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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를 하는 중에서의 승화와 중생구도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7년 운 좋게 법을 얻어 지금까지 이미 20여년을 수련한 노제자입니다. 저는 대기원에서 기자로 6년 넘게 일했고, 지금은 희망지성에서 일한지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법을 위해 살다

법을 얻기 전 저의 건강은 줄곧 좋지 않아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약을 먹었고, 대법을 수련한 후에야 건강한 신체를 가지게 됐습니다. 처음 ‘전법륜’을 듣고 사부님의 존안을 바라 봤을 때 매우 너그럽고 믿을 만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아 저는 책을 들고 3일 만에 모두 읽어 보았고, 또 여러 번 보면서 그 당시 저는 이미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책을 보자마자 사부님께서는 이미 제자의 신체를 청리해주셨고, 책을 한 번씩 볼 때마다 사부님은 제가 깨달을 수 있는 법 뒤의 내포를 저의 머릿속으로 넣어주셨습니다. 97년 겨울 저는 갑자기 대법을 수련해야겠다는 일념이 생겼습니다. 동짓날은 기억하기 쉽기 때문에 이 날을 제가 법을 얻은 기념일로 했습니다.

대법에 들어선 후 저는 모든 수련생들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있어본 적 없는 기쁨과 수련의 행복을 느꼈습니다. 수련의 문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적극적이고 즐겁게 홍법을 널리 알리는데 뛰어 들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한 후 현지 불학회에서 개최하는 크고 작은 퍼레이드, 진상 알리기, 반(反)박해, 중국수련생 구조 활동에는 모두 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저의 수련의 길은 사부님의 지도와 보호 하에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한 걸음씩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매체에 들어서다

2007년 9월의 어느 날 저는 매체에서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당시 매체의 길은 매우 험난했고, 저에게는 더욱 나아가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보수적이고 사교적이지 않으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광둥어를 잘 못하여 우리 매체 이름을 말하면 다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 여러 번 저에게 되물으며 발음을 교정해주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창피하여 얼굴, 목까지 빨갛게 변했습니다. 그 당시 악은 매우 창궐(猖獗)했고, 중국공산당 매체가 계속 우리를 맹렬하게 비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매체 환경은 매우 좋지 않아 인터뷰 통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때로는 동종업자가 우리에게 인터뷰 통지를 해주었습니다. 홍콩의 날씨는 매우 더웠고, 불볕더위에 땀을 흘리며 어렵게 쫓아가면 이미 끝났을 때도 있었고, 인터뷰는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주최 측에서 저를 단독으로 불러 훈계할 때도 여러 차례 있었고, 저의 렌즈 앞을 손으로 막고 찍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여러 번 인터뷰할 수 있는 시민이나 인터뷰 대상자를 4, 5명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거절하며 저의 인터뷰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러 번 방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매우 많았고, 그들에게 인터뷰 통지를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이 오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애당초 다른 기자들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으며, 주동적으로 저와 말을 하지 않았고, 무리를 지어 저를 회피하기도 하여 저는 고립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대법제자가 운영하는 매체라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정황 앞에서 저는 심성을 지키지 못했고, 거기에 경제적인 어려움과 다른 요인들로 매우 힘들어 낙담했습니다. 지금 말하자면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저도 여러 차례 ‘도망자’가 되어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뉴스를 편집하면서 전방에 나가 인터뷰하는 것은 거절했습니다.

정념으로 관을 넘다

‘이렇게 포기해야 하는가!’ 저는 그 당시 주저하며 결정짓지 못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했습니다! 매체 수련생들도 저와 교류하고 저를 격려해주며 오늘날 제가 매체에 들어선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며,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매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당초 사부님과 한 약속임을 깨달았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직면한 모든 것은 중생이 진상을 모른다는 표현이고 모두 구세력, 악이 교란하고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수련인으로 심성을 제고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속인과 승강이할 수 있는가? 그들은 우리가 구도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의 우매한 표현은 구도 받지 못한 현상이 아닌가!’

