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구출과 관련 공무원들에게 진상을 알린 경험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인류의 역사는 또 사악이 날뛰는 낙원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정법을 위해 세워진 것이며 대법제자들이야말로 비로소 여기에서 휘황함을 펼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으로 사부님의 이 단락의 법을 실증했다. 이 몇 년간 나는 불법적으로 체포된 수련생을 구출하는 항목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 중에서 줄곧 관련된 공검법사(공안, 검찰, 법원, 사법) 기관 중생을 구도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위험하다는 최전선에 항상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런 일도 없었다. 비록 위험한 상황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모두 사부님의 보호 하에 아주 빨리 없어졌고 줄곧 안정적으로 조사정법(助師正法)의 길을 걸어왔다.
공검법사 기관의 관계자들에게 자발적으로 대면 진상을 알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우려가 있을 것이다. 근원은 사실 아직도 두려운 마음을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공검법사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이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나의 사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나에게 대단한 담력을 주시여 수련 전의 두려운 마음을 제거해주신다. 하지만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다. “대법제자로 말한다면, 정념은 법에서 오는 것으로, 수련이란 당신 사람 생각이 어떻게 좋고, 당신 사람 생각이 어떻게 고명한가 하는 것이 아니며, 수련이란 당신이 문제를 대할 때 정념으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2] 중생 구도는 사람의 용기와 패기에 의거해 하지 말아야 하기에 나는 법공부와 발정념을 아주 중시했다.
2000년에 법을 얻은 후부터 나는 거의 법공부를 중단한 적이 없었고 시간만 허락되면 대량으로 법공부를 했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에는 하루에 ‘전법륜’을 몇 강 보다가 정각이 되면 발정념을 했다. 평소에도 발정념을 아주 중시하는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매일 네 번의 전 세계 정각 발정념을 여태껏 지체한 적이 없었고 또 몇 번의 정각 발정념도 했다. 밖에서 일을 볼 때에는 머릿속으로 법을 암기하지 않으면 발정념을 했는데 될수록 사람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사람을 만나면 진상을 알리는데 될수록 인연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 대량의 법공부와 발정념을 통해 사부님과 법을 굳게 믿게 됐고 따라서 두려운 물질이 매우 많이 적어졌으며 많이 침착해졌다. 사악이 나를 근본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었다.
아래에 나는 수련생을 구출하고 공검법사 기관 중생을 구도한 일부 장면을 써내려 한다.
1. 사악에 맞서 정정당당하게 법을 실증하다
(1) 국보대장에게 석방 요구
2010년~2012년 사이에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나는 관련된 공안국, 파출소, 시 감옥 관리국, 노동교양소 등 기관에 뛰어다녔다. 비록 남편을 구출하지 못했지만(불법적으로 그들이 정한 2년 노동교양 처분으로 구속됐음) 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에 대한 노동교양소의 박해는 아주 많이 감소됐다. 남편을 구출할 때 공검법사의 어떠한 기관을 가더라도 나는 모두 정정당당하고 떳떳했다. 딸은 “우리 엄마가 그들보다 더 무서워요. 우리 엄마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 엄마를 두려워해요!”라고 말한다. 내 딸도 어린이 대법제자인데 몇 번 나와 함께 석방을 요구하러 간 적이 있다.
이 과정 중에서 나는 자비심이 부족했는데 이것은 내가 닦아 버려야 할 것이었다.
몇 년간 현지, 이웃 현과 시 수련생들은 나를 찾아와 체포된 수련생들의 구출에 참여해달라고 했다. 나는 수련생들이 체포된 것을 알고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 얼마나 참여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현지 파출소, 구치소, 국보대대, 진(鎭) 정부, 진 정부 종합치안관리사무실, 세뇌반, 법정 및 이웃 현 국보대대, 법정에 찾아갔고 또 수차례나 현지 국보대대의 정부(正副) 대대장을 찾아갔다.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은 모두 나를 알았는데 만나면 모두 나를 공손하게 대했다.
