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신앙에 관하여
해마다 법회문장을 읽어봤는데 많은 문장은 서두에서 수련한 후 변화를 말했다. 어떤 문장은 기적처럼 기사회생한 사실, 어떤 문장은 도덕이 승화된 사실, 어떤 문장은 지적장애로부터 총명하고 훌륭하게 됐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대법은 사람들에게 많은 확실한 혜택을 가져다줬다. 당초 많은 사람은 수련이 가져다준 아름다움을 체득한 후 대법 수련에 들어선 것이다.
개인적으로 당시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할 때 건강해지고 도덕성이 향상되고 은혜를 갚기 위해 걸어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의 인식은 속인의 감사하는 마음일 뿐이다. 수련은 경지와 인식을 제고해야 하기에 몇 년 수련 후에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 사회는 온통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투기하며 권세에 빌붙고 있고 취할 이익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하기 좋아한다. 보수를 받았고 단맛을 봤다면 더욱 기꺼이 배로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신앙도 공리적인 색채가 많아졌고 정신적 추구가 적어졌다.
어떤 사람이 불상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은 재난을 없애기 위한 것이고, 신전에서 기도하는 것은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절에 시주하는 것은 소원을 빌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고, 출가한 사람이 경서를 읽고 가부좌를 하며 선행하는 것도 자신이 무엇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반 사회가 이익을 추구하며 달리고 있고 모든 세인들이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이 진짜 수련인지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신앙에 만약 장엄함, 신성함, 경외함이 없고 복을 기원하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병을 치료하고 부자가 되게 기도한다면 필연코 경건함, 확고함과 충성심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 신앙은 취할 이익이 있고 재난을 피할 수 있으며 요구대로 다 들어준다면 이런 신앙은 바로 인간세상의 거래다. 그러나 현실 중 어떤 사람은 돈을 쓰고 향을 피우며 영험하지 않으면 불상을 던지고 어떤 사람은 부처에게 절을 했는데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마구 욕설을 퍼붓고, 어떤 사람은 병이 낫고 건강해지길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으면 불평을 부린다.
신앙이 인간세상에서 하는 거래인가? 혜택을 보고 이익을 얻은 후에야 믿겠는가? 신앙은 도대체 무엇인가? 수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깊이 사고해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수련해 인간세상의 혜택을 얻지 못했다면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수련 20년간 겪고 들은 일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주변 수련생이 박해당해 사망하기도 하고 일자리를 잃고 가정이 파탄되는 것도 있었으며 병(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박해 혹은 간접적인 박해를 받아 사망, 병업으로 사망한 것도 있음)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있다. 늘 이런 한 문제를 사고했다. 만약 수련해 인간세상의 혜택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수련했을까?
만약 현실 중 속인의 혜택과 이익을 얻지 못했다면 수련은 인간세상에서 노력과 감당밖에 없는데 그럼 계속 수련하겠는가? 계속 견지하겠는가?
몇 년간 생각했다. 이번 생은 수련만을 위해 온 것이고 아무것이 없어도 여전히 자신을 잘 수련하고 중생을 구도하겠다. 이것은 나의 영혼의 숙원이고 이익과 관계가 없다.
구약성경 중 ‘욥기서’를 보면, 욥이라는 한 노인은 가업이 번성하고 아들딸이 많고 하느님께 대해서도 아주 경건하고 일가족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날 사탄보고 욥의 전 재산을 빼앗고 그의 모든 아들딸을 빼앗아가는 동시에 이 노인이 몹쓸 병에 걸리게 하라고 하셨다. 욥은 비록 온갖 시달림을 다 받고 있지만 시종 하느님을 경외했고 믿었다.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나타나 욥이 깨닫게 해주셨고 원래 빼앗아갔던 모든 재산과 아들딸 및 건강을 다시 이 힘들고 존경할만한 노인에게 돌려주셨다.
