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엄청 시달렸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어린 나는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는데 아프기만 하면 호흡을 멈췄다. 어머니는 볏짚(5, 60년대에 시골에서는 아기가 죽으면 볏짚으로 싸고 묶어서 벌판에 내다 버렸음)을 가져다가 묶으려 했다. 그런데 손을 쓰기도 전에 다시 살아나는 바람에 어머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셨다.
어머니가 자세히 세어 보니 내가 호흡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난 적이 20여 번이나 된다고 했다.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진 어머니는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봤다. 점쟁이가 말했다. “이 아이는 죽지 않아요. 액운이 클 뿐입니다! 아이의 수명이 짧지도 않네요! 나중에 또 호흡이 멈춰도 상관하지 말아요.” 그 후 나는 여전히 수시로 호흡을 멈췄고 어머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매번 스스로 살아났다.
돌 때 소아 흑열병에 걸렸다. 어머니는 치료하기 위해 나를 안고 사방으로 다니셨다. 병세가 위중해 의사를 찾을 새도 없이 어머니가 직접 주사를 놓을 때도 많았다. 내가 오래 아프다 보니 어머니는 의사가 됐다.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 내 병은 겨우 완쾌됐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은 모두 나를 명(命)이 긴 사람이라고 부른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당시 우리 마을에 9명의 아이가 흑열병에 걸렸는데 8명이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고 한다. 내가 철이 든 후 나를 보면 우는 아이 엄마도 있었다. 자신들의 죽은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만 5살 때 백일해에 걸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데리고 치료하러 다녔지만, 효과가 좋지 않았고 천식을 남겼다. 천식은 인류 의학사에서도 난치병이다. 현재 세계 의료계에서도 돌파하지 못한 난관이다. 어려서부터 천식 때문에 건강을 잃었는데 가장 두려운 게 감기였다. 감기를 무서워할수록 감기에 잘 걸렸다. 남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나는 감기에 걸렸고 남들이 감기에 걸리면 나 역시 감기에 걸려야 했다. 감기만 걸리면 지병이 도져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 건 일상사였다. 늘 감기에 걸리고 늘 재발했다. 어머니는 연이어 각종 민간요법을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후에 어머니는 현지의 이름난 한의사를 찾아갔다. 한약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르지만, 병은 낫지 않았다. 산둥의 한 명의에게서 약을 우편으로 주문하여 구매해 먹었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이후에 선양(沈陽)에 있는 약방에 가서 일본에서 수입한 약을 사 먹었지만 역시 낫지 않았다. 1년 사계절 늘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남들이 홑옷을 입을 때 나는 스웨터를 입어야 했고, 남들이 스웨터를 입을 때 나는 솜옷을 입어야 했다. 아버지는 농민이셔서 본래 수입이 적은 데다 18년 동안 내 치료 때문에 온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맸다. 돈을 수도 없이 썼지만 내 병을 고치지 못했다. 어른이 된 후 힘든 일은 못 하고 가벼운 일만 할 수 있었다. 늘 시무룩했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 후 시댁에도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남편에게 걱정을 끼쳤다. 약을 밥 먹듯 했지만 건강해지기는커녕 약물 부작용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온몸이 심하게 떨려 물 컵만 들면 쏟았다. 오래된 병에 장기적으로 약을 먹어 위장이 많이 상했다. 메스꺼움, 구토, 복통 등 위장병까지 얻었다.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선양의 한 병원에 가서 가슴에 토끼 뇌하수체 주입 시술도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마을에서 이름난 환자다. 삼복만 되면 호흡이 곤란했다. 마치 무슨 물건이 짓눌러 숨을 못 쉬게 하는 것 같았다. 숨을 쉰다기보다는 숨을 끌어올린다는 편이 낫다. 매우 괴로웠다. 통풍되는 곳에 가면 좀 완화된다. 겨울에는 문밖에 나가지 못했다. 특히 한겨울에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겨울을 났다. 이렇게 몸을 사려도 여전히 감기, 발열, 기침, 천식 증상이 지속해 일어났다.