사부님의 감화로 제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압력을 무릅쓰고, 자아를 내려놓고 또 인터뷰할 배낭을 메고 인터뷰하러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늘 사부님의 ‘홍음’ 중에 ‘태산(泰山)에 올라’로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높은 계단 천척길을 오르나니

가파른 굽이굽이 발걸음이 더디네

고개를 돌리니 마치 정법수련을 보는 듯

반공중에 멈추면 제도받기 어렵도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만근다리 옮기나니

괴로움을 참고 정진하며 집착을 버리네

천백만 대법제자

공성원만하여 높은 곳에 있도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만근다리 옮기나니’는 그 당시 저의 느낌이었습니다. 사부님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정념으로 나갈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고, 몸도 가벼워 고된 모든 것이 다 사라졌으며, 저는 한 번 또 한 번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려 사부님께서 제자를 격려해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중생을 자비롭고 너그럽게 대하다

지금 그 당시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그때의 느낌이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힘겹게 걸었으며, 사회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거리를 두었으며, 우리 매체와 사회는 서로 왕래가 없었습니다. 저는 기회와 돌파구를 찾아 그들에게 대법제자가 알리는 진상을 듣게 하면 우리 매체는 반드시 사회의 믿음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대기원(大紀元)회의 설법’에서 “당신이 마주친 것과 접촉한 것은 모두 당신 이 범위 중의 요소이다. 당신이 정념이 족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곧 당신의 범위 중에서 높고 크게 될 수 있고, 당신의 범위 중에서 좋지 못한 그런 것들을 내리누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저는 정념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이 보도하지 못하게 하면 전화를 하여 그에게 이것은 인터뷰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저의 인터뷰를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정중하게 어째서 인터뷰를 받지 않는지 물어보고 나중에 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말을 믿어서 되겠습니까! 중국공산당은 많은 정치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파룬궁을 탄압한 것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그러나 채용한 탄압 수단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 후로 저는 적극적으로 더욱 많은 사람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공산당 언론들의 대법에 대한 비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몰랐습니다. 가끔 인터뷰가 끝난 후 그들이 오히려 파룬궁 매체 기자가 현장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궁금해 하며, 자발적으로 저에게 파룬궁에 관한 일을 일부 물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한 번 말하면 1시간 동안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4.25 중남해 청원, 톈안먼 거짓분신자살 진상부터 시작하여 제가 수련한 후 신체와 정신적 경지가 변화된 사실을 말하며, 중국공산당의 역대 운동, 홍콩을 한 걸음씩 간섭하고 적화시키려 한다는 것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사실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모두는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당하기 때문에 누구도 중국공산당의 탄압에서 자기만 생각하고 집단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들이고 힘을 다해 매체를 꾸린 것은 사회에 이바지하고 아울러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폭로하여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알리면 한 사람 혹은 한 개 단체가 진상을 알고 대법제자를 존중했고, 저의 친구가 되어 이후 인터뷰에서 그들이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때론 저를 도와 인터뷰 받을 만한 인맥을 소개해주었고, 일부 지역사회 문제를 알려주면서 저에게 인터뷰하러 가라고 했습니다.

