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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락 굽은 길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많은 성격이었고 무슨 일이건 궁리하면서 파고들기 좋아했다.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걱정도 잘 했다. 이공계여서 곧잘 탐구하면서 실증과학으로 형성된 그런 완고한 논리로 추리하는 사유방식이 형성됐다.

수련 과정에서 나는 이렇게 사고하는 습관과 사유방식이 수련에 큰 장애라는 것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의식중에 지식인이 이론을 습득하는 식으로 법을 공부했기에 생각 속에서 빙빙 돌면서 집착 속에서 집착을 버리는 식으로 착실히 수련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모순이 생겼을 때를 상상하면서 화를 내고 이 다음에 어떻게 참을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이다. “참음이란 화를 낸 다음에 비로소 참는 것이 아니라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1]라는 사부님 말씀을 전혀 모른다. 만약 내게 어떤 곤혹스러운 일이나 혹은 병업이 와서 정말 두려운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탄연하게 내려놓을지를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밍후이왕의 보도를 보니, 한 수련생이 다리를 다쳐 분쇄성 골절이 되었지만, 또 깁스를 하지 않았다. 이 수련생은 자신이 불구가 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조금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매일 법 공부를 했다. 정념이 아주 충족하여 조금이라도 앉아 있을 수 있으면 연공을 했다.”[2] “무엇을 정념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념이다.”[2]

어떤 수련생이 내 문제를 지적해주며 “그런 사유방식이라면,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 속에서 사는 것이죠. 회전목마가 빙빙 도는 것 마냥 승화할 방법이 없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상황이었다.

법을 이해하고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에서 나는 공식을 선호하는 논리적 추리방식에 쉽게 빠진다. 아인슈타인은 “직감은 우리에게 부여된 신성한 선물이고, 추리는 우리의 충실한 종이다.” 라고 했다. ‘종’이라면 주인이 일을 시키고 싶을 때는 시키고 시키기 싫으면 시키지 않으면 된다. 주인은 종을 지배하지 종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업무, 특히 과학연구를 할 때는 당연히 논리적으로 추리해야 한다. 그러나 공식을 가지고 하는 논리적 추리방식은 수련에서는 심각한 장애다.

이런 습관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에 더해 나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까지 더해져, 나는 장기간 굽은 길을 걸었다.

수련하기 전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수련을 하면서 신체가 좋아진 것 같지만 병이 있는 부분이 약간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이전에 사회 속에서 ‘이 병에 걸리면 타인에게 옮길 수 있다’ 는 관념이 강하게 형성돼 이 병이 도대체 좋아진 것이 맞는지, 타인에게 전염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친구가 자기 집에 식사하러 오라고 해도 되도록 피했다. 타인에게 옮길까봐 서였다. 계속 이것을 생각하면서 사상 속에서 병에 대한 생각이 가중됐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물론 사람이 병을 얻을 때, 흔히 모두 그것으로 하여금 세간 이 한 층의 이치에 부합되게 하며 흔히 세간에서 이 병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외인조건(外因條件)이 모두 있게끔 하므로, 이것은 마치 이 세간의 이치에 아주 부합되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은 다만 그것으로 하여금 이 세간의 이치, 이 세간의 그런 상태에 부합되게 하기 위해 나타난 외적인 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병의 근본 원인은 이 공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3]

사부님의 설법에 대해 일부분 깨닫게 되면서 병을 불러오는 진정한 원인은 그 자신의 업력이지, 소위 말하는 전염이란 것은 단지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기 위한 외부적 조건이 유발된 것뿐이라고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그뿐 아니라 가장 관건적인 것은 병이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신을 진정한 연공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리 상에서 똑똑히 인식했지만 형성된 사상업은 제거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천목은 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구할수록 더욱 없다. 구하면 구할수록, 그것은 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천목 안에서 또 일종의 것이 넘쳐 나오는데,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그것이 당신의 천목을 덮어버릴 것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그것은 매우 큰 장(場)을 형성하며, 갈수록 많이 넘쳐 나올 것이다. 천목이 열리지 않을수록, 그것을 추구할수록, 이런 것이 더욱 많이 넘쳐 나와 결국 그의 온 신체를 모두 둘러싸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두께 또한 아주 두꺼워서 매우 큰 장을 갖는다. 이 사람의 천목이 정말로 열렸다 해도 그는 역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런 집착심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다. 장래에 그가 더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런 집착심을 완전히 버렸을 때면, 그것이 천천히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간고하고 긴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매우 불필요하다.”[4]

천목에 관한 말씀이지만 나는 이를 통해, 인위적으로 가중한 사상업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고 이해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수련만 하면 사부님께서 꼭 병을 치료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의 마음속은 아직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개변인가? 아니다. 표면상의 화려함 그것은 가짜다. 사람이 만약 본질에서부터 자신을 개변하지 못하면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 각자(覺者)인, 고급 생명은 아주 똑똑하게 볼 수 있는바, 이 점은 조금도 감출 수 없다. 그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해, 끝까지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단지 그것으로 하여금 더욱 은밀하게 변하도록 할 뿐이다”[5]

