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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게 놀아라’는 과학의 오류

글/ 독일 서양인 파룬궁 수련생

[밍후이왕] 며칠 전, 우리 법공부팀에 신수련생이 왔다. 그녀는 그녀의 많은 경험을 말했다. 정말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3개월 있다가 그 지역 차이나타운의 파룬궁 수련생과 한동안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이런 작은 마을에 파룬따파 수련생이 있다는 것에 놀라며 쉴 새 없이 말했다.

나는 정말로 좀 반감이 생겼다. 얼마 후 나는 그녀가 나의 거울 같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는 내 집착심을 반영했다.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하기 바란다. 나는 그녀와 같다. 늘 사람의 관념으로 구실을 찾아 안일을 추구하고 혹은 자신의 잘못을 위해 변명한다. 그녀는 대법을 배운 후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물었다. 들으면 마치 “만약 내가 대법을 배우면 나는 어떤 것을 얻나요? 만약 노력해 ‘전법륜‘을 보면 나는 어떤 수확이 있나요?”와 같았다. 사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반영했다.

그날 밤 나는 밍후이왕에서 수련교류 문장을 읽었다. 그중 수련생이 자신의 법공부 동기를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 뜻은 우리는 마땅히 왜 수련하는지 생각해야 하고 ‘전법륜’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고 자세하게 자신이 수련하는 원인을 분석했다. 특히 대략 3, 4개월 이래 나는 다른 사람처럼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지 못하고 줄곧 7, 8시에 일어났다. 나는 자신의 집착심이 이미 2개월이 됐는데 여전히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사실, 내가 대법 수련을 한 것은 이런 지식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외 나는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이런 것은 일종 이기적인 생각이고 법공부를 할 때 강한 목적성을 지니게 한다. 그 외 이런 집착심이 숨어있는데 법공부를 하면 신체가 더욱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법을 더욱 많이 알고 싶어 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좋은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집착심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구하는 마음을 지니고 법공부를 하면 안 된다. 엄중하게 말하면 이것은 좀 기만적인 마음이다. 이러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를 가르칠 때, 어른은 흔히 그가 장래 속인사회 중에서 발붙일 곳이 있도록 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너는 좀 약게 놀아라.’라고 가르친다. ‘약다’는 것은 우리 이 우주 중에서 볼 때 이미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고 개인의 이익을 담담히 보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약은 것은 바로 개인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서다. ‘누가 널 괴롭히면 너는 그의 선생님을 찾고 그의 부모를 찾아라.’, ‘돈을 보거든 주워라.’ 바로 이렇게 그를 가르친다.”[1]

어릴 때부터 가족은 나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교육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자란 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또 이렇게 교육받았다. 모종의 방식으로 일을 하면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사유 방식으로 대법 수련을 대했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약게’ 훈련됐고 또 타인을 원망하곤 했다. 내가 이것으로 법을 대하면 나는 약은가 아니면 바보인가?

사부님께서는 1996년 시드니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현재 이 과학, 그것은 신(神)의 존재를 실증하지 못하고 다른 공간의 존재를 실증하지 못한다. 그는 다른 공간의 생명과 물질존재의 형식을 보아내지 못하고, 그는 또 인류 도덕이란 이런 물질이 사람 신체에서 체현되고 있음을 모르며, 그는 또 인류 업력(業力)이란 이런 물질이 인체주위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현대 과학을 믿고 있으나 현대 과학은 이런 것을 실증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도덕이라든가 착하고 악한 일 등 과학 이외의 것을 담론하기만 하면 모두 미신이라고 여기는데, 실제로 현대 과학이라는 이 몽둥이를 휘둘러 우리 인류의 가장 본질적인 것-인류의 도덕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것이 아닌가? 과학은 德(더)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또 실증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신이라고 했다.”[2] 내가 대법을 초기에 배우던 시기 나는 의식했다. ‘나는 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 몽둥이가 바로 과학이다.’

나는 동유럽에서 자랐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1991년 나는 학업을 끝내고 한동안 우리는 많은 초조함을 경험했다. 한 사람이 정확한 단어 혹은 정확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면 우둔하거나 혹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갖은 방법으로 잘하려 했고 적당한 시기 ‘그렇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배웠다. 나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좋고 나쁨을 평가하지 않았다. 나는 과학이 영원히 틀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적이며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이 점을 인식한 적이 없으며 학식과 사물을 추리하는 능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더욱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며 이렇게 나의 지혜는 인정을 받았다. 나는 책을 더 많이 읽으면서 더욱 연구하고 과학 보고서를 한 부 쓰고 또 새로운 정의를 공부했다. 나의 지식수준은 향상되었지만 원래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렸다. 줄곧 어느 날까지 나는 진정한 자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의 인생관이 변화됐다. 하지만 나의 세계관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다. 수련인으로서 반드시 법공부를 잘 배워야 하고 자연스럽게 따라 가야 하며 사람의 관념을 포기해야 한다. 법이야말로 일체 표준을 가늠하는데 과학 혹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던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다’에 대한 인식은 틀렸다. 내가 전에 인식한 ‘자연의 규칙에 준수’의 뜻은 우리가 앞에 펼쳐진 길에 따라 가는 것뿐이다. 내가 젊었을 때 배운 교육에서 ‘자연’의 뜻은 필연적인 방식이자 현대과학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법의 각도에서 보면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뜻은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위해 고생하고 업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과거 간단한 생활방식은 법에서 빗나간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의 과거에 ‘자연’은 우리 지금의 생활이고 생명의 과정을 더욱 멀리 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과학의 오류를 인식하고 아침에 일어나 연공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8년 8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5/3720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