두려운 마음이 없기에 나는 어느 기관이거나 어느 공검법사 인원에게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고 싶으면 마치 친구 집에 가는 것처럼 간다.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 나의 이런 표현에 대해 현지 일부 수련생들에게 오해를 샀다. 한동안은 내가 스파이라고 헛소문을 냈고 심지어 협조인이라는 사람도 “그가 공안국에 가는 것은 바로 자기 집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두려울 것이 있나요!”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헛소문은 현재 이미 잠잠해졌다.
2012년, 현지의 9명 수련생이 체포됐다.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동료 수련생을 구출하는데 참여한 것이다. 원래 수련생 가족들을 더 찾아서 함께 구출하려 했지만 가족들이 협조하지 않아 마지막에 체포된 수련생의 아들 한 명만 찾았는데 나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이 수련생의 아들은 진상을 명백히 알고 수련생의 수련을 지지했다.
나와 이 수련생의 아들은 두 차례나 파출소에 가서 석방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파출소 책임자를 보지 못했고 두 번째로 갔을 때에는 내 정념이 충족했으며 이 수련생의 아들도 정기가 가득했다. 우리를 안내한 파출소 지도원의 태도는 매우 예의가 발랐다. 우리에게 이미 구치소로 보냈다고 알려주었는데 우리가 믿지 않을까 봐 직접 우리를 데리고 유치장에 가서 철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여줬다. 우리가 살펴보도록 하면서 이미 구치소로 이송됐음을 확인시켜줬다.
그런 후 사부님의 배치로 나는 이 수련생의 며느리를 만났다. 나는 그와 함께 가서 석방을 요구하면 더욱 적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비록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악당이 권력을 갖고 있어 우리가 가서 석방을 요구해도 소용없다고 여기고 각종 핑계를 찾아 회피하면서 나와 협력하지 않았다. 나는 낙심하지 않고 여러 번이나 찾아가 진상을 알려서야 그녀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한번만 같이 간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수련생의 며느리와 함께 현지 국보 대대장 집에 가서 석방을 요구하러 갔다. 이 국보대대 대대장은 밍후이왕 악인방에 등재됐는데 현지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는 모두 그가 주도했다. 처음으로 갔을 때 아파트를 잘못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니 그의 집이 아니었다. 수련생의 며느리는 정념도 매우 강해 우리는 1층에서부터 4층까지 문을 두드렸다. 집집마다 찾아다녔는데 마지막에 5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오면서 이 아파트에는 그런 사람이 확실히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다가 생각밖에 국보대대 부대장의 문을 두드렸다. 이 사람도 밍후이왕 악인방에 등재되어 있다. 최근 몇 년간 현지 대법제자를 박해한 악행은 거의 모두 그가 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었는데 나중에 국보대대 대대장이 여기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와 수련생의 며느리는 한 번이라고 헛걸음을 할 수 없으니 부대장 아내에게 진상을 알리자고 의논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국보대대 부대장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의 아내가 또 문을 열었다.
수련생의 며느리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난 후 그녀에게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인데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풀어주세요. 곧 설이 다가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대장의 아내는 우리가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당신이 말하면 틀림없이 효과가 있기에 남편에게 말해보라고 했다.
이번 일을 통해 수련생의 며느리는 자신감이 생겨 한 번만 같이 가겠다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고 또 나와 함께 협력해 국보대대 대대장을 찾으러 갔다.
이번에는 다른 한 수련생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길에서 발정념을 하고 ‘홍음’을 외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국보대대 대대장에게 ‘나는 홍대한 자비를 가지고 당신을 구도하러 왔으니 빨리 우리를 맞이하라!’라고 말했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수련생의 며느리가 먼저 문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두드려서야 대대장이 직접 문을 조금만 열었다. 처음으로 그와 대면했는데 우리가 소개를 하자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바로 문을 닫았다. 그런 후 문을 사이에 두고 “나는 퇴근했어요. 여기는 근무하는 곳이 아니기에 일이 있으면 공안국에 가서 나를 기다리시오!”라고 말했다.