의사와 약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해마다 동지섣달이 되면 천식이라는 병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농촌 토지 도급제 후 내가 병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자 남편도 돈을 벌러 외지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집에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경제 형편은 더없이 곤란했다. 치료도 마을 의사에게만 갈 수 있었고 주사를 맞고 링거 맞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의료비는 늘 외상을 달고 가을에야 갚았다.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은 거의 다 치료비에 들어갔다. 온 가족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이름난 불우이웃이었다.
질병과 빈곤이 교차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항상 눈물범벅이었다. 울어도, 소리쳐도 하늘땅은 무심했다. 여러 차례 생을 마감하고 이 꼴 저 꼴 안 보려 했지만 어린 아들과 딸이, 엄마가 된 내 마음을 꼭 붙잡았다. 아이들이 엄마를 잃는다면 얼마나 불쌍한가! 어쩔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사선에서 애타게 몸부림쳤다.
1996년 겨울, 39세가 된 나는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어서 매일 남편이 부축해 일으켜 밥을 먹었다. 의사는 약을 늘렸지만, 양약, 한약 모두 효과가 없었다. 어두운 먹구름이 우리 온 가족을 둘러쌌다. 연로하신 시어머니도 앓아누우셨다. 남편은 나 몰래 눈물을 흘렸다. 두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친척들은 내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모두 문병을 왔다. 나 자신도 이러다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몰랐다.
40세 되던 해, 즉 1997년 4월에 이미 백여 일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고 삶이 끝나려는 무렵에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에 들어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연공한 지 3일 되던 날 저녁에 대법 사부님께서 내 신체를 정화해주셨다. 한 시간 넘게 구토해 대야에 절반 넘게 쓴 물을 토해냈다. 가마를 엎은 것 같던 배가 꺼지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4일째부터 대법 사부님께서 또 신체를 정화해주셨다. 셀 수도 없이 소변을 배출해 7일 되자 전신 부종이 가라앉았고 일상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온몸에 기운이 났다! 보름 후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대략 20일 되자 남편과 함께 밭에 가서 봄 파종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기뻐서 사람만 만나면 말한다. “파룬궁은 정말 신기해요. 화장터에 갈 사람을 살려냈어요!”
온 마을 사람들은 파룬궁이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걸 안다. 파룬궁이 정말 좋고 진짜로 신기하다는 걸 안다. 마을 사람들은 잇따라 나에게 와서 파룬궁을 배웠다. 몇 개월 사이에 몇십 명이 수련했다. 우리 집은 자연히 마을의 파룬궁 연공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하루 즐거웠고 생활에 햇빛이 가득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20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으며 약 한 알 먹지 않고 의료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절약한 돈이 10여만 위안이나 된다.
북방의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평소처럼 집을 나서지만 한 번도 추위로 고생한 적이 없었다. 삼복에도 호흡이 원활했다. 좀 추워도, 좀 더워도 신경을 안 쓴다. 면역력도 자연히 강해지고 체질도 자연히 좋아졌다. 몇 년간 남편과 같이 농사짓고 돼지를 길러 생활이 점점 좋아졌다. 새집도 진작 지었다. 지금 남편은 장기적으로 돈을 벌러 나가고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집 전체를 관리한다. 우리 집은 이미 가난에서 벗어나 마을에서 부유한 축에 속했다.
올해에 나는 61세다. 추운 겨울이든 더운 여름이든 모두 밖에 나가서 일을 볼 수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장에 가서 물건을 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부러워한다. 활기차고 기운이 넘쳐 보인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저에게 오늘이 있게 된 건 파룬궁이 준 복입니다!”
파룬따파는 나에게 건강을 주었고 새로운 삶을 주었으며 행복을 주었고 모든 것을 주었다!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큰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인류의 모든 언어를 다 써도 제자가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현할 수 없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구도에 감사드린다! 사부님의 크나큰 은덕에 감사드린다!
아직도 파룬따파의 진상을 모르는 세인들이여, 얼른 밍후이 간행물을 찾아 읽어보라. 파룬궁의 진상을 한번 알아보라. 파룬궁은 확실히 좋다. 사람을 구하는 좋은 공법이다! 파룬따파는 정법이고 인류의 희망이다!
원문발표: 2018년 1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7/3601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