다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정황을 직면하더라도 마음에 두지 말고 금강부동(金剛不動)하며, 진리를 위해 정념이 아직 살아있는 생명을 위해 일체를 버릴 수 있으면서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미혹 속의 중생이 일시적으로 흐리멍덩하여 죄를 지었다고 해서 분개하고 증오하고 포기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수련에 어디 우연한 일이 있는가? 업무와 생활에서 만난 일체 일들은 자신의 업력을 없애고 집착을 제거해 원만하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이 방면의 업력과 집착이 없다면 절대로 상응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부딪힌 어떠한 번거로움과 힘든 일도 모두 우리의 업력과 집착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우선 마땅히 안을 향해 찾아보고, 자신이 어느 방면에서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언행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지를 보아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구세력이 기회를 타서 틈을 타고 교란하고 박해하는 요소를 정념(正念)으로 부정하고 없애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나 무지하고 뭘 몰랐다. 어떻게 병아리 노루와 견식을 같이한다는 말인가? 어찌 관용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그것들을 혐오하는가? 그래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병아리가 나갈 수 있는 원인을 찾아봤다. 그랬더니 울타리 몇 군데가 느슨해져있었고 틈이 커져서 병아리들이 도망갈 수 있었다. 방법을 대서 울타리를 보수하니 효과가 아주 좋았다. 마음을 다잡고 사장님과 동료와 상의해서 노루를 막는 울타리를 다시 수리했더니 다들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렇다. 양을 잃었으면 마땅히 마음을 조용히 하고 울타리를 잘 보수해서 예방해야지, 양이 멍청하다고 늑대가 교활하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세인은 더 그렇다. 그들은 겉으로는 강한척하나 사실 속으로는 아주 고달프고 약하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변이된 관념, 당(黨)문화, 업력에 포위됐기 때문에 은연중에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느끼더라도 출로를 모른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들을 깨우려 한다 해도, 표면에서 그들의 거칠고 천박한 표현을 이해해주지 않고 관용하지 못하면 그들의 마성을 격화시킬 수 있어 또 한 번 기회를 잃게 할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못한 것이다!
한 점의 옅은 인식이다. 법에 있지 않는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홍음2-이지 각성(理智醒覺)’
[2]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轉法輪)’
[3] 리훙쯔 사부님 시사:‘홍음2-사도은(師徒恩)’
[4]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18년 8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27/3729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