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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과 인연 맺은 지 20년

글/ 창춘 대법제자

[밍후이왕]

(1)

새해 명절을 앞두고 나는 특별히 이 사진 ‘20년 전 새해에 대만 수련생이 창춘(長春) 문화광장 아침연공에 참가하다’를 선택해 축하 카드 배경으로 사존께 새해 문안 인사를 드렸다.

'图1:二零一八年新年长春大法弟子问候师尊的贺卡'
2018년 새해 창춘 대법제자가 사존께 드리는 카드

대만 수련생과 찍은 몇 장 안 남은 사진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때는 1997년 말, 대만, 인도네시아, 캐나다 등 국가 수련생 83명이 관광단을 이뤄 창춘에 왔다. 나는 접대에 참여했다. 해를 넘기는 이 5일은 잊을 수 없다.

당시 기온은 영하 20여 도인데 그들이 입은 옷은 모두 와이셔츠와 홑바지였다.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매우 흥분했다. 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솜옷, 솜 신을 가져다 그들에게 주었다. 1월 1일 아침, 창춘수련생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문화광장에 가서 연공을 했다. 다른 점이라면 대만 등 해외 수련생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홑 신을 신고 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수련생이 있었지만 1시간 연공을 모두 견지해냈다. 연공 도중에 작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눈은 점점 많이 내렸다. 동전만한 눈꽃이 휘날리더니 재빨리 길 위에 두껍게 한 층 깔렸다. 대만 수련생은 매우 기뻐했다. 아열대 지역에서는 눈을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은 일정이 매우 빡빡하게 배치됐다. 법공부, 연공, 교류. 창춘 수련생의 제1차 법회 동영상을 보았다. 휴일 홍법에 참가하고 사부님께서 법을 전수하신 지린대학 밍팡궁(鳴放宮)을 참관했다. 저녁에는 승리공원 원숭이산 앞에서 가장 일찍 법을 얻은 노수련생이 사부님께서 여기에서 연공하고 공을 전수하신 상황을 말해주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창춘 수련생은 도시락을 준비했다. 수련생들은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객실, 소회의실, 대회의실, 소형, 대형, 단독적, 다양한 형식의 교류를 통해 법을 얻은 경험과 법리의 인식, 고비를 넘던 체험, 돌파 후 느꼈던 고난 속의 광명……, 매일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창춘수련생들이 법을 배우고 외우고 착실하고 고생스럽게 수련한 정신과 법을 전한 열정에 그들은 찬탄했다.

'图2:台湾同修参观吉林大学鸣放宫'
대만 수련생이 지린대학 밍팡궁을 참관하다

'图3:在胜利公园猴山前听老学员讲述师父早期炼功的情景'
승리공원 원숭이산 앞에서 노수련생이 사부님께서 조기에 연공하시던 정경을 이야기하다

1월 3일 우리는 공항에 배웅을 갔다. 국제빌딩에서 시안(西安)대로를 따라 길옆에 한 조 한 조, 한 팀 한 팀의 연공인이 연공하며 홍법(洪法)하고 있었고 ‘파룬따파(法輪大法)’ 현수막이 나무 사이나 길옆에 걸려 있었다. 대법이 창춘에서 전해진 형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대만 수련생이 창춘에 온 걸 모두 신성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경을 얻으러 오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인연을 이었다. 며칠이란 시간에 빨리 익숙해졌고 또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했다.

'图4:长春同修为台湾同修机场送行'
창춘수련생이 공항에서 대만수련생을 배웅하다

1998년 1월 8일 내부 간행물 ‘창춘에서 파룬따파’는 대만 등 해외 파룬따파 공우(功友)가 창춘에 와서 학습, 교류했다고 전했고, 문화광장, 인민광장에서 연공하는 사진을 게재했다.

'图5:《法轮大法在长春》的报道'
‘창춘에서 파룬따파’의 보도

(2)

1998년 대만수련생이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교육계에 종사하는 한 여성 수련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용하고 느긋했는데 말끝을 살짝 늘어뜨린 톤이 매우 듣기 좋았다. 나는 누군가가 농담으로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줄 알고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뜻밖에도 상대방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본론을 말할 때에야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미안해서 재빨리 사과했다. 반복적으로 사과했다. 그때는 그저 지역 차이로 말투가 다르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당문화를 해체하다’를 보고 나서야 의식하게 됐다. 지역 차이만이 아니라 사당(邪黨) 요소 때문에 대륙인들은 말할 때 높은 음성, 강한 말투, 급속하고 과장된 억양으로 끝소리도 딱딱하게 투쟁하는 성분을 갖고 말한다. 그 속에 있으면서 자신은 모르고 있다.

