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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병업이 있는 수련생을 보고 생사를 내려놓음을 생각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간혹 어떤 수련생이 심한 병업이 나타나 구세력에게 빈틈을 탄 상황에서 육신을 잃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몹시 가슴이 아프다. 내 층차에서 나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니 수련생들과의 교류에서 훌륭한 의견이 나오기를 바란다.

수련생에게 심한 병업이 나타나면 그것은 정말로 생사관을 넘는 것으로서 절대로 소홀해서는 안 되며 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원인이 있다. 생사에 직면하면 나는 일종 보이지 않는 박해이고 심지어 감옥살이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나타날 때 병업이 있는 수련생과 주변에 있는 수련생은 이 몇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1. 정말로 신사신법했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가장 좋은 길을 배치해 주셨음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가장 좋은 길은 수련에 대해, 제고에 대해, 집착심 제거에 대해 가장 좋은 것으로서 속인의 좋은 점과 다르다. “마음을 끝까지 내려놓고 당당한 대법제자처럼 바라는 것도 없고 집착도 없이 떠나든 남든 사부의 배치에 따르는 것인데”[1] 이 한 점을 진심으로 해낼 수 있는가?

2.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스스로 반성해봐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생사를 내려놓는다면 당신은 바로 신(神)이며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사람이다. 바로 이 구별이다.”[2] “물론 당신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다. 수련은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3] 심각한 병업이 있는 수련생은 아마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사부님이 배치만 승인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수련생은 세상을 떠났다. 사부님께서 상관하지 않아서일까? 물론 아니다. 생각해 보자. 마난 중에서 어느 정도로 신사신법했는지, 어느 정도로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을 것이다.”[4]라는 경지에 도달했는지, 어느 정도로 태연하게 죽음을 대했는지, 어느 정도로 속인의 관념을 바꾸고 안으로 찾았는지, 어느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어느 정도로 보호를 추구했는지, 어느 정도로 명리정을 내려놓았는지, 어느 정도로 자신을 닦는 것을 잊고 희망을 사부님의 몸에 맡겼는지, 어느 정도로 쟁투심, 질투심, 색욕심, 과시심, 자신을 보호하는 등 사람 마음을 고수했는지, 더욱 심한 경우 사부님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는데 수련인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되겠는가? 이것은 누락이다.

3.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스스로 반성해봐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심한 병업의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일찍 종결되고, 일찍 해탈되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며 살 만큼 살았다고 말한다. 사실상 감당하기 싫어하고 수련의 길을 자기가 배치하고 싶은 것이다. 수련인은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이것도 누락이다.

4. 심한 병업을 겪고 있는 수련생 주변에 있는 다른 수련생들은 그를 위해 조급해서 함께 교류하고, 법공부하며, 연공 등을 하면서 심혈을 기울였지만 때로는 효과가 좋지 못했다. 많은 사람은 모두 정념이 있어야 하고, 사부님의 배치를 따라야 하며, 구세력을 부정하고, 생사를 내려놓으며,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수련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미 큰 이치가 됐다. 생각해보자. 왜 숨김없이 생사를 내려놓는 문제에 대해 직접 논의하지 않았는가. 생사를 내려놓는다는 말을 하면 모두 이미 공통된 인식이 있어 좋지 못한 것을 추구할까 봐서인가. 수련과 생사를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서로 대면해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감히 말도 할 수 없다면 어찌 내려놓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병업 중에 있는 일부 수련생은 고통으로 인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도 살고 싶다는 욕망은 아주 강하다. 이때 생사를 내려놓는 문제에 대해 그가 생각할 수 있도록 엄숙하게 제기하면 일부 경우, 사람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릴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안으로 찾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마음과 부족함을 찾으면 정말로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

5. 자신에 대한 대법의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수련의 길이 어떻게 배치됐는지, 어떤 경지까지 닦아야 하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전혀 고려해 필요가 없고 오직 엄격하게 법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안으로 닦으며 사명을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특히 큰 고비를 넘길 때 태연하게 모든 집착과 사람의 마음, 생사를 내려놓고 자신을 대법제자로 여기고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기에 노력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인바 적절치 못한 곳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르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폭로(大曝光)’

 

원문발표: 2018년 4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4/8/3638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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