전문적인 수준을 올려 사람들이 진심으로 탄복하다

상황은 차츰 변화했지만, 저는 처음에 원고를 잘 쓸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인들은 저에 대해 의심스런 눈초리로 저와 거리를 유지했으며, 제가 매우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참여하고 몰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와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한 단체 대표와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른 한 홍콩 일보사 기자가 걸어왔는데, 그는 바로 저를 저버리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녀가 원고를 매우 잘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뉴스보도를 하는 전문적인 업무에서 자신이 제고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속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수련인인데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체 수련생의 도움 이외에 일부 뉴스 보도 전문 자료를 보았으며, 한 번씩 인터뷰를 마친 뒤 다른 매체의 관련 보도를 보고 경험을 배웠습니다. 그들이 쓴 좋은 문장, 좋은 단어를 복사하여 자주 보며 몇 번을 반복해 보고 심지어 좋은 단어는 외우기도 했습니다. 인터뷰하러 나갈 때마다 저는 더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인터뷰할 사건의 사연, 뉴스의 논쟁점을 잘 알아보았고, 겁먹고 감히 질문하지 못했었지만 차츰 질문할 줄 알게 되었고, 자유롭게 일부 저의 생각도 질문할 수 있었으며, 일부 비교적 예리한 문제 또한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할 때도 속인 기자보다 더 많은 준비를 했고, 현장 기록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장녹음도 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기록하고, 문장에 넣어 더 적절하게 민심의 목소리와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전날 인터뷰한 단체대표가 아침 일찍 저에게 전화했습니다. 그 당시 매우 당황했고, 저의 보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걱정되어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저의 인터뷰 보도가 좋지 않으셨나 봐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감사드리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잘 썼습니다. 다른 매체보다 더 좋습니다!” 비로소 마음의 큰 바위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또 한 번 저를 격려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차츰 더 많아졌고, 저는 이렇게 한 걸음씩 그들의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역사회단체가 점점 많아지자 저에게는 많은 사회적 자원이 생겼고, 그들도 우리 매체의 매년 창립기념일이 되면 격려의 글을 써주어 그들의 지지와 존중을 표현했습니다. 이 연쇄반응은 일부 의원, 단체 대표에게도 알려지게 되어 차츰 저는 정치 유형의 인터뷰 통지도 받게 되었고, 일부 사회 논쟁 의제에서도 방문 약속을 잡을 수 있었으며, 입법회 의원 및 일부 민간단체인사, 정치계 인사를 특별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그들과 하나의 수평선을 유지하면서 그들이 우리를 믿고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다가가야 진상을 알릴 기회가 있고 그들이 진상을 알 수 있는 첫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곳곳마다 중생을 위해 생각하고 그들을 선으로 인도하다

홍콩 주권이 넘어간 후 중국공산당은 한 걸음씩 검은 손을 뻗었고, 홍콩의 행정, 사법, 교육계통을 간섭하고 민주파 및 민간단체인사를 탄압했습니다. 한 걸음씩 조여 오는 압박에 홍콩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었고, 억압감을 느꼈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들은 모두 수십 년간 항쟁했고, 앞날이 점점 아득하고 무기력한 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저는 이 기회를 빌려 그들을 격려하고 웃으면서 낙관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파룬궁수련인은 중국공산당의 눈에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도 이곳에 서있고 여전히 항쟁하는데 선생님들이 두려울 것이 뭐 있습니까!” 저는 그들에게 중국공산당은 두렵지 않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의 모든 소위 강대함은 모두 거짓이기에 표면적인 강대함은 그것의 정권이 안정되지 않아 허위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선악유보(善惡有報)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온갖 나쁜 짓을 하며, 8천만 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우리 대법제자를 박해했습니다. 이 빚은 결코 흐지부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의 천운은 이미 다했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그것의 해체와 멸망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때에 가서 우리 함께 거리에 나가 축제를 열어 봅시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럼요! 어쨌든 우리는 이 기회를 빌려 맞서야 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항쟁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우리는 보도할 뉴스가 있는 것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도하겠습니까?” 일부 반체제 인사는 탄압당하여 매체 여론에 보도되고, 주목 받게 되어 저는 자발적으로 그에게 ‘선생님은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법을 지지하는 중생이기에 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구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조금씩 사람들과 거리를 가까이 했으며, 시간을 내어 그들과 소통했습니다. 정법이 나아감에 따라 악은 갈수록 가혹한 박해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매체에서 저와 국민의 신뢰도는 한 걸음씩 만들어졌으며, 수련인의 성실함, 평탄함, 솔직함과 ‘진선인(眞善忍)’이 체현한 정신 면모를 그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더 많은 인터뷰를 하러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많이 보았기에 그들은 저를 만나면 먼저 와서 인사를 하고 우스갯소리를 할 때가 많았고, 심지어 그들은 항쟁 팻말을 높이 들고 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저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따뜻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현장에 나가 인터뷰하지 못하면 그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저에게 주어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그들의 사교팀에 가입시켜 전 그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때로는 그들이 인터뷰 통지를 보내기 전에 저는 벌써 그들이 준비하는 활동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저와 같이 뉴스사건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습니다.