2000년 초, 내가 근무하는 학교와 대만은 양안(兩岸) 수업교류를 가진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기뻤다. 이번에 대만에 가면 그 교육계 수련생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못 가게 했다. 감시 대상이었기에 출입의 자유가 없었다. 동료들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위로해야 할지를 몰랐고, 돌아온 후에 나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대만 대법제자가 연공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보세요, 모두 당신들 사람입니다. 매우 많아요! 다릅니다! 거기는 자유롭습니다.” 나는 몸은 마음대로 못하지만 마음만은 자유로웠다.

‘9평’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저녁, 나는 대만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나에게 진상을 알려주었다. 훙메이(紅梅)라고 했다. 나는 매우 기뻤다. “우리는 한 집안 식구 입니다. 당신이 하는 말을 나는 다 압니다.” 그녀는 멍했다가 재빨리 반응이 왔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동일한 일입니다. 연락처 몇 개 드릴게요. 모두 어려운 번호입니다. 이 분은 지금 바로 전화하십시오. 지금 사무실에 있습니다.” 훙메이는 재빨리 연락처를 적었다. 훙메이에게 지금 바로 전화하라고 한 이는 남편의 친구다. ‘6.4(천안문사건)’ 때 대학교 학생회 회장이었다. ‘6.4’에 참여한 이유로 박해를 당했었고 이 일 때문에 지금껏 아이를 갖지 않았다. 아이도 공산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안 된다면서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공산당을 소멸하려 했다. 그리하여 아무리 설득해도 탈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 난제를 훙메이에게 넘겼다.

이튿날 아침 출근해서 그의 사무실로 갔다. 문에 들어서자 그는 팔을 높이 쳐들고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H선생님, 어제 저녁에 대만의 훙메이 여사가 저에게 전화해서 반시간 넘게 얘기 했습니다. 저는 탈당했어요!” 아, 정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이 생명이 드디어 구원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훙메이의 지혜에 탄복했다. 30분 만에 고집스러운 생명을 구하다니 정말 대단했다!

몇 년 전 어느 날 시장에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내 팔을 덥석 붙잡고 흥분해서 말했다. “제가 대만에 여행을 갔는데 관광명소마다 파룬궁이 있어요. 큰 전시판, 큰 사진, (박해당하는 장면은) 피가 낭자했어요. 생체장기적출은 당신이 말한 것과 같았어요. 모두 진짜에요! 너무 무서워요!” 그녀는 이미 ‘삼퇴’했다. 내가 몇 가지 사례를 더 보충하자 그녀는 더욱 믿었다. 그녀의 친척이 바로 노동수용소의 감옥경찰이었다. 내가 감금될 때 그녀의 친척 아이에게 강의도 해주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친척에게 알려주라고 당부했다. 부디 사당에서 탈퇴하고 나쁜 일을 하면 안 되며 파룬궁을 박해하면 안 된다고. 그녀는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3)

금년, 2018년 역시 기연(機緣)일 것이다. 나는 드디어 대만에 갈 수 있었다. 가기 전에 대만에 간 적이 있는 수련생에게 물었다. 그는 말했다. “가서 보십시오, 스스로 체험하시고요. 뭐든 다 다릅니다.”

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곧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에서, 음식점에서, 버스에서,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편의를 봐 주었다. 물론 사소한 내용이지만 공중화장실에 구급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뜻밖의 사고가 난 사람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곳곳에서 조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는 자유세계다! 내 정신은 단번에 속박을 풀었다. 더없이 홀가분했다!

관광차가 고속도로에 올랐다. 수시로 도로 옆에 있는 높고 큰 간판을 볼 수 있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모든 명소에 모두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전시판이 있고 친절하고 감동적이었다.

