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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결점을 서둘러 지적하지 말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생 A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를 보러 갔을 때 그녀는 화가 엄청 나있었다. 나는 그녀 가족들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이랬나요?” 그녀의 며느리는 “집에서 누구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를 훈계하죠.”라고 했다. 친척 한 분이 또 말하기를 “성격이 나빠서 말도 못하고 누구도 건드리지 않아요.”라고 했다. 옆에 있던 수련생도 말했다. “그녀의 부족함을 오직 저만이 말해줄 수 있어요. 남들의 말은 듣지 않고 저도 그녀의 결함을 말할 때 눈치를 보고 정서변화를 파악한 다음에야 의논하는 형식으로 말해주곤 합니다.” 나는 즉시 A의 교통사고 원인을 알게 됐다. 구세력에게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나는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다음에 병원에 가게 되면 꼭 A와 잘 교류해 그녀의 마성을 지적하기로 다짐했다. 노 대법제자로서 수련을 이렇게 하다니?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그래도 원만을 생각하다니?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A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는 “아내의 성격이 나쁘죠.”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은 왜 아내에게 이런 결함을 지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그는 “아내가 기분이 좋을 때 저도 많이 충고하는데 아내도 자신을 원망하고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편입니다. 때로는 머리도 붙잡고 얼굴을 때리곤 하죠. 그 버릇을 고치기 쉽지 않아서요. 하지만 다시 또 일에 부딪치면 여전히 화를 내곤 해요.”라고 말했다.

“아내가 기분이 좋을 때 저도 아내에게 많이 충고합니다.”는 말에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단번에 나 자신의 문제를 찾게 됐다. 나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입만 열면 몇 마디 말로 상대방을 깔아뭉개 말문이 막히게 했다. 그러한 강압적인 성격은 다른 사람을 벽으로 몰아 밀어붙이는데 마치 당신이 반드시 고쳐야 하고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어느 한 번 나와 수련생 B는 함께 교류하면서 나는 “당신이 개를 기르고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개를 데리고 산책시키는 시간이 법공부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이것이 수련하는 사람의 행위인가요? 원만할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여러 차례 지적했으나 B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나는 또 여러 번 간곡하게 권고했다. 나중에 그는 짜증을 내면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만나기만 하면 왜 내 결점만 말해요? 나는 원만하지 못해요? 당신이 수련 층차가 높고 나는 당신보다 못하니 앞으로 나와 왕래하지 말아요.” 이때부터 그는 내 핸드폰을 차단해버렸다.

여기서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됐다. 나는 자신에게 너무나 집착했다. 사람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자신이 본래부터 수련을 잘한 것처럼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도 상대방이 기분 좋을 때 권하지 않고 효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당 문화적인 대화 방식이다. 상대방은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니 싫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난 당신의 이치를 납득할 수 있으나 당신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태도’란 배후에는 경지가 있다. 자비롭고 평화로우며 상대를 위한 기점에 서서 소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조급하고 강압적인 의사소통 방식의 효과는 매우 나쁘다.

나는 아직도 한 가지 일이 생각난다. 나는 노수련생 C가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해 며느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주 곤란하다는 말을 들었다. 한번은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를 꾸짖었는데 그야말로 정신이 들게 한 것 같다. 그땐 C는 그냥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법회에 참석할 때 C가 발언 중에 두 가지 일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하나는 그녀가 매년 4만여 위안(한화 649만원)의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창고를 어렵고 힘든 친척에게 공짜로 빌려주었다는 점이다. 이 친척은 결국 대법에 대해 본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둘째는 그녀의 이웃이 장사를 하는데 대문이 작아서 차가 정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정원 벽을 50센터미터나 양보해 이웃의 차가 마당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집은 시내였다. 땅이 바로 돈이지만 그녀는 이익을 포기하고도 마음은 평온했다. 나는 듣고 생각했다. 이 일이 만약 내가 했다면 틀림없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남에게 호통을 치려했을까? 그녀가 왜 수련에서 부족하다고 말했을까? 보고 말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가? 이런 자아와 다른 사람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래도 작지 않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매 수련자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자기 수련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매 사람은 이런 방면에서도 마땅히 명백해야 한다.”[1]

많은 일에서 다른 수련생의 부족함을 보면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많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수련을 이렇게 잘못할까? 지적해줘야 하는데… 바로 이럴 때 자신을 수련해야 하는 시기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자신도 유사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이 일을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 자기는 남보다 수련을 잘했다고 느낀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좌우지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아야 빨리 수련할 수 있다. 서둘러 남의 결점을 지적하지 말고 이지적으로 자신을 돌이켜 보며 사소한 부분도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관용과 자비로 조금씩 수련해 나가야 한다.

약간의 사소한 체득을 교류합니다.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 설법-2007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8년 8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24/3728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