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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명절, 아름다운 회상

리훙쯔 사부님께서 후난 천저우에서 전법한지 20주년을 기념하며

글/ 천저우(郴州)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4년 7월 15일은 우리 천저우 대법제자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명절이다. 바로 위대한 사부님께서 천저우에 오셔서 설법하신 날이다. 이로써 오래되고 수려한 천저우에 역사는 웅장하고 장려한 새로운 한 장을 적을 수 있었다. 천저우는 이로부터 운 좋게 신기원의 빛나는 기점에 들어섰다.

이날 사부님께서는 베이징에서 비행기로 창사(长沙)로 오셨다. 천저우 수련생 2명이 창사에서 사부님을 마중하여 모시고 사부님은 헝산(衡山)을 지나 난웨(南岳) 큰 절에 들르셨고 오전 11시경 긴 여행길을 지나 천저우에 도착하셨다. 그때 시내에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의 천저우 전공 설법을 뜨겁게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학습반 장소는 ‘천저우 체육기지’로 선정했고 준비한 것이 비록 임시로 되는 단상이나 매우 장중하게 돋보였다. 단상 위에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천저우 학습반’이라는 글귀와 파룬도형이 걸렸다.

1. 사부님의 설법을 귀담아듣다

그날 오후 2시에 개강했다. 실외에서 기다리던 수련생들은 두 줄로 서서 환영했고 사부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 가운데로 지나갔다. 한 노년 수련생이 말했다. “아니, 선생님이 이렇게 젊으시다니! 이렇게 준수하시다니!” 사부님께서 강당에 들어서자 박수 소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울리며 끊이질 않았다. 수련생들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부님을 바라봤고 사부님은 친절하고 자비롭게 수련생을 둘러보셨다. “사부님 찾은 지 몇몇 해인가 하루아침 친히 뵈옵게 되었구나.”[1] 그 행복감은 말로 표현이 안됐다.

一九九四年七月十五日,李洪志师尊亲临郴州讲法
1994년 7월 15일, 리훙쯔 사존께서 친히 천저우에서 설법하셨다

사부님은 처음에 간단히 자신의 정황을 소개하고 직접 주제로 들어가 진정으로 고층차로 사람을 이끄는 대법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전반 강의에서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이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매우 평이하고 솔직한 언어로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에 이르기까지 분석하고 해석하며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나는 격동돼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미 대법(大法)을 진정하게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에 붙어 있는 부체를, 신체 안에서부터 밖에까지 붙어 있는 모든 좋지 않은 이런 것들을, 어떤 것이든 전부 다 떼어버렸다.”[2]

나는 이런저런 많은 기공을 연습했고 연습할수록 얼굴이 검어져 입술마저 검어졌다. 공원에 단련하러 나가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고 일부 사람은 뒤에서 의논했다. “저 얼굴에 반점이 한층 깔린 것을 봐요, 두텁기까지 해요, 저건 간에 병이 있으므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해요.” 그때 나는 갈 길이 없었고 날마다 점괘를 보러 다니며 무당을 찾아 사한 것을 쫓아버리려 했다. 어느 날 고향 사람마저 이렇게 말했다. “또 점괘를 봤군요, 뭘 들었나요? 그 사람은 맹인입니다.” 이토록 가소롭게 나는 많은 무당과 만나며 마비된 상태에서 나날을 보내 얼마나 많은 사령과 부체를 초래했는지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말을 하는 신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에게서 내가 모르는 것을 듣고 싶었고 이 미혹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누군가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산을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마을에 무당이 있어 병을 잘 보고 영험하다고 말했다. 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산을 넘어 두 번이나 갔다. 무당은 노래하고 술을 마시며 중얼거리기만 해서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없어서 더는 가지 않았다. 나는 또 동쪽 강 옆에 높은 산 정수리에 ‘신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구하러 떠났으나 아무런 작용이 없었다. 나는 꿈에서도 황폐하고 사람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고달프게 걸어갔고 아무리 찾아도 집을 찾을 수 없었으며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사부님께서 ‘진선인(真善忍)’ 고덕대법(高德大法)을 집 문 앞까지 가져다주셨고 나의 여러 가지 미혹과 오래된 마음의 매듭, 번뇌를 해결해주셨으며 광명대도를 밝혀주셨다. 며칠 동안의 강의였으나 들을수록 정신이 났고 들을수록 마음이 밝아졌으며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 모두를 마음에 새기고 싶었고 한마디라도 놓치면 중대한 손실로 느껴졌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병근(病根)은 이미 떼어버렸고, 남은 요만한 검은 기, 그것이 스스로 나오게 하여, 당신에게 고만한 난(難)을 겪게 하며, 고통을 좀 받게 하는데, 당신이 조금도 감당하지 않는 이것은 안 된다.”[2]

