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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병력 여부 논쟁에서 안으로 수련하지 않는 위험성을 보다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몇 년 동안 허베이성 모 시에서 모 수련생의 정신 병력 여부에 관해 논쟁과 갈등이 발생했다. 당사자는 협조인 수련생이다. 일부 수련생들은 그가 정신 병력이 없는데(그 본인도 이렇게 생각함) 그가 정신 병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협조인과 논쟁을 벌여 이런 방식으로 그가 협조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일부 수련생들은 그가 정신 병력이 있기에 사부님의 법에 따라 집에서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법을 얻기 전에 정신 병력이 있던 사람이라면 집에서 수련해도 된다.”[1] “정신 병력이 있는 수련생은 배후에서 무엇을 하면 되며, 진상을 알리는 일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1]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다시 협조에 참여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갈등은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여러 번 교류하여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市)의 정체에 파동과 간격을 일으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세 가지 일에 영향이 미칠까봐 이 화제를 더 이상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이렇게 방치되고 은폐되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정신 병력 여부 문제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에서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 신수련생에게 정신 병력이 있는지, 그의 가족에게 정신 병력이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사부: 이것은 병원에서도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2]

필자는 수련의 각도에서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모 시에서 왜 정신 병력 여부 논쟁이 발생했을까? 이 문제가 발생한 의도는 무엇일까? 우연일까? 왜 이렇게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까? 이 문제에서 우리가 옳고 그름을 논쟁해야 할까?

이 문제를 똑똑히 이해하려면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각도를 바꾸어서 인식해야 한다. 현재 개인수련 층차에서 나는 이 문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발생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를 수련하게 하는 것이라는 걸 많은 수련생들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확산시키는 것이지 정신 병력 여부와 옳고 그름을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나 깨닫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옳든 그르든, 이 문제는 한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논쟁하고 논쟁하지 말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강조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줄곧 자신이 옳다고 강조하는데, 당신이 옳았고 당신이 잘못이 없다 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법에서 제고했는가? 사람의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이 자체가 바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속인의 이치로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볼 때 세간에서 한 수련인의 옳고 그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수련 중에서 당신이 어떻게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가가 비로소 중요한 것이다.”[3]라고 말씀하셨다.

소용돌이에 깊이 빠진 나는 당시 이 문제에서 표현이 비교적 두드러졌다. 모 수련생이 정신 병력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껴 인터넷과 수련생에게서 증거를 찾고 또 관련된 사부님의 설법을 검색하였는데 정말로 다른 사람을 수련시키고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자세였다. 법공부 교류회에서 또 아주 강한 발언으로 탁상공론을 늘어놓고,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증명하면서 자기가 말한 것이 어떻게 맞으며, 어떻게 법에 부합된다는 것을 실증하고,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법에 있지 않는지를 반박하였는데 완전히 당문화 방식이었다. 회의 후 어떤 수련생은 “이것은 어쩐지 비판 대회를 여는 것 같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또 어떤 수련생은 나에게 문제를 지적해 주었는데 여전히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신 병력에 관한 사부님의 설법을 인용할 때 그 수련생은 “당신은 사부님의 법으로 나를 제압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듣고 나서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법이 틀릴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가 왜 이렇게 말할까? 후에 반복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했다. 만약 나의 언행이 법에 부합된다면 그 수련생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나의 문제일 것이다. 자신은 수련인이기에 오직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해서 자신한테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한 수련자로서 닦는 것은 자신을 닦는 것이다. 대법제자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며, 대법제자 내부에서 오는 모순과 압력도 마찬가지로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다.”, “수련자는 영원히 자신을 닦는 것으로, 사람마음의 자그마한 변화가 곧 제고이며, 뭇 신들이 다 볼 수 있다.”[4]라고 말씀하셨다.

법공부를 통해 안에서 찾았다. 사부님은 내가 진심으로 수련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시고 나를 점오해주어 나는 자신의 수많은 집착심을 찾았다.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 늘 자신이 깨달은 것이 옳다고 느끼는 마음, 말재주와 글재주를 과시하는 마음, 수련생을 업신여기는 질투심, 당문화 중의 쟁투심, 사부님의 법을 논거로 이용하였으므로 사부님과 법을 존경하지 않는 마음 등이다. 이렇게 많은 집착심을 찾자 정말로 너무 놀랐다! 어쩐지 수련생이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내가 말한 매 한 글자의 배후에는 모두 강대한 집착이 있었고 수련생은 이런 집착을 느꼈기 때문에 나의 표면적인 말이 아무리 이치가 있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수련생이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런 집착의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부 수련생 중에 이런 말이 유행되었다. “모모와 교류할 방법이 없고 소통할 방법이 없다.” 나도 원래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이 말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이 말의 기점은 교류를 통해 자기의 인식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고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통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류하고 소통할 방법이 없는 이유를 다른 사람한테 귀결시킨다. 이것은 밖을 향해 찾는 것이다. 진정한 토론과 교류는 마음이 평온하고 온화하게 각자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의 견해를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아 소통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 더 이상 소통이 안 된다. 이 문제는 이렇게 지연되어 후에 일부 시(市)와 현(縣)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한말은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매우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내가 사부님의 법으로 그에게 압력을 가해서 소통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가 아닌가? 말하기 시작하면 모두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일단 구체적인 일에 부딪히면 생각하지 못하거나 이행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이 문제가 발생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다. 수련생의 말을 얼핏 들으면 이치가 있다고 느껴 곧 그를 따르면서 대법으로 이치 여부를 가늠하지 않는다. 수련생의 말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그 자신의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가 아무리 수련을 잘하고 지식수준이 높고 협조인이라도 모두 그 자신의 인식이기에 그것으로 수련을 지도해서는 안 된다. 이 몇 년 동안 이 시에서 연설로 난법(亂法)하고, 션윈(神韻)을 중국으로 오는 것을 맞이하여 서명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이 그중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원인은 수련생에 대한 정(情)이다. 사악이 이렇게 오랫동안 박해하고 있는 간고한 환경 하에서 많은 수련생들은 함께 법공부 하고 세 가지 일을 하였다. 또 일과 살림, 바른 일을 할 때에도 모두 함께 하고,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면서 비바람 속에서 가장 어려운 세월을 함께 지내왔는데 참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일이 지나자 일부 수련생들 중에는 속인의 정이 섞여 들어와 수련생간의 관계가 그다지 순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일에서 법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을 수호하였다. 수련생간의 정도 역시 정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시에서 수련생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또 일부는 병업관에 처해있고, 또 체포되고 판결 받는 등 대면적으로 교란을 받는 박해 사건이 발생했다. 개인수련 요소 외에 또 관련이 있는 것은 정체적으로 간격이 있고,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았으며,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긴 것이다. 정말로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영향을 받은 수련생들은 다시는 정신 병력 여부 문제에 관해 논쟁하지 말고 수련 제고의 기회로 삼아 얼마 남지 않은 최후의 정법수련 시간에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하고 간격을 돌파해서 이 시에서 하나의 정체를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부님과 층층 공간의 무량한 눈길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만약 연관된 수련생들이 대부분 이 기회를 빌려 진정으로 안에서 찾고, 자신을 닦아 제고해 올라오면 정신 병력 여부 논쟁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옅은 깨달음이고 층차에 제한이 있는바 적절치 못한 것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라며 또 이 문제를 가지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기를 기대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역 설법10-맨해튼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청성(淸醒)’

 

원문발표: 2018년 7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7/28/3715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