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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박해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 수련생은 몇 년간 줄곧 병업 가상 상태에 처해 있었고 저는 그가 이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늘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의 고난이 박해 초기에 대법제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구세력에게 빌미를 잡혀 조성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했던 일체 대법에 부합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여태껏 진정으로 법에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예전의 ‘문화대혁명’ 당시 각종 공산당 운동처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 몇 명 수련생은 또 함께 그의 병업 문제에 대해 교류했습니다. 저는 그가 사부님 말씀 혹은 수련생의 교류 문장 중의 말로 변명하면서 병업 문제가 나타난 근본 원인을 보호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문화대혁명’ 시기 각종 운동을 대하듯 자신이 상처받지 않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그에게 문제가 나타난 원인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는 일정한 지식을 가진 노인이었고 자본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공산당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한 번도 투쟁당하지 않았고 심지어 공산당의 혁명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정리하면서 늘 그가 공산당을 농락했다고 말했습니다.

법공부를 하고 ‘9평공산당’,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과 ‘악마가 우리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를 읽은 후 저는 그가 공산당을 농락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아주 은폐된 방식으로 그를 농락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공산당은 강제적인 ‘독재’ 방식으로 그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박해를 피하는 중에서 자기도 모르게 공산당이 원하는 그런 음흉하고 교활하며 간사한 생명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이런 은폐된 방식으로 생명을 유린하고 박해하는 수단은 더욱 사악합니다. 사악은 당신에게 자아도취 속에서 자발적으로 이런 박해를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공산당이 원하는 변이된 생명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육체적으로 고통 받지 않았기에 심지어 공산당에 대해 조그마한 호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바로 운동 중에서 형성된 구호를 외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간사하고 교활하고 음흉한 당문화 요소가 수련과 대법에 대한 그의 인식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박해 전에 그는 법공부를 할 때 횟수를 세고 표면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홍법할 때 거창하게 했고 안으로 찾을 줄 몰랐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그런 교활하고 간사한 방법으로 박해 고비를 넘겼고 정법 수련에서의 박해를 정치운동으로 여겼습니다. 예전에 ‘문화대혁명’ 중의 운동을 대처하던 방식으로 수련 중의 고난을 넘으려 했으니 어찌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수련생의 문제를 보고 저는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줄곧 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공산당의 ‘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았기에 그런 간사한 심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제가 진정으로 관을 넘었다고 생각했던 고비를 되돌아보니 놀랍게도 모두 이런 간사한 방식으로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실은 전혀 넘어가지 못하고 줄곧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을 때 저는 사악이 또 파룬궁 수련자를 전향시키고 박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때 가족이 면회하러 왔을 때 저는 연극하는 것처럼 자신이 생명에 대해 그 어떤 미련도 없고 오직 아이만 걱정됐기에 유일한 희망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당시 정말 아주 괴로운 듯 눈물까지 흘리면서 생사이별처럼 표현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자살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면회가 끝난 후 가족들은 저의 ‘상황’을 교도소 상사에게 보고했고 경찰은 의외의 일이 발생할까 봐 일부러 수감자를 파견해 저를 지키고 위로해주었습니다. 또한 그때 경찰도 저를 박해하지 않았기에 속으로 박해를 피하고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서야 공산당의 간사한 생각이 당시의 저 자신을 지배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박해받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미 박해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고비에서 저는 변이된 공산당의 간사한 마음으로 대했기에 수련자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미 떨어졌습니다. 사실 사악이 직접적으로 당신을 박해하는 목적은 당신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이고, 이 문제에서 직접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지만 더욱 은폐되고 사악한 수단으로 여전히 그들의 목적에 도달했습니다. 동시에 당신에게 알아채지 못하고 스스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법제자에 대해 이보다 더 사악한 박해 수단이 있겠습니까?

저의 세대는 ‘문화대혁명’과 각종 공산당의 운동을 겪지 않았기에 공산당 문화의 교활하고 간사한 사유방식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공산당 사회에서 생존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모두 공산당의 이러한 당문화 속에서 변이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문화가 바로 이러한 사악한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폭력을 숭상하고 교활하고 간사하며 음흉한 변이된 생명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러한 변이된 당문화 사유는 줄곧 우리 수련에서 나쁜 작용을 일으키고 있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다시 자신의 수련을 심사해보고, 세 가지 일을 할 때의 기점을 심사해보니 많은 경우에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임무를 완성하듯이 하거나 자신의 수련을 수호하기 위해 했었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간사한 마음으로 엄숙한 수련과 성스러운 중생구도를 대했으니 이는 내심에서 이 사악한 것을 고집하고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거짓 수련이 아닙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정말 너무 놀랐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저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일부 집착심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늘 미적지근해 가슴을 도려내는 그러한 느낌이 없었지만 대부분 스스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방과 논쟁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그건 자신을 기만하고 남을 속이는 것이며 간사한 심리로 안으로 찾는 것을 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치 당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누군가 잘못했다고 지적해주면 겉으로는 바로 미안하다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은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안으로 찾는 것은 은폐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자신이 수련할 줄 안다고 생각했으니 이건 스스로 자신의 수련의 길을 파괴한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사악하고 은폐된 박해수단입니까? 이건 사악한 구세력의 다른 한 가지 더욱 사악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든 물질에 모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집착심도 역시 이러한데 당신이 진정으로 안으로 찾을 때, 그것을 닦아버리려 할 때 그것은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때 당신은 가슴을 도려내는 느낌이 들것인데 그러한 괴로움은 그것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고, 그것을 떼어낼 때 당신이 느끼는 고통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하거나 닦아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즉 그것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당신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 이 속인의 손은 그것을 건드리지 못하는데, 당신이 거기에서 헛손질을 하면 그것은 당신을 상관하지도 않고 또 잡으려 헛손질하는 것이 매우 가소롭다고 그것은 뒤에서 당신을 비웃으며 당신이 만약 정말로 그것을 건드린다면 그것은 즉시 당신의 손을 상하게 하는데, 그건 정말로 상하는 것이다!”[1]와 같습니다.

수련이란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생명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일체 집착의 근본은 모두 사심(私)·자아(我)에서 비롯됩니다. 오직 사심·자아를 닦아버려야 표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만 개념적인 인식일 뿐 법에서 이 경지의 인식까지 수련해 올라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심·자아를 덮어 감추려는 변이된 당문화 사유도 인식하지 못하고 닦아버리지 못했으니 어찌 사심·자아를 닦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건 다만 구호 또는 우스운 이야기에 불과한데 제가 그 사심·자아를 전혀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대법 속에서 착실히 자신을 수련하고 사람 마음을 하나씩 닦아버리며 사심·자아를 덮어 감추려는 모든 사람 마음을 닦아버려야 그 사심·자아의 진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래야 당신은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하고 똑똑히 분간하며 닦아버릴 수 있습니다. 평소의 착실한 기초가 없이 사심·자아를 닦아버리려 하고, 지름길을 찾으려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로서 그건 자신을 기만하고 남을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련은 한 층 한 층 집착을 버리고 조금도 남김없이 내심으로 자신을 개변해야 비로소 진정한 제고를 할 수 있습니다. 절대 실제에 맞지 않게 높은 이상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일부 인식으로서 법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7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7/26/3715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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