'图6:日月潭玄光寺前的真相展板'
일월담(日月潭) 현광사(玄光寺) 앞 진상 전시판

일월담(日月潭)은 시내와 멀었다. 대만 수련생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부근에서 셋집을 얻고 돌아가며 여기에서 진상을 알린다고. 비가 내리면 고궁(故宮) 문 앞의 수련생은 비옷을 입고 빗속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림관저(士林官邸) 문 앞 수련생은 빗속에서 전시판을 들고 한 번 또 한 번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왼다. 게다가 관광지 수련생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에야 법을 얻어 단번에 법을 실증하는 행렬에 뛰어 들었다. 존경스러웠다! 중정(中正)기념당 정문 수련생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바로 여기, 자유광장에서 인각을 했다고 했다. 시간이 나면 우리는 명소 수련생과 잠깐 교류하고 시간이 없으면 합장해 우리도 대법제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점심에 관광지 수련생은 길옆에 앉아 발정념을 했다. 그렇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와중에 위엄이 배어나왔다. 관광객은 그들 옆에서 지나갔다. 이 광경을 보자 귓전에 그 노래가사가 들려왔다. “그들은 유일하게 중생을 이끌고 천문(天門)을 돌파할 미래의 왕이다!”

일월담, 너무 아름다웠다! 하늘은 푸르고 물은 쪽빛이었다. 벚꽃은 분홍색이다. “맑은 호수에 노을빛 아름답게 비껴드누나 몸은 난세 속에 있나니 홀로 아름답기 참으로 어렵도다”[1] 1997년 11월 17일 사부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시 ‘일월담을 거닐며’를 쓰셨다. 듣기로 사부님께서는 대만에 오셔서 섬을 한 바퀴 돌면서 대만의 환경을 정화해주셨다고 했다. 다른 공간의 교란을 처리하고 일체를 평형 시키셨다. 법을 전한 초기에 사부님께서 창춘을 몇 바퀴 도시면서 환경을 정화하셨다. 대법제자가 마음 놓고 수련할 수 있게 했다. 나는 현광사 앞에서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 일월담에 오셔서 어디에서 묵으셨나요? 그들은 머리를 흔든다. 그렇다. 사부님께서는 조용히 오셨다가 조용히 가셨다. 수련생을 놀라게 하지 않으셨다. 아는 이는 수행한 몇 명뿐이었다. 사부님께서 여기에서 대만의 생태명맥을 보존하시고 신전(神傳)문화의 뿌리도 보전하셨다.

현광사 앞에 큰 바위가 있는데 ‘천추고려(千秋苦旅)’가 조각되어 있다. 산꼭대기는 현장사(玄奘寺)이고 현장법사의 두개골 사리를 모시고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꼬불꼬불한 산길에 청죽이 우뚝 솟아있다. 산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고, 산길이 얼마나 먼지 모르며, 계단이 얼마 있는지 모른다. 오르자! 반드시 오르자! 수풀이 깊숙한 곳에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고 산바람이 불어오니 매우 상쾌했다. 그윽한 오솔길은 꾸불꾸불했다. 산간에는 이름 모를 나무와 화초가 가득했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다.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산길이 점점 가파르고 계단도 점점 높아졌다. 숨이 가쁘고 비지땀이 줄줄 흘렀다. 산은 높지도 않고 길도 멀지 않았는데 그날은 다리가 아파서 힘이 들었다.

박해 후 지금까지를 회고하니 여러 차례 감금당하고 업무나 월급 지급을 정지당하고, 아이를 학교에 못 다니게 하고, 남편 회사는 핍박에 문을 닫고, 어머니는 자녀들이 여러 차례 박해 당하는 중에 공포로 돌아가시고, 가족 여러 명이 우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악은 끊임없이 내 신체를 박해하고 여러 차례 육신을 사망의 궁지로 내몰았다. 그러나 나는 모두 지나왔다. 사부님의 가호 하에 모두 지나왔다. 나는 사부님의 시 ‘태산(泰山)에 올라’를 묵념하면서 힘겹게 매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를 들고 오르며 똑바로 섰다.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오르자! ‘고해(苦海)’인줄 알면서 스스로 오려 했다. 길은 한 갈래뿐이고 선택도 하나뿐이다. 오르자! 현장(玄奘)의 길, 신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산꼭대기에 당나라식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했다. 현장의 두개골 사리는 3층 큰 구리 탑 속에 봉인되어 있다. 사리는 맑고 윤기가 흘렀으며 알알이 영롱하고 광채가 났다.