이 기간에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나의 업을 제거하셨고 나는 날마다 혈변이 나왔다. 어느 날 밤은 9번이나 깨어났으며 전신에 통증이 느껴졌고 뼈마저 아팠다. 그 아픔으로 침대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러가고 또 땅으로 떨어졌으며 다시 소파로 기어갔고 오장육부가 괴롭기 그지없었으며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나기마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괴로워도 신심이 백배로 생겼고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심에 감사드렸으며 지금 환골탈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공간에서 당신의 신체를 보면 그 뼈마저도 군데군데 시커멓다.”[2] 이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 내가 업력 덩어리라고 여겼는데 사부님께서 또 “사람마다 거의 모두 업이 구르고 굴러서 온 것이며, 사람의 몸에는 모두 상당히 큰 업력이 있다.”[2] 라고 말씀하셔서 원래는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신체청리를 해주셔서 나의 허리 디스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아졌다. 그리고 유방이 크게 부어서 건드릴 수 없었고 목욕을 할 수 없었으며 길도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고 솜 같은 무게감이 있어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날마다 미열이 있었다. 규폐증을 앓고 있어 호흡이 곤란했고, 류머티즘, 좌뇌두통(넘어져서 생긴 후유증), 눈 시력이 어렴풋함, 왼쪽 비강 폴립, 여름이면 전신에 간지러움 증이 나타나는 등 병증이 있었다. 그랬던 몸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모든 병이 감쪽같이 나아졌다. 사부님께서 나의 생명을 구해주셨고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 구절마다 진리였고 천기였으며 우리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대법을 배운 후 심령은 끊임없이 정화됐고 진정으로 인생의 홀가분함과 즐거움, 행복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원망과 원한의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삼형제인데 둘째 큰어머니가 질투로 아버지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집과 땅을 빼앗으려고 적잖은 수단을 썼다. 내가 태어나서 얼마 안 돼 아버지는 붙잡혀 군인이 됐는데 둘째 큰어머니는 이 기회에 향을 올려 아버지가 군에서 돌아올 수 없게 해달라고 저주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정말로 타향에서 객사 당했다. 어머니는 개가했고 나는 고아가 됐다. 4살 때 할머니는 나를 같은 마을의 다른 집에 줬다. 하지만 그 집과 연분이 없었는지 다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할머니는 더욱 입지가 어려울 때였다. 어느 한번 둘째 큰어머니네 집에서 돼지를 잡아 남들과 함께 식사했다. 나는 고기를 먹고 싶어 그 집 입구에 섰는데 오랫동안 서 있어도 고기 한 점 얻어먹지 못했다. 7살이 되어 할머니는 할 수 없이 나를 큰아버지네 집에 보냈다. 큰아버지는 장애인이었고 집안 형편이 빈궁했다. 나는 방목하고, 땔나무를 마련하고, 돼지 먹을 풀을 뜯고, 밥을 하는 등 많은 일을 해야 했다. 9살 때 머리카락 한 올 없었고 말라리아 질병에 걸려 거의 죽어갔다. 운 좋게 큰아버지 아들인 사촌오빠가 나의 병을 치료해줬고 2년간 공부시켰다. 나중에 우리 집과 땅이 모두 사촌오빠에게 갔다. 나는 둘째 큰어머니에 대한 원한이 뼈에까지 사무쳐 아버지 복수를 하리라 결심했다. 몇십 년간 이 염두를 나는 버리지 못했다.