나와 수련생 며느리는 만약 그가 나오면 그를 따라 공안국에 가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계속 문을 두드리자고 의논했다. 대략 20분쯤 지나자 그가 나와서 우리는 바로 차를 잡아타고 그를 따라 공안국에 갔다.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자 사무실에는 또 3~4명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밤 8~9시 경이어서 이미 퇴근시간이 넘었는데 이 사람들이 여기에 온 것은 국보대대 대대장이 켕기는 것이 있고 두려워 그들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우리와 그 수련생이 무슨 관계인지 물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름과 주소를 물었는데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태연했다. 나는 오늘 정정당당하게 당신에게 알려주겠다고 생각하자 그는 아주 빨리 컴퓨터로 내 신분증을 찍어냈다. 나는 2002년에 수련하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박해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때 수련생 며느리는 정정당당하게 국보대대 대대장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치를 말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모든 이웃이 다 인정할 뿐만 아니라 또 효자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집에서 가족에게 잘 대한다면서 이런 좋은 사람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순정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그들에게 이치를 말했고 나도 협조하면서 진상을 알렸는데 오랫동안 말했다. 국보대대 대대장은 줄곧 조용히 듣다가 마지막에 “됐어요, 당신들이 한참 동안 말했는데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도 돌려서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들은 좋은 사람을 풀어주어 집에서 설을 쇠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니 상부에 신청해야 해요. 내가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이미 다 알아보았어요. 이 일은 당신이 주관하기 때문에 당신의 한 마디 말이면 풀어줄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나에게 ○○가 나의 언니인지 물었다. 나는 그가 왜 내 언니를 아는지 몰랐다. 나는 당시 절대로 속인 마음과 속인의 방법, 속인의 정에 의지해 관계를 맺지 말고 확고하게 신사신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평범하게 “네, 당신은 그녀를 알아요?”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다시 의논할 테니 우리에게 먼저 돌아가서 결과를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루가 지나 우리가 구출하려는 수련생을 비롯해 네 명의 수련생이 모두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구출한 이 수련생은 현지의 주요 협조인인데 그는 이전에 몇 년형을 선고받았고 몇 차례나 납치됐다. 원래 사악이 전하는 말로는 이번에 그를 중형에 선고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구하는 이번 일을 통해 수련생 가족들은 대법의 정념에 대해 더욱 확신했고 수련생의 며느리도 복을 받았다. 그는 원래 한 상가의 팀장이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전체 상가 빌딩 관리자로 승진했다.
한 번은 이웃 현의 수련생 세 명이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붙잡혀 이웃 현의 수련생들이 나를 찾아와 구출에 협조해달라고 했다. 당시 이웃 현 전체 수련 상태가 좋지 않았다. 주요 협조인 몇 명은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떤 이는 심지어 수련도 하지 않았다. 이웃 현에 도착한 후 나는 현지 수련생과 서로 교류하고 오랫동안 발정념을 했다. 발정념 시 사부님의 점화로 현지 국보대대 대대장을 찾아가 석방을 요구하자고 했다. 그리고 현지 수련생들과 서로 교류해 박해받는 수련생들의 가족을 찾아 사람을 구하는데 협조해 달라고 했다. 정말로 사부님의 배치로 수련생들이 연락해 6~7명의 가족들이 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주 잘 협조했는데 유독 한 수련생의 아들만 진상을 모르고 대법에 대해 부정하면서 협조하지 않았다. 나와 수련생들은 계속 그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처음에 부정하던 데로부터 점차 일부 진상을 알고 마지막에 함께 협조해 구출하는데 동의했다.