10여 년간의 션윈(神韻) 공연 속에는 해마다 삼장(현장)법사가 서천에 불경을 구하러 간 이야기가 있다. 무대 예술을 통해 불경을 구하던 어려움과 곡절, 수행의 의지와 지혜, 항마의 법력, 사람을 구하는 자비로움 …… 모든 것이 그 속에 있었다. 오늘날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것도 역시 이러하지 않은가!

‘천추고려(千秋苦旅)’라, 억만 년의 고행이다! ‘고려’가 끝나면 비춰지는 것은 명호(明湖)의 일월 빛이다.

마지막에 고궁박물관을 관람했다. 우리는 매 하나의 문물을 멍하니(홀린 듯) 바라보았다. 눈은 전시창→장유리에 거의 닿았다. “와! 이렇게 대범하고 이렇게 섬세하다니!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거야?” 자세히 볼 새도 없이 얼른 사진 찍었다. 떠나기 싫었고 좀 더 보고 싶었다. 우리는 맨 나중에 나왔다. 대만 수련생의 말에 의하면 당시 사부님께서 대만에 오셨을 때 고궁박물관에도 들르셨다고 했다. 해설자가 없이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에게 이런 문물의 유래, 애초 제작할 때의 작용 및 어떻게 감상하는지 등등을 해설해 주셨다. 사부님 외에 누가 똑똑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베이징 자금성에서 대만으로 인도하여 전란(戰亂)과 사당의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몇 천 년 문화를 남겨두기 위해 배치하신 것이다!

(4)

타이중(臺中)을 떠날 때 우리는 우펑눙궁(霧峰農工)에 갔다. 97년도에 사부님께서 대만에 오셨을 때 바로 여기에서 설법하셨다. 교정은 조용했다. 곧고 크게 자란 대추야자 나무가 교원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다. 사부님께서는 어느 강당에서 설법하셨을까? 성지 순례다. 그 해 대만 수련생이 지린대학 밍팡궁을 참관할 때와 똑같은 마음이다. 신성했다!

우리는 일찌감치 국부(國父-쑨원, 손중산) 기념당에 도착했다. 션윈(神韻)을 보러 왔다! 국부기념당 계단에 오르면서 마음은 성지를 순례하는 것 같았다. 공연 시간이 좀 남았다. 대만 수련생들은 단정한 복장으로 문 앞에서 바쁘다. 한 남자 수련생이 홀에서 큰 꽃바구니를 몇 개 꺼내 정문 출입문 앞에 배열해 놓았다. 순간 눈앞에 나타난 일체는 마치 20년 전 같았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 창춘 샹그리라(香格裏拉)에서 창춘 보도원들에게 설법하셨다. 우리는 회의장을 장식했는데 역시 이렇게 큰 꽃바구니이고 역시 남자 수련생이었다. 한 바구니 한 바구니 로비에서부터 무대까지 배열했다. 사부님께서 오시기만 기다렸다. 똑같은 장면이 재현되자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내렸다. 목이 메었다. 동행한 수련생이 “왜 그래요?”라고 물었고 나는 흐느끼면서 떠오른 예전 상황을 말해주었다. 동행한 수련생도 울고 대만 수련생도 울었다.


공연장 문 앞에 대만 정치인들이 보낸 큰 꽃바구니

꽃바구니 앞에 다가가 보니 카드 축하문 아래 낙관은 ‘차이잉원(蔡英文)’ ‘라이칭더(賴清德)’ ‘우자오셰(吳釗燮)’…… 모두 중화민국 정부의 인사였다.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는 5시간 설법하셨고 창춘 보도원들을 또 앞으로 밀어주셨다. 내가 법을 들을 때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또 있는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는 목소리도 웅웅 울렸고 메아리가 있었다. 전반 우주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정치인들이 대법에 대한 태도와 션윈에 대한 찬양을 보니 대만 전체가 사부님의 손위에 놓여 있으면서 부드러운 흰 빛 무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진동했다. 같은 조상에 동성동본인데 양안이 비교된다. 대법에 대한 태도의 관할 하에 국민의 미래가 결정된다!