대법을 얻은 후 이는 모두 인연 관계임을 깨달았다. 사람의 생생세세, 원한과 은혜는 모두 업력윤보였고 누가 누구에게 빚졌는지 모르며 목숨을 빚졌으면 갚아야 한다. 나는 원한과 원망의 속인 마음을 떼어낼 수 있었고 일생 중에서 가장 무거운 정신적인 부담을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 이러한 심연 속에 빠진 나를 해탈시켜 준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2. 미세한 것에서 위대함을 목격하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것은 매우 노고가 많으셨고 시간 배치가 촘촘했다. 학습반은 모두 각 지역의 요청과 사부님의 사인으로 계약이 이뤄진 후 배열된 시간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 그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늘 이곳의 학습반이 끝나면 즉시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하셨는데 많은 경우는 밤에 길을 떠나셨다. 사부님께서 전국에서 법을 전하시는 그 나날들은 강당에서 설법하셨거나 아니면 길을 가는 중이셨다.

사부님은 언제 어디서나 수련생에 대해 책임지고 사회에 대해 책임지셨다. 어떠한 세부적인 것에서도 매우 면밀하게 고려하셨다. 천저우(郴州)의 실제 정황으로 천저우에 오시기 전인 정저주(郑州) 학습반이었을 때 사존께서는 주변의 현장 스텝들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 천저우는 교통이 불편하고 시발역이 아니어서 타 지역 수련생이 많이 가면 제때에 집에 돌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지에 번거로움을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천저우로 가고 싶었던 많은 수련생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전에 알렸으나 천저우 학습반으로 삼삼오오 9개 성에서 수련생들이 찾아왔는데 942명이었고 천저우 현지 수련생은 단지 3백여 명이었다. 하지만 딱 적당해서 좋았고 사실 사부님의 배치가 이미 있었다.

천저우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에게 해야 할 설법을 4일 내에 순차적으로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학습반 차수를 추가하고 시간도 추가하면서 매우 수고하셨다. 17일은 일요일이었으나 오전에 설법하고 오후에도 설법하셨으며 저녁에는 수련생의 정공 동작을 조절해주시면서 휴식할 틈이 없었다.

그러함에도 수련생들이 사부님과의 회식, 좌담, 기념촬영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도 모두 들어주셨다. 촬영할 때 일부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옆에 서려고 붐비었으나 사부님은 언제나 매우 상화로운 심태로 대하셨다. 사부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침은 주변 누구에게나 깊은 영향을 주었다. 회식이라 했으나 집에서 늘 먹던 음식이었으며 좋은 것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과 잠시나마 더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주방에서 음식이 모자랄 것 같아 면국수를 삶아 내오자 사부님께서는 연속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더 덧붙여 “너무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날마다 거주하고 있는 방을 깨끗하고 정연하게 정리하셨고 절반 남은 찻잎마저 잘 싸서 책상 변두리에 놓아두셨다. 복무원은 보고 나서 매우 감동을 받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를 했다. “전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는 대기공사님이 이렇게 가까이하기 쉽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니 드뭅니다.” 사부님께서 타인에게 남기신 건 자비와 아름다움이셨다.

어느 날 사부님께서는 천저우와 광저우 수련생 십여 명과 함께 소선령(苏仙岭) 정상의 평지에 있는 돌로 된 쪽걸상에 앉으셨다. 사부님께서는 간곡하고 의미심장하게 수련생에게 타이르셨다. “여러분이 잘 수련하길 바랍니다. 확고하게 수련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세요. 법은 얻기 힘듭니다!” 한 수련생이 천저우의 일을 질문하자 사부님께서 알려주셨다.(대략적인 뜻) “천저우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소선(苏仙)’은 확실히 존재했던 사람이고 하늘을 납니다.” 사부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수련생이 발걸음을 멈췄다. 사부님께서 산허리에 있는 절로 들어가셨고 절에 2명의 화상이 있었는데 그중 한 화상이 급히 쫓아 나와 사부님을 뵈었다. 나중에 한 수련생이 호기심으로 그 화상을 찾아갔으나 다시는 그 화상을 보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천저우를 떠나시기 전 수련생마다 입장료 중 20위안(약 3400원)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셨다. 현장 스텝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일급 기공, 이급 기공, 또 며칠 지나서는 무슨 고급 기공으로 칭하며 많은 기공사는 돈을 많이 거둘수록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른 기공사들의 입장료는 몇십 위안에서 몇백 위안으로 조정되고 나중에는 선물까지 하는 형세였다. 사부님께서는 차수를 추가하고 시간을 늘렸으나 입장료를 더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련생들의 입장에서 입장료를 줄여 사람들은 사부님께서는 일반 기공사들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스텝은 사부님의 뜻에 따라 인식을 공유하고 수련생들에게서 입장료를 적게 받고 수련생의 부담을 낮췄다. 남은 적은 돈은 현지 기공협회에 지불해 남은 돈이 없었다.

