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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본질’에 대한 옅은 깨달음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아이들의 여름방학 시간을 이용하여 우리 수련생 몇 명은 체계적으로 사부님의 해외설법을 배우기로 했다.

어느 하루, 나는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했다. “당신이 오로지 대법을 얻었다면 당신의 병은 나을 수 있다. 하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 대법의 요구에 따라 수련하려고 하지 않고 수련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그는 오로지 병을 제거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엄숙한 대법을 그에게 전해주었는데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럼 그도 알았다. 오, 내가 오로지 병 치료를 말하지 않고 사부님을 찾아가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사부님께서 꼭 나를 잘 치료해 줄 것이다. 당신이 보라.그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고 그는 심지어 누구와도 병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긴 시간이 지났는데 그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내가 오로지 연공하기만 하면 때가 되면 사부님은 꼭 나를 치료해 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곧 그렇게 조그마한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고, 곧 그렇게 조그마한 차이가 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진정한 본질이라, 그는 여전히 그의 병을 치료하려고 생각하고 있다.”[1]

나는 이 문제가 당시 대법제자 수련 중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그럼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서 잘 수련하였는가? 나는 자신의 수련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놀라운 발견을 했다. 나는 많은 문제에서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나의 본질이 아니었다.

중공의 박해로 회사는 무리하게 나를 공직에서 면직시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하여 나와 아내(수련생)는 자신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매점을 차렸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자주 차를 몰고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하고 있어 매점 개업이 마치 사람을 구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당시 수련생과의 교류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매우 급한 일이므로 오직 우리가 대법과 사람을 구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는다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잘 배치해 줄 것이고 매점 영업도 잘 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런 인식하에서 우리는 매일 반나절은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하고, 반나절은 영업을 했다. 속인은 우리가 이렇게 영업을 하자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대법을 첫 자리에 놓았으므로 사부님께서 반드시 가장 짧은 시간에 우리가 더욱 많은 돈을 벌게 해주시고 시간을 내어 더욱 많은 사람을 구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우리 매점은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매점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이 일에 대해 아주 곤혹스러웠지만 자신이 반드시 어디에서 법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을 배우고 명백해졌다. 내가 매점을 차린 목적은 자기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또 대법제자가 응당 해야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줄곧 나의 생활문제를 내려놓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대법을 첫자리에 놓은 것 같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생활문제를 전혀 내려놓지 못했다. 내가 대법을 첫자리에 놓기만 하면 나의 생활은 사부님께서 관여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생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병이 있는 수련생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슨 구별이 있는가? 나는 표면적으로 말을 잘하지만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그만 차이가 바로 나의 본질인 것이다. 전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해내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아직 속인의 상태에 부합되어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극단으로 간 것이다.

많은 문제에서 모두 이런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예를 들면 법공부를 할 때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이 법공부하여 법리를 깨달으면 매우 조급해 한다. 수련생은 그와의 교류에서 당신이 법공부를 할 때 법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구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법공부를 해야 법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기억하라.구함이 없어야만 스스로 얻게 된다.”[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볼 수 있을 때에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나에게 법리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해 어떤 수련생은 곤혹스러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가 보건대 그가 법리를 보려는 구하는 마음을 전혀 버리지 않고 게다가 더욱 깊이 감추고 있었는데 어찌 법리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렇게 조그만 차이가 바로 본질인데 그가 걸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병업 문제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병업이 있는 수련생 본인도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나는 반드시 안으로 찾고 자신의 사람마음을 찾으면 사부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많은 마음을 찾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미 안으로 찾았고 이런 마음을 찾았으니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관여할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도 호전 되지 않자 그는 동요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대법을 의심하는데 이때 병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 그는 사부님께 그의 병을 치료해달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전혀 버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여전히 그의 병업 문제를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는데 사부님께서 어떻게 그를 관여하실 수 있는가? 그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안으로 찾는 것은 어찌 대법수련 중에서 안으로 찾는 것과 같을 수 있는가? 집착심을 건드릴 수 있는가?전혀 건드릴 수 없다. 진정으로 안에서 찾아야 법리가 보인다.