션윈 관람은 가장 정중한 일이다. 막이 열리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꽝!’ 하는 징 소리와 함께 우주가 펼쳐졌다. 내 마음도 터졌다.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반1부 공연에서 눈물만 훔쳤다. 끊임없이 훔쳤다. 힘껏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붉어지고 찌릿했지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느낌을 오로지 박수로만 표현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전반1부 공연은 다만 박수치고 눈물을 훔치고….

이후에는 좀 안정된 것 같았다. 점차 음악 속에 빠져 들었다. 금년의 노래는 매 한 수 가사마다 창세주를 찬양하고 노래마다 현대적 관념과 행위가 인류를 망가트린다고 정곡을 찔렀다. 사람들에게 무신론과 진화론에서 벗어나라고 일깨워 인간성이 구원되게 했다. 사부님께서 작사한 가사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매 무용도 여러 각도에서 중생을 일깨웠다. 무엇이 바른 것이고 전통이며, 그것은 인류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안정되자 공연장과 무대 아래의 반영을 볼 수 있었다. 내 옆에 앉은 두 남성은 40세 전후인데 말씨를 들으니 저장(浙江) 일대의 사람이고 연구자 같았다. 공연 전의 그들은 목록을 보면서 매우 편해 보였다. 공연이 시작된 후 박수를 칠 때도 매우 의례적이었다. 배 앞에서 박수를 몇 번 치고 말았다. 무용 몇 개가 지나간 후 그들의 표정은 장엄해졌다. 중간 휴식 때 공연 안내책자를 자세히 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악단은 반복적으로 연습해 잘 연주할 수 있었고, 무용은 조예가 있어 반복적으로 연습해 역시 일치할 수 있었어. 이번 공연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은 각본과 연출가야.” 말하면서 첫 페이지 사부님에 대한 소개를 진지하게 보았다. 2부공연에서 그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프로그램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톈거(天歌)의 솔로곡에서 그들은 목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크게 뜨고 스크린의 가사를 보았다. 배 앞에서 치던 박수도 가슴 앞에서, 머리 앞에서, 전 공연장의 박수가 다 멈출 때까지 쳤다. 끝날 때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힘껏 박수를 쳤다. 신이 공연을 하니 사람이 변했다.

극장을 나서자 관람객은 거의 다 빠지고 업무를 보는 수련생들이 남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서 뒤돌아봤다. 수련생들은 한 줄로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다시 만납시다! 내년에 또 만납시다!” 그 장면은 션윈이 막을 내릴 때와 똑같았고 20년 전 공항에서 배웅할 때와 똑같았다. 내년에 다시 모입시다!

(5)

대만에 도착한 후 줄곧 잊지 않고 그 해 창춘에 왔던 수련생을 찾았다. 진상 장소에 낯익은 얼굴이 있는지 봤지만 없었다. 20년 전에 창춘에 갔던 수련생은 아니었지만 만나는 수련생마다 매우 익숙하고 친절했다. 나는 챙겨간 사진을 티켓을 구매하면서 알게 된 L수련생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알려주었다. “가장 일찍 법을 얻은 이들은 모두 각개 항목을 책임지고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내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그녀는 우리에게 대만에서 가장 일찍 법을 얻은 한 수련생을 만나게 해 주었다. 대만 수련생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션윈 공연이 끝나고 L수련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으로 차를 타고 이란(宜蘭)에 갔다. 아직 모내기 하지 않은 논들은 달빛 아래 밝은 빛을 냈다. 그 수련생 언니네 집은 바로 이 논 옆에 있었는데 매우 조용했다. 차가 문 앞에 도착해 보니 수련생 언니는 진작 나와 있었다. 집에 들어선 우리는 경악했다. 집안 벽에 가득 걸린 사진은 모두 사부님의 법상과 새로운 버전의 ‘논어’, 사부님께 인사하는 사진과 수련생들의 단체사진이었다…… 이런 광경은 못 본지 근 20년이 됐다. 박해 전에 얼마나 많은 수련생 집이모두 이러했던가!