7월 18일 오후 천저우 파룬따파 학습반이 원만하게 끝났다. 대략 저녁 7시경 사부님께서는 광저우에서 사부님을 안내하러 오신 수련생들과 함께 기차역으로 출발해서 우리는 다급히 쫓아가 배웅해드리려 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빨리 우리를 보러 오셨고 다시 대합실로 가셨다. 잠시 후 대합실에서 한 복무원이 다가오더니 큰 수박을 주면서 말했다. “당신들의 사부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때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수박을 받아보니 수박은 이미 다 잘려 있어서 한 사람이 한 조각씩 딱 맞았다. 그때 함께 배웅하러 간 사람들도 함께 한 사람이 몇 명인지 몰랐었다. 기차를 탄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사부님을 뵐 수 있었는데 사부님은 두 객실을 잇는 사이에 서 계셨다. 기차가 출발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떠나신 방향으로 바라보며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사부님을 뵙고 싶었다.

3. 천저우에서의 파룬따파

사부님께서 파룬따파를 천저우에 주셔서 대법은 매우 빨리 천저우에 뿌리를 내렸고 신속히 발전했다. 연공장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서 나타났고 2년 사이에 시내 연공장만 해도 41개가 됐다. 대법 수련생이 처음의 3백여 명에서 3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사람들의 정신면모는 완전히 바뀌었고 좋은 사람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났고 각종 신적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炼功点象雨后春笋般纷纷涌现,两年间,市内炼功点就有四十一个
연공장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서 나타나 2년 사이에 시내 연공장만 해도 41개가 됐다.

초기에 연공장에 녹음기가 없어서 책임자가 수련생마다 조금씩 지원할 것을 건의했으나 나중에 수련생에게 모금을 할 수 없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깨닫고 모금한 1천 위안을 수련생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수련생이 매우 많아 서로 알지 못해 돌려주기가 매우 번거로웠다. 하지만 누구나 대법의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으며 누구나 환급되는 돈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지지 않아 환급이 매우 순조로웠고 조금의 차이도 나지 않았다.

구이둥현(桂东县) 남쪽 마을의 촌민이 파룬궁 수련을 한 후 과거 원수로 지내며 물을 빼앗던 것에서 나중에는 물을 양보해 이 이야기가 매우 널리 전해졌다. 사실 아직 많은 묵묵히 소리소문없이 좋은 일을 한 대법제자가 너무 많다.

파룬궁이 잔혹한 박해를 당하는 15년 동안에도 ‘진선인’은 여전히 대법제자의 몸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어느 날 새벽 연공을 마친 파룬궁 수련인 랴오즈쥔(廖志军, 20여세)은 집으로 돌아가다 오토바이와 부딪혀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고 옷에도 전부 피였다. 오토바이 기사는 멍해졌다. 랴오즈쥔은 천천히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가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파룬따파수련생입니다.” 그가 대법의 심성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기에 이틀 후 나아졌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기적을 목격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1999년 ‘7.20’ 이후에 여러 차례 붙잡혔고 현재 제2차로 4년 판결을 받고 후난 왕링 감옥에 감금됐다.