이 이야기는 내게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응당 순수해야 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섞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왜냐하면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를 논하지 않으며, 보수를 바라지 않고, 명예 또한 바라지 않아 속인 중의 모범 인물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인데, 이는 완전히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의 수련도 마땅히 조건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수련의 본질은 우주특성에 동화하고 우주 중 좋은 사람, 각자(覺者)가 되는 것이므로 인간세상에의 혜택, 이익과 완전 관계가 없고 세속을 초탈해야 하며 사람 마음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추구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다
생명은 아래로 층층 내려오는 과정 중 욕망, 탐욕스러운 이기심이 생겼다. 우리는 굽이치는 세상의 욕계에 살고 있고 이익은 시시각각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몸은 물질의 속박을 받고 있고 본성은 욕망에 덮여있다. 속인사회에서 수련할 때 우리는 추구하는 마음을 정상적이고 크게 비난할 바 못된다고 생각하기에 추구하는 마음은 변이된 것이고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법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법공부하는 것과 법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사부님의 법을 배웠다고 자신의 불성을 내면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배워야 법을 얻을 수 있는가? 추구하는 마음을 없애고 혜택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글자 한 글자씩 보고 단어마다 마음에 와 닿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예를 들어 “공능은 다만 수련과정의 부산물일 뿐”[1]이라는 것을 배웠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어마다 마음에 와 닿게 한다면 병을 없애고 건강하며 마음이 편안하고 사업이 순조로우며 가정이 화목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혜택이지만 수련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층차를 대표하지 않고 수련의 과위(果位)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수련 중 심성 제고가 관건이고 심성을 제고하는 방면에 공을 들여야 한다. 마음은 근본이고 마음이 좋아지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좋아진다.
사부님 법리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가, 어느 경지까지 수련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생활형편이 조금 좋아지면 잘난 체하고 조금 나빠지면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고 수련인의 정념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할 때 어떤 때 법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법의 위력은 우리 몸에서 나타날 수 없는데 사실 이것은 자신의 문제다.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 우리는 안으로 찾아야 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시시각각 자신에게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것은 변이된 것이고 사악한 것이고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마음은 쉽게 알아차리지만 어디에나 다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인식하며 되도록 빨리 제거해야 한다.
추구하는 마음을 없애다
생명이 삼계에 들어오면 사상은 점차 오염되고 육신은 추구하는 마음에 뒤덮인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는 추구하는 마음을 자신이라고 생각해 그것을 벗겨버리기 싫어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싫어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명리, 편안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추구하는 마음은 우리의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우리의 사상을 조종하고 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으며 온갖 방법을 다해 우리를 영원히 인간 세상에 남겨놓으려 한다.
먼저 그것을 똑똑히 구분하고 혜안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야 한다.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전부 변이된 관념이 있는데 바로 이기심이고 자아를 보호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본성이 아니다. 진정한 본성은 완전히 우주 특성에 부합되고 무사무아(無私無我)한 것이다. 그럼 혜택을 바라는 마음은 바로 오염된 것이고 변이된 가짜 나다. 그것은 상처받을 때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은 만족했을 때 기뻐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가짜 나는 주의식을 속이고 우리의 머리에 ‘혜택을 받지 못한다, 속았다, 손해를 봤다, 사부님께서 관할하시지 않는다’ 등 생각이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이때가 바로 ‘진정한 나는 혜택을 추구하지 않고 진정한 나는 사부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 나는 나, 그것은 내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내적인 적이고 친구가 아니다’라고 각성해야 한다. 이것이 아주 관건적이다.