허(何)언니는 70세다.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흥미진진하게 우리에게 지난(濟南) 2기 학습반에 참가한 경험을 말해주었다. 신체가 건강을 회복한 기적을 말이다. 그리고 남편과 광저우 설법반에 참가했을 때의 신기한 일도 말했다. 이렇게 허 언니는 대법과 연을 맺고 대법을 대만에 전파했다. 95년도에 타이베이 양밍산(陽明山)에 첫 연공장을 설립했고 대법은 대만에서 전해졌다.

97년 11월 사부님께서 대만에 오셔서 설법을 2번 하셨다. 당시 법을 들은 사람은 2천여 명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을 마치시고 특별히 보도소장에게 운전하게 해 허 언니네 집에 가셨다.

“이 방이에요?” 나는 놀랍고도 기뻐서 물었다. “이 방이야, 사부님께서는 여기에 앉으셨고.” 허 언니는 소파의 한편을 가리키면서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금방까지 소파에 앉아있던 수련생은 ‘벌떡’ 일어나 소파를 돌아다보았다. 평범한 소파, 사부님께서 여기에 앉으셨었다! 사부님의 목소리와 웃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일체는 그렇듯 신성했다!

“언니, 당시 창춘에 안 가셨어요?” 나는 물었다.

“안 갔어. 한창 집을 정리했어. 바로 이 집이야.” 허 언니는 타이베이에서 이란으로 이사를 왔다. 바로 이 거실에서 9일반을 열고 무보수로 공을 가르쳤다.

자정이 넘었다. 허 언니는 훠궈(중국식 샤브샤브)를 준비했다. 뜨끈뜨끈한 신선로를 에워싸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20년 전에 대만 수련생이 창춘에 왔을 때와 같았다. 음식솜씨가 가장 좋은 수련생이 도시락을 만들어 역시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이 변했다. 그때 교류한 내용은 개인 수련과 어떻게 홍법할 것인 지였고 지금 화제는 더욱 넓어졌다. 대륙의 박해, 대법이 대만에서 널리 전해진 성황(盛況), 션윈을 본 소감, 그리고 전통문화로 회복하는 등이었다.

새벽 3시가 넘었다. 모두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허 언니와 L수련생은 우리에게 일월담에서 난 찻잎을 선물했다.

오늘은 창춘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자이(嘉義)에 정월대보름 등 전시회가 있었다. 수련생이 만든 대법선(大法船)은 해마다 등 전시회에 전시한다. 우리도 보러 갔지만 유감스럽게 전시구역에서 찾지 못했다. 교란이 좀 있어서 동쪽 수송중계기지로 옮겼다고 했다. 허 언니와 수련생이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엄청 컸다. 6층 건물만큼 높다고 했다. 주변은 모두 파룬(法輪)이다. 빽빽하다. 크고 작은, 밝은 파룬이었다. 수련생들은 서로 전해보면서 찬탄했다!

법선! 법을 얻은 초기에 가장 먼저 외운 대법책 중 하나는 ‘정진요지’, 그 중에 ‘깨달음(悟)’이 있었다. “인간 세상이 혼탁(渾渾)하여 옥석이 뒤섞였구나(珠目相混). 여래가 세상에 내려옴은 은밀하다. 법(法)을 전함에 필연 사문(邪門)의 교란이 있다. 도(道)와 마(魔)가 함께 전해져, 한 세상에 함께 있으니, 진짜와 가짜를 가려냄은 주로 깨달음에 달렸다. 어떻게 분별하는가, 필연 상사(上士)가 있다. 과연 맺은 연분대로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인지라, 잇따라 모여와 입도(入道)하여 법(法)을 얻는구나. 정(正)과 사(邪)를 가려내어 진경(眞經)을 얻고, 그 몸을 가볍게, 그 지혜를 풍부하게, 그 마음을 충실하게 하여 법선(法船)에 오르니 유유하구나. 옳도다! 원만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2]

법을 외우면서 법선에 오르는 기쁨을 유유히 맛봤다. 만고의 기대이다! 함께 법선에 오르자. 대법이 성연을 맺어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 ‘홍음-일월담을 거닐며’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깨달음(悟)’

 

원문발표: 2018년 6월 2일
문장분류: 온고금명(溫故明今)>증거(1992.5.13-1999.7.20)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3682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