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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기 싫어하는 마음속 매듭을 풀다

글/ 미국 동부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존께서 대법제자 간에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법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수련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아무 원망 없이 협력하고, 설령 상대방에게 상처받거나 오해받거나 억압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묵묵히 진심으로 상대와 협력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의 장점으로 협조하고 그를 위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속인들은 건드리지 못하더라도 피하면 된다고 하던가? 수련생 간에도 이런 일이 있다. 서로 원한을 많이 쌓았거나 어느 팀이나 어느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신이 중시 받지 못하거나 비난당할 경우, 적잖은 수련생이 더는 참지 못해 피하고 관여하지 않고 데면데면하는 경우가 있다. 뒤에서 무너뜨릴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적극 협력하지 않고 냉담한 시선으로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많은 수련인이 이처럼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로 스스로를 제약해, 수련도 이 층차에 머물러 장기적으로 배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스스로 고생스러워하면서도 돌파하기 어려워하고 줄곧 튀어나오는 화를 억누르고 있다.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늘 자기도 모르게 어떤 논리를 펴서 명분을 찾고 자신이 맞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사실 정체(整体)의 관점에서 급선무로 돌파가 필요한 것은, 법에서 인식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협력해낼 수 있는가이다.

협력하기 싫어하는 수련생들이 일반적으로 마음에 있는 매듭은 이렇다. ‘내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는데 상대는 미안해하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내가 체면을 버리고 그를 도와서 협조한 항목에 실제로 도움이 됐다. 그런데 공로는 모두 그 또는 협조인이 가져갔고 그들의 덕망이 더 높아져서 나는 아무 힘도 보태지 않은 사람으로 돼버렸다.’ 도대체 어느 각도에서 수련의 이치를 깨닫고 있는지. 어떤 이들은 분명하지가 않다.

여기서 개인적인 인식과 깨달음을 말해보려 한다. 속에 이런 매듭이 있는 수련생에게 도움 되기 바라서다. 일의 성사 여부가 곧 그가 수련한 것인지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 수련한 사람은 일이 더 잘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성사되었어도 그 중의 누군가가 잘 수련해내지 못했을 수 있는 그런 정황도 있다. 이전에 어느 지역에서 여러 가지 항목이 다 잘 진행되고 있어서 많은 수련생들이 칭찬했다. 물론 협조인도 칭찬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꼭 협조인이 잘 수련했다는 뜻인가? 이후에 그는 큰 어려움이 닥치고 심한 병업이 왔고 일부 개인 수련 상의 문제가 폭로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수련생들은 알게 됐다. 그 지역에서 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대법제자들이 서로 진심으로 협력했기 때문이고, 비록 갈등이 있었지만 수련생들이 다 자신을 내려놓고 될수록 협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수련생들은 협조인 때문에 크게 제고할 수 있었지만 정작 협조인 본인은 눈앞의 성과에 빠져 일이 잘 된 것을 자신이 제고한 증거로 여겼고, 마땅히 없애야 할 많은 마음을 방임해 오히려 수련하지 못했으며, 인위적으로 일부 좋지 않은 요소를 만들어내 다른 사람이 수련하게 했다. 하루하루 쌓여 마지막에 갑자기 닥쳤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사상적인 준비도 없어 머릿속이 공백이었다. 지금 보면 예전의 그 광명이란 실로 아득한 일이다.

실례를 들어 무엇이 진정한 협력인지 말해보고자 한 것이다. 협력은 상대와 공동으로 일이 성사되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이 고험 받고 수련하는 기회인 것이며, 타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 수련인으로서 어떠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 소위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을 내려놓고 정말로 원망도 불만도 없이 상대와 협력해야 한다. 사실, 일이 성사되건 성사되지 못하건 신의 눈에는 이 사람이 진정으로 수련하고 있고 제고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결과는 바로 ‘아무것도 그가 수련하는 길을 막을 수 없다’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협력하기 싫어하는 마음이라면 ‘무조건 손해보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눈으로 보면 그 사람은 수련하지 않았고, 한 층차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협조인 자신도 이 과정에서 일이 성사되고 아주 성공적이고 아주 빛나고 영광스러워 보이더라도, 만약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요소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원용하며 지나온 것이라, 신의 관점에서는 일이 성사된 것에 내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고, 협조인은 사실 수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며, 때가 되면 그는 수련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수련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협조를 기꺼이 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협조하고 싶지 않은지는 자기 스스로만 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잘 대하면 협력하기 좋아하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거나 불공정하게 하면 협력을 꺼리거나 비웃는 심리가 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지니고 하는 조건 있는 수련은 어느 한 층차에서 머물며 배회하게 한다. 사실 자신을 보호했다는 것은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와서 온갖 고생을 하며 정법(正法)을 수련하려는 것이 아닌가. 어느 한 층에 머물러있는데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과 같지 않은가.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잘 대하지 않을 때에도 변함없이 자신을 소화상(小和尚) 여기듯 하여, 얼마나 손해를 보건 불공평한 처사를 당하건 털끝만치도 영향 받지 않고 허허 웃으며 협력할 텐데, 그래야 향상이 있을 수 있고 경지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속인 이 쪽에서는 많은 것을 담담하게 볼 것인데, 진짜로 수련하는 점에서 질적인 돌파가 생길 것이다.

수련은 엄숙하고 공평하다. 누가 수련하면 누가 얻고 누가 깨달으면 누가 얻는다. 여러 가지 갈등과 충돌 속에서 하는 수 없이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수련생이 있다면, 협력하기 싫어하고 체면을 차리며 그저 보고만 있는 것보다는 ‘고비를 하나 넘는다’고 생각해 꼭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는 것이 낫다.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으며 개인의 속셈을 깨끗이 버리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팀에 녹아들어야 한다. 환경은 여전히 아주 가혹하고 상대방은 별로 질적인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온 우주가 정시하고 있다. 바로, 당신이 변하고 있고 수련하고 있으며, 내려놓고 있고 제고하고 있고, 진짜로 사부님의 고도(苦度)에 떳떳하고 자신의 중생에게 떳떳하며 자신이 한 만고(萬古)의 서약에 떳떳하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18년 7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7/24/3715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