또 병업 중의 수련생을 도와줄 때 우리 대다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개변하려는 마음과 병업 수련생의 병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나는 그런 수련생들이 병업 수련생 앞에서 늘 당신은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수련생과 법리상에서 교류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병업 수련생이 하루빨리 병업 마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근본적으로 수련생의 병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모두 병업 수련생을 개변시키려고 하지 자신을 개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모두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개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련생들의 병업 문제에 관한 교류 체험이 갈수록 많아짐에 따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마치 명백해진 것 같지만 병업 수련생의 표현은 우리를 수련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자신을 찾아야 병업 수련생도 좋아질 수 있다. 우리가 병업 수련생을 개변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오직 자신을 찾고 잘 닦아야 수련생의 병업도 좋아질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찾고 자신을 수련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한번 보자. 여전히 수련생의 병업을 호전시키고 수련생을 개변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때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는 것이 모두 가짜로 한 것이 아니었던가? 순정하게 자신을 개변하는 수련을 진정하게 하였던가? 우리가 그래도 그렇게 조그만 차이가 났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 아닌가!

나는 우리가 병업 수련생을 도와주는 기점을 병업 문제 해결에 놓지 말고 수련생들의 정체 제고에 놓아 정체적으로 대법 중에서 승화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병업 수련생도 포함해서이다. 우리는 수련하고 대법에 동화되려고 온 것이지 무슨 수련중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온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모두 이런 순정한 심태로 자신을 닦고 정체적으로 법에서 제고되고, 전혀 병업 여부에 고려하지 않고, 그것이 존재하든지 말든지 우리가 전혀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그런 상태가 있을 수 있는지 당신은 생각해보라.

정법 수련은 이미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모두 이렇게 오래 수련을 했으므로 원만에 집착하는 마음도 응당 제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 중에서 아직도 일부 수련생들이 원만에 집착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런 집착은 별로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우리 수련생들은 매일 바삐 보내면서 모두 세 가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부님의 법에서 세 가지 일을 잘해야만 원만할 수 있고,잘하지 못하면 원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수련생은 세 가지 일만 잘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때가 되어 반드시 원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일 시간을 다그쳐서 최선을 다하여 세 가지 일을 한다.다른 수련생이 원만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는 아직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면서 세 가지 일을 모두 한다면 사부님께서 당신을 원만시켜주지 않겠는가고 말한다. 그럼 그가 원만에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했는가? 전혀 제거하지 못했다.그가 세 가지 일을 하는 목적은 역시 자신의 원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가? 바꾸어 말하면 원만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의 세 가지 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수련이 아니고 더욱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그렇다면 원만에 집착하는 것은 집착이 아닌가? 역시 사람의 마음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처가 원만에 집착할 수 있는가? 사실 진정으로 원만에 접근한 수련자는 이 마음이 없다.”[4]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재 나의 수련 경지에서 나의 인식을 말해보겠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므로 法輪(파룬),그가 안으로 돌 때는 자신을 제도하고, 밖으로 돌 때는 남을 제도할 수 있다.”[5]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대법제자는 정법 수련 중에서 바로 안으로 자신을 잘 수련하여 대법에 동화되고,밖에서 다른 사람을 선의적으로 도와주어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생명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모두 이 본질에 의거해서 해야 한다. 병업이 어떠하든지,납치되어 박해가 어떠하든지, 수련생지간의 갈등에 의견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이 내재적인 주선(主線)을 바로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외부에서 다양한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이 주선에서 벗어나지 말고 부정적인 그 어떤 것도 모두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부정적인 모든 것을 모두 바르게 잡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대법과 대법 입자가 드러나고, 우리의 진정한 자신과 진정한 본질이 드러난다.

나는 나 본인을 포함한 일부 수련생들에게 이러한 수련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어떤 말은 좀 과격하게 했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가 진정하게 대법에 동화되어 사명을 완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장애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좀 급하여 말이 적절치 못한 곳도 있을 수 있으니 수련생들의 양해를 바란다. 나는 다만 조금 써내어 여러분들의 훌륭한 의견을 수렴하여 수련생들이 더욱 좋은 인식으로 정체적으로 제고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위대한 사명을 완성하기 바란다.

현 단계 개인의 약간의 인식인바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유럽법회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정진요지-법을 배우다‘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2-슬퍼하지 말라’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8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10/3722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