이 말씀을 보던 때 나는 내가 사부님께서 병을 어떻게 해주십사 하는 생각이 없다고 여겼고, 나를 말씀하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병을 고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병은 곧 좋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결국 여전히 병을 생각하고 있고 진정하게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황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수련의 측면에서 보면 많은 점에서 이런 은밀하게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수련생과 모순이 생겼을 때, 안으로 찾고는 있지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안으로 찾기만 하면 그 수련생도 꼭 안으로 찾을 거야.’ 즉 나는 진정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대법을 실증하는 프로젝트를 하다가 번거로움이 있으면 내 안에서 찾고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제고한다면 이 번거로움이 지나가고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식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결국 여전히 결과를 구하고 있었다. 안으로 찾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자신을 개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다.

수련하면서 진상을 알리는 각종 홍법(洪法) 활동에 참가했다. 다른 수련생이 진상을 알릴 때 수련을 한 후 여러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집착심에서 ‘나도 다 나으면 그렇게 말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매번 연공할 때 신체에 좀 변화가 있으면 ‘장래에 병이 완전히 나으면 그것을 가지고 진상을 알려야겠다.’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이 병을 더욱 내려놓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장래에 법을 실증하려 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이 집착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근원을 찾아보니 여전히 병을 구하는 것이고 병이 나아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며, 구하려는 마음이었다. 진상을 알린다는 구실로 덮어감췄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아는가? 지금 낡은 악의 세력이 대법(大法)을 박해하는 가장 큰 구실 중 하나가 바로 당신들의 근본적인 집착이 덮어 감춰진 것임을. 그리하여 이 난을 더 크게 해서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대법(大法)이 사람의 과학에 부합한다고 집착하면 그것들은 사악한 사람을 통제하여 대법(大法)은 미신이라고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리고, 당신들이 대법(大法)은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들은 사악한 사람을 통제하여 대법(大法)은 사람들에게 약을 먹지 못하게 해서 1,400명이나 죽었다고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다.”[6]

사실, 대법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 근본적인 집착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박해의 가장 큰 구실 중 하나는 수련생들이 근본적인 집착을 덮어감추고 있는 것인데, 이 근본적인 집착을 지니고 반(反)박해 하는 상태여서는 안 된다. 마치 기름을 들고 불을 끄러 가는 것 같은데, 불을 끌 수 있겠는가. 이런 근본적인 집착을 지니고 진상을 알리는데 진정으로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수련을 잘한 수련생은 병에 대한 집착, 대법을 수련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집착이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몸에 발생한 일과 수련 전후의 변화를 이야기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수련하는 사람이 단지 표면상으로만 내려놓고 마음속에는 아직도 지닌 채, 한 가지 것을 고수하면서, 당신 자신의 그 가장 본질적인 이익을 다른 사람이 해치지 못하도록 고수하고 있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그것은 가짜 수련이다! 당신 자신의 내심을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은 한 발자국도 제고할 수 없는바,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오로지 당신이 진정하게 내심에서 제고 해야만 당신은 비로소 진정하게 제고된다.”[7]

수련하면서 어느 집착심에 대해 너무 걱정하면 도리어 그 집착이 강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정정당당하게 수련하고 집착심이 나타날 때 그것을 똑똑히 분간해 배척하면 그 집착하는 물질이 수련 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거된다는 인식이 들었다.

이어 마음을 내려놓고 대량으로 법을 공부하자 자신의 사유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처럼 많은 목적을 품고서 수련하지 않았고 “대법은 무위(無爲)이다.”[7]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가 생겼다. 상상 속에서 수련하려 하지 않고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8]라고 하신 말씀을 확실히 따를 수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최소한 그 부정적인 생각을 잡아내서 분간한다. 더는 하나의 논리에 빠져 쇠뿔 끝을 파고들지 않았다. 사부님의 말씀 “왜 부처의 지혜가 크다고 말하는가? 그와 당신의 생각은 같지 않으며 그의 용량은 큰 것으로 그는 한 방면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9]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생겼다.

이런 변화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생각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집착 속에서 집착을 버리는 식으로는 집착을 제거할 수 없다. 쇠뿔 끝을 파고드는 사유 상태를 가지고서 어떻게 쇠뿔 끝을 파고들지 않을지를 생각해도 헛수고다. 마음을 내려놓고 법 학습을 많이 하며 법에 녹아들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수련하면서 점차 사람의 사유방식과 사상구조를 뛰어넘어 결국 신의 사유 상태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개인의 일부 인식이니 맞지 않는 곳이 있다면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법해-광저우(廣州) 설법 문답풀이’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6]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
[7]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설법’
[8]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9]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미국동부법회설법’

 

원문발표: 2018년 3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3/5/3624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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