대법제자의 진상거점 및 퍼레이드 활동에는 중국공산당의 외곽 조직인 칭관후이(青關會) 방해가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팀에서 저는 그들이 칭관후이에 대한 불만과 파룬궁을 지지하는 언론을 발표하는 모습을 늘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대법 퍼레이드가 있을 때면 플랫폼에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있어 파룬궁이 모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는데 칭관후이(青關會)에서 방해하고 있으니 시간 있는 분은 서둘러 가서 지원해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한 속인의 총선거 유세 퍼레이드를 인터뷰할 때 도로 가에 마침 10여 명의 칭관후이 맴버들이 손에 대법을 비방하는 게시판을 들고 서있었습니다. 퍼레이드 중인 사람들이 보고 달려가 그들과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한창 높이 외치던 구호는 “파룬궁을 지지한다! 신앙자유를 지지한다! 장쩌민을 공개 심판하라! 장쩌민을 지명 수배하라.”로 바뀌었습니다.

그 밖에 문장을 쓰는 것은 사람 됨됨이와 수련과 마찬가지로 매체 전업 보도 원칙에 부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우리에 대한 태도가 어떻든지 막론하고 우리는 대법제자이므로 모두 마땅히 겸손하고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쓸 때 중생을 공개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을 난처한 처지에 밀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인터뷰할 연줄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으며 그들을 밀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와 시사평론 인사가 우리 보도에 시름을 놓지 못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는 성실하게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인터뷰를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분명 여전히 배워야 할 점과 부족한 점이 많지만 우리는 노력하고 성심껏 써내어 여러분께 연락 드려 함께 나눌 것입니다.” 저는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며 부족한 점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대법제자는 시시각각 중생을 위해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중국 인사들이 인터뷰를 받을 때 저는 그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그에게 먼저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그가 두렵지 않다고 해도 저는 그에게 잘 생각해보라고 재삼 권해줍니다.

중국의 한 유명한 기자는 부패공무원을 고발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처음 홍콩에서 인터뷰를 한 후 우리는 이야기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그가 기자회견을 열 때 재차 자발적으로 저에게 와서 인터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그는 저에게 부패공무원의 내막을 폭로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독점 보도 몇 편을 써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본명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한 편의 보도 때문에 그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와 신뢰를 쌓았고 그는 대법 진상을 매우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려움이 있거나 위험할 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묵념하라고 알려주면서 이것은 가장 상서로운 축복이라고 알려줄 때가 많습니다.

인터뷰 나갈 때마다 저는 가급적 법공부를 하여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조절하고 발정념하여 장을 청리했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저는 ‘진·선·인’의 심태로 동종업자를 대했고, 때로는 그들에게 촬영할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면 무언가를 들어주었고, 자료를 얻게 되거나 취재자의 연락처를 받았을 때면 우리는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금 저와 동종업자들은 매우 좋은 관계를 형성했으며, 저에게는 속인 매체의 친구가 생겨 늘 서로 인터뷰하러 가기로 약속을 하며 관계가 매우 좋습니다.

사존께서는 ‘홍음2-가로막지 못하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의 길은 같지 않으나 모두 대법 가운데 있도다 만사에 집착이 없으면 눈앞에 길은 스스로 열리리라” 10여 년의 매체의 길에서 비바람과 시련을 겪으면서 사존의 격려와 가지(加持)하에 저희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정법 노정이 추진됨에 따라 세인들은 점점 진상을 알게 되었고, 속인의 매체는 점차 쇠락하고 있지만 저희 매체의 영향력은 오히려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크고 작은 인터뷰 통지를 모두 받을 수 있으며 적지 않은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인터뷰를 하러 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회 유명인이든 정계의 요인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파룬궁수련인이 꾸린 몇 개의 큰 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존의 인도 하에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미래는 막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돌이켜 보면 정말 감회가 남다릅니다. 제자는 사존께서 가르쳐 인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제자에게 매체에서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게 하시어 한 편으로 매체의 일을 하고 한 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존의 ‘홍음2-금강지(金剛志)’의 한 마디로 여러 수련생들과 함께 노력하고자 합니다. “미혹된 중생은 저마다 소란을 피우며 큰 위험이 닥쳐도 긴박함을 모르는구나 붕렬(崩裂)되기 전 힘껏 만회하려니 어찌 썩은 귀신의 재앙을 용납할 쏘냐 의지와 마음은 금강을 초월하였나니 홍미(洪微)는 내가 하고 있노라” 사존에게 감사드리고수련생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점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18년6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7/3702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