우리는 함께 현지 국보대대 대대장 집으로 갔다. 이 국보대대 대대장은 집에 없고 그의 아내가 오히려 아주 열정적으로 우리를 접대했다. 그의 아내는 교통경찰인데 그의 부친이 1999년 전에 대법을 배웠기에 그녀도 일부 진상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줄곧 그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하자 그는 “저는 대법이 좋고 당신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도 수련하신 적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잘 말할 것이라고 했다. 오래 기다려도 대대장이 오지 않자 우리는 먼저 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받던 세 명의 수련생이 석방되어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2) 대법의 자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2015년 하반기 어느 날, 7~8명이 경찰들이 갑자기 우리집에 뛰어들어 집안의 일부 물건을 빼앗아갔고 나는 8시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날 오후, 나는 그들이 빼앗아간 대법자원을 누구도 강점해서는 안 되고 즉시 가서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2~3일내에 나는 수차례나 현지 파출소에 가서 소장, 국보대대 소대장, 시 국보대대 대대장 등 사람들을 찾아 내 물건을 요구했다. 당시 9월 3일 베이징 열병식이 바로 다가왔기에 그들은 모두 긴장 상태에 처해 있어 매우 바쁜 것 같았다. 9월 2일, 그들은 내 물건을 기본상 전부 다 돌려주었고 10월 1일 마지막 남은 컴퓨터 본체도 나에게 돌려줬다.
처음에 나는 먼저 파출소장을 찾아가 물건을 요구했는데 그는 이 일은 국보대대에서 관리한다고 했다. 그날 시 국보대대를 찾아갔지만 대대장을 만나지 못해 그에게 수차례 전화하자 나중에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또 현지 국보대대 소대장을 수차례 찾아가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이 며칠간 아주 바빠요. 며칠 후면 안 됩니까?”라고 말했는데 나도 안 된다고 했다. 한번은 조바심이 올라와 전화로 이 소대장에게 “조그마한 물건을 가지고 당신은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아요!”라고 조급하게 말하자 이 소대장은 “봐요, 당신은 또 조급해 하네요. 당신의 성격은 우리 어머니와 거의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자신이 잘못했고 조바심과 쟁투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파출소와 국보대대가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내가 파출소 책임자를 찾아가면 그는 관여할 수 없고 국보대대가 관여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앞에서 국보대대 소대장에게 전화했다. 전화가 연결된 후 나는 파출소 책임자에게 전화를 주면서 “당신들은 내 앞에서 똑똑히 말해보세요.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지 오늘 들어봅시다”라고 말했다.
한 번은 마침 시 국보대대 대대장과 마주쳤는데 나는 즉시 그에게 내 물건을 돌려달라면서 “당신들은 어찌 우리 딸의 컴퓨터도 다 빼앗아 가나요?”라고 말하자 그는 “그래요? 내가 알아볼게요”라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딸의 컴퓨터를 나에게 돌려주었고 이어서 다른 물건도 아주 빨리 나에게 돌려주었다. 현지 국보대대 소대장은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바쁜데도 오늘 물건을 돌려주려고 왔어요”라고 말했다.
작년 5월쯤, 현지 진 정부의 종합치안관리 사무실 7~8명 사람들이 우리집에 와서 일부 물건들을 빼앗아갔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현재까지 진 정부에 다섯 번이나 찾아가서 내 물건을 빼앗은 종합치안관리 사무실 주임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의 태도는 줄곧 매우 공손했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면도 있어 일부 진상을 알기도 했다. 비록 삼퇴는 하지 않았고 물건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가 그에게 진상을 알릴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진상을 알게 됨에 따라 물건은 자연히 내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2. 사악이 완전히 제거되다
(1) 밍후이왕 악인방에 등재된 국보대대 부대대장
2014년, 우리 현지에서 수련생 몇 명이 체포됐다. 당시 그들의 사건은 악당 중앙에서 압력을 가해 ‘큰 사건’,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되어 엄하게 다스릴 거라고 했다.
그 중의 한 수련생은 보석되어 한동안 집에서 심문을 기다렸다. 당시 그의 집은 24시간 동안 3~4명이 치밀하게 감시했다. 차를 몰고, 오토바이를 타고, 또 자전거를 타고 감시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이 수련생이 어디를 가든 뒤에는 모두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수련생에게 변호사를 선임해 주었기에 나는 일이 있으면 자주 그와 논의 했고 수시로 그의 집에 가고 싶으면 갔다. 한 번은 현지의 국보대대 부대장이 그 수련생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몇 년간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는 거의 그와 연관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진상을 알리려고 그 수련생의 집에 갔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내 이름과 어디에 사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름과 주소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당시 그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때에는 아직 자비심이 부족해 자신이 매우 대단하고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뜨거운 솥 위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왔다 갔다 했다. 그래서 나는 “부대장님, 나는 당신과 좀 얘기를 나누려 하는데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잠깐 앉아 있으면 안 되나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앉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진상을 알렸는데 한참 쫓아다니며 말하자 그는 황급히 가버렸다.