한 여자 수련생이 무더운 여름날 오후에 돈주머니를 주웠다. 족히 몇십만 위안은 됐다. 그는 누군가 이렇게 많은 돈을 잃어버리고 꼭 조급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뜨거운 땡볕에 잠깐 사이에 20분이 지났으나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약 30분쯤 지날 무렵 한 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롯가를 훑어보며 매우 조급해했고 얼굴이 창백했다. 수련생이 물어보니 그는 6만 8천 위안(약 1144만 원)을 들고 은행에 저축하러 갔으나 은행에 도착해보니 돈을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돈 주인은 분명히 누군가 주워갔고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은행 직원은 그래도 오던 길을 따라 찾아보라고 건의했다. 수련생이 그 돈을 그에게 돌려주자 그는 감격했으며 그중에서 2백 위안(약 3만4천 원)을 꺼내 수련생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려 했다. 수련생은 “6만 8천 위안을 당신에게 돌려드렸는데 제가 어찌 2백 위안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파룬궁수련생입니다.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남성이 다시 은행에 저축하러 가서 방금 있었던 일을 은행직원에게 알리며 돈을 돌려준 사람이 무슨 공을 연마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은행직원이 “무슨 공일까요? 반드시 파룬궁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남성은 “네, 네, 바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떠올려 대답했다. 은행직원이 실수로 ‘6만 8천 위안’을 ‘7만 8천 위안’으로 잘못 입력해 남성이 집에 돌아와 보니 통장에 1만 위안(약 170만 원)이 더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6만 8천 위안을 돌려줬으니 이 1만 위안은 내가 가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직원이 1만 위안을 은행에 배상해야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즉시 은행에 찾아가 통장에 입금액수를 정정했다.

돈을 주운 여자 수련인은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고 부부의 양쪽 직장이 모두 폐업했으며 자녀는 대학공부를 하고 있어서 부부가 아르바이트하며 생활을 유지했었다. 아울러 남편은 파룬궁 수련으로 경찰에 반복적으로 붙잡히고, 가택수색, 벌금, 강탈을 당했다. 예를 들면 천저우 베이후 공안분국 가오유민(발음으로 표기)은 강탈하기 위해 그녀의 방범용 철문을 부수었고 또 나무로 된 문도 부수었다. 그녀는 스스로 문을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1천 위안(약 17만 원)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연공장(煉功場)은 다른 어떤 공법의 연공장(練功場)보다도 좋은데, 우리의 그 장은 당신이 가서 연공(煉功)하기만 하면 당신이 병을 조리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의 법신(法身)이 한 바퀴 둘러앉았고, 연공장(煉功場) 상공에는 또 씌우개가 있으며, 위에는 큰 法輪(파룬)이 있고 큰 법신(法身)이 씌우개 위에서 장을 지키고 있다. 그 장은 일반 장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연공(練功)하는 그런 장이 아니라 수련하는 장이다. 우리 공능이 있는 많은 사람이 모두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이 장이 붉은 빛으로 씌워졌고 온통 붉은 것을 보았다.”[2]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기이한 풍경을 우리 이곳 사람도 본 적이 있다.

湖南郴州法轮功学员在苏仙岭集体炼功时拍到的神奇光柱
후난 천저우 파룬궁 수련생이 소선령에서 단체연공할 때 찍힌 신기한 공기둥

1999년 이전 베이징에서 복무 중인 군인이 천저우로 출장을 갔다. 이른 아침에 산보하고 있는데 앞쪽의 지면에서 하늘까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는 그곳을 찾아냈는데 원래 대법제자들의 연공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3일 늦게 베이징에 돌아갔다. 그 사이 천저우에서 파룬궁을 배웠고 돌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연공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사실 많은 연공장에서 이러한 광경이 나타났으며 어떤 사람은 파룬이 하늘에서 회전하는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과학관의 한 연공장에서 어떤 사람은 천목으로 이러한 현상을 보았다. 은색의 용이 연공장의 앞쪽에 있었는데 머리는 서쪽으로 향했으며 발톱을 움찔거렸다. 또 아름다운 봉황을 봤으며 긴 꼬리를 저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공장을 돌았다. 연공장에 또 부처와 도인의 형상을 한 신선이 나타났다. 연공장의 바로 위 상공에서 연공음악이 울리자 신선도 그곳에서 연공했다. 그들의 소매는 매우 컸고 어떤 때는 사각형 대열을, 어떤 때는 원형으로 서서 연공했는데 동작이 매우 일치하고 표준적이었다.

사존께서 천저우 전법 20주년에 즈음하여 제자는 이 글을 올려 위대한 사존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를 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홍음-연귀성과(緣歸聖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转法轮)’

 

원문발표: 2014년 7월 15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7/15/294656.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4/8/8/24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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