다음에는 그것의 해악을 인식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당신이 각종 구하려는 목적을 품고 와서 공(功)을 배우고 대법(大法)을 배우려고 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1]라고 말씀하셨다. 추구하는 마음은 바로 올바르지 못한 마음이다.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다면 활쏘기 표적이 바르지 못하고 달리는 차의 방향이 비뚤어진 것과 같다. 만약 제때에 바로 잡지 못한다면 갈수록 빗나가고 마지막에 남원북철(南轅北轍: 수레의 끌채는 남쪽을 향하고 바퀴는 북쪽을 향하다)로서 공연히 헛수고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거하기도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바꿔서 그것은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가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그것을 방임하는 것과 같으며, 우리가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을 자양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매번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이 관념에 따라 우리의 사상과 행동을 통제하게 가만 놔둔다면 호랑이를 길러서 화를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울러 그것을 제거하려면 시종일관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한다. 추구하는 마음은 아마 구세력이 음모를 꾸민 지 오래된 것이고 우리에게 강요한 것으로 아마도 수천 년 동안 점차 형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뿌리가 깊이 박혔고 높은 산과 돌처럼 됐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형성한 것은 관념과 시간의 누적이기에 그것을 제거하려면 절대로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관념을 제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매번 그것이 머리를 내밀 때 그것을 붙잡고 배척하고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매번 확고하게 부정해야 한다. 매번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고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자기 세계에서 역시 한 차례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아닌가? 정말 그럴 것이다. 추구하는 마음이 나오기만 하면 우리는 한번 철저히 소멸해야 하고 매번 단호하게 제거해야지 영합하고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되고 방황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에게 약간의 핑계, 한 치의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견정(堅定)할 수 있는 사람은 업을 없앨 수 있다.”[1]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법공부하면 정사(正邪)를 분별하고 지혜를 증가시키며 사견(邪見)을 없앨 수 있다. 그래서 법공부는 극히 중요한 것이다.
맺음말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심성의껏 마음을 닦으며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전통문화는 양심, 인의, 도덕, 굽히지 않는 기개를 제창하고 공을 탐하고 명리를 추구하며 신의를 저버리는 세속적 공리(功利)를 멸시한다. 오늘의 변이된 사회에서는 신앙도 세속화, 공리화되고 있고 신앙의 원래 신성한 가치와 각성의 정신, 교화의식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물욕이 하늘을 뒤덮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을 닦으려면 물질화, 공리화, 탐욕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앙은 그가 나에게 복숭아를 선물하면 나는 그에게 자두를 선물해 답례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영혼을 위해 귀착점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고 정신적 승화를 위한 것이고 생명의 영원함을 찾기 위한 것이다. 수련 중 사부와 제자의 관계는 원래 마땅히 순수하게 존중하고 의지하며 믿어야 하는 것이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상호 이익과 혜택을 주는 관계가 아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내 인식은 아직 아주 천박하다. 여러분은 더욱 깊이 교류해도 좋다.
사실 수련자가 대법 중 심성을 승화할 때 정신적 경지도 승화됐다. 물질과 정신은 같은 성질이므로 상응하게 신체 정황, 경제 조건이 모두 개선되고 더욱 좋은 상태로 동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대법의 위력이고 진정으로 수련하는 수련자 몸에서 체현된다. 만약 사부님께서 없으셨다면, 법이 없었다면,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사람이 추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원해 온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5]라고 말씀하셨다.
수련은 고생하고 마음을 닦는 것이고 추구하는 것은 불법(佛法)의 지혜고 정신적인 각성, 영혼의 고상, 어떤 속인의 혜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혜택을 바랄 때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6] “속인의 고락 생각하지 않음이 수련자요 세상득실 집착하지 않음이 나한이로다”[7]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8]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생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수련 자체가 바로 조용하고 편안한 것인데 또 무슨 인간세상의 혜택을 가지려 하는가?
약간의 소견이고 더 나은 고견을 바란다. 적절하지 않은 곳은 수련생의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도항-미국서부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서부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고하는 말(警言)’
[6]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마음고생’
[7]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삼계(三界)를 벗어나다’
[8]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2-정념정행(正念正行)’
원문발표: 2017년 12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25/3576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