이 수련생은 붙잡힌 후 정념이 계속 부족했다. 이번에 내가 그 국보대대 부대장을 쫓아다녀 도망가게 하는 것을 보고 그도 정념이 나왔다. 그때부터 박해를 반대하고 자발적으로 사건과 관련된 공검법사 기관의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상을 알렸다. 원래 그는 이른바 ‘엄중한 처리’로 판결해야 하는데 재판이 오히려 흐지부지하게 됐다. 이 수련생은 지금까지 줄곧 안정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있다.
한 번은 불법적으로 재판을 할 때 가족이 들어가 방청을 하려 했는데 자리가 부족해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밖에서 발정념을 했다. 그런데 그 국보대대 부대장이 갑자기 수련생들이 발정념을 하는 곳에 와서 돌아다녔다. 나는 그가 와서 수련생들의 숫자를 세거나 사진을 찍어 수련생들이 당황하거나 불이익을 당할까 봐 나는 바로 그에게로 갔다. 나중에 다른 한 수련생도 따라왔다. 나는 그 부대장에게 “부대장님, 이 더운 날씨에 수고 많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당신도 수고가 많지 않나요?”라고 어색하게 말했다. 이렇게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면서 한담하면서 그를 길 건너편까지 데리고 갔다.
(2) 파출소 안의 ‘다과회’
2015년 하반기 어느 날, 7~8명의 경찰이 갑자기 우리집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아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옥상에 올라가기도 하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집을 수색한 후 내 대법 책 한 권과 여러 권의 진상 소책자, 컴퓨터 본체, 노트북, 여러 장의 CD,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새긴 열 몇 개의 작은 도장도 빼앗아갔다.
원래 그들은 남편을 붙잡아가려 했는데 나는 남편이 남아서 노인과 아이를 돌봐주어야 한다면서 내가 그들과 함께 갈 것을 제의했다.
파출소에 도착해 그들은 원래 나에 대한 이른바 기록을 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나는 당신이 하는 어떠한 일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문제도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일에도 당신과 협조하면 모두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록하던 경찰은 웃으면서 “문제를 대답하면 내가 해를 입는다고요?”라고 말하면서 타자원에게 “침묵! 침묵! 침묵!”이라고 타자하게 한 다음 다시는 기록을 하지 않았다.
또 한 무리 경찰이 바뀌었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고 이따금 웃음소리도 들려 마치 다과회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가 나를 박해하는 검은 소굴이 아니고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느꼈다. 한참 그들과 기쁘게 말하고 있을 때 다른 방에서 한 경찰이 우리가 이렇게 흥성거리며 말하는 것을 듣고 와서 “누님, 또 그들에게 강의를 하고 계시는군요. 우리끼리 애기를 해봐요”라고 해서 나는 또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중에 또 한 무리 경찰로 바뀌었는데 나에게 “누님, 당신이 얼마나 중시를 받는지 보세요. 우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네요!”라고 말해서 나는 또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들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파출소에서 8시간쯤 있고 나는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한 경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많은 경찰력을 동원했는데 이렇게 풀어주다니?!”라고 말했다.
3. 정념이 충족하고 사부님께서 보호하니 위험한 상황이 순조롭게 변하다
한번은 모 법정에서 우리 수련생들을 불법 심문했다. 나와 현지 수련생들이 가서 방청했는데 결국 우리 수련생 수십 명이 체포됐다. 나도 거기에서 거의 30시간 동안 잡혀 있다가 현지 공안국에서 나를 데려와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 기간 두 가지 일이 발생했다. 하나는 내가 아주 쉽게 나를 채운 수갑을 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몸에 장착한 무슨 위치 추적기도 아주 쉽게 풀어버린 것이다. 현장 경찰들은 내가 한 이것들을 풀어낸 과정을 전부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수련생 구출과 공검법사의 중생 구도를 더욱 잘하기 위해 이 몇 년간 수차례 변호사를 선임해 수련생을 위해 무죄변호를 했다. 변호사를 선임할 때마다 모두 나는 변호사와 연락해 구출문제 협상에 대해 책임졌다. 변호사가 공안국, 검찰원, 법원 등 기관에 가거나 법정을 열 때면 거의 내가 전부 함께 했다.
이런 변호사 대부분은 모두 이 몇 년간 여러 차례 파룬궁 수련생을 위해 변호한 저명한 인권 변호사들이다. 그들의 전화는 모두 장기간 감시되고 사람도 추적 감시된다. 따라서 그들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적으로 감시당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아무런 우려도 하지 않고 변호사와 협조하는 과정 중에 항상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밍후이왕 문장을 인쇄해 그들에게 보여주고 진상 CD, USB 메모리를 그들에게 주어 그들이 정법 노정을 알도록 했다.
2014년, 앞에서 언급한 우리 현지 4명의 수련생이 박해받은 사건이 발생한 후 현지 수련생들은 교류한 끝에 변호사를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현지에서 처음으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고 또 내가 처음으로 변호사와 접촉한 것이다. 그때 우리 현지의 정체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 박해받은 4명의 수련생 중에 두 명은 현지의 주요 협조인이다. 다른 어떤 협조인은 추적을 피해 숨어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아주 심해 누구도 감히 제일선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변호사와 면담하기로 약속했을 때 몇몇 수련생은 나를 차로 배웅했는데 변호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몇 십 리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홀몸으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변호사와 만났는데 다른 몇 명의 수련생들은 몇 십 리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이 변호사도 유명한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방금 다른 파룬궁 수련생의 변호를 하다가 다른 변호사와 함께 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해 갈비뼈가 부러졌다. 내가 그와 만났을 때 그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말할 기운도 없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했으며 허리도 곧게 펴지 못했다. 그는 병원에서도 감히 치료하지 못해 내쫓아서 여러 군데를 돌고서야 여기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감시됐다.
우리가 방금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맞은편의 멀지 않는 곳에서 플래시가 우리를 향해 두 번이나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누군가 몰래 우리를 찍고 있었다. 이 변호사의 부인이 그들에게 가서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그들은 TV방송을 찍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사악이 근본적으로 나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변호사와 의논해야 할 모든 일을 잘 마무리 짓고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변호사와 함께 공안국에 가서 법률서류를 제출할 때 국보대대는 뒤에서 모든 과정을 미행했다. 한 여성 사복경찰은 소형 카메라를 들고 우리를 향해 촬영하기도 했다. 공안국에서 법률서류를 받지 않아 우리는 또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발송했다. 길에서 또 일남일녀 사복경찰이 우리를 향해 촬영하다가 변호사가 그들을 찍자 그들은 황급히 도망갔다.
7월 전후로 우리집은 대략 3개월 정도 치밀하게 감시됐다. 문 앞에는 낯선 차가 오랫동안 서있었고 한 수련생이 우리집에 한번 왔다가 가면 미행당하고,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기도 했다. 한번은 남편이 마침 한 사람이 우리집 대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우리 집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보았다. 또 한 번은 밤 10시쯤에 남편이 야근을 하고 퇴근할 때 우리집 문 앞에서 1미터 높이의 기기 장치가 바로 우리집 대문 앞을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종류의 기기는 당연히 그런 전담반 특유의 것인데 현지에는 분명히 없는 것이었다. 비록 분위기가 아주 공포적이었지만 사부님의 보호 하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이상의 이러한 경험들은 수련의 길에서의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처음에는 과시 혹은 자아가 있을 수도 있었으나 이후에는 이런 것이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마음만 보시기에 그런 과시심으로 인한 교란은 없었다. 이 글을 쓴 것은 여러 수련생님들과 함께 정념의 힘, 사부님과 대법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부족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3-2005년 유럽법회에 즈음하여’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설법10-더 정진하자’
원문발표: 2017년 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5/3600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