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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서 착실히 수련해 정진하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다

글/ 핀란드 젊은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 과정에서 굽은 길을 걷고, 수련할 줄 모르던 데에서 할 줄 알게 된 과정을 적어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나처럼 빙빙 돌고 나서야 다시 걸어야 할 길로 돌아오는 일이 없길 바란다.

나는 대법과 인연이 있다

나는 법공부를 하고 무엇이 연분인지 알았다. 사부님은 ‘전법륜’ 1강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중시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연분이다.”[1] 기타 경문에서도 반복적으로 연분을 언급하셨고 특히 1999년 전에 “나는 오늘 이 연(緣)에 대해서 말하겠다. 무엇이 연인가? 이전에도 나는 이 문제를 설명한 적이 있다. 수련계에서는 재삼 이 연분, 연분을 강조하는데, 이 연은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우리 수련계에서 말하는 연, 그것은 짧은 역사 시기에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의 일생을 초월하여 몇 생, 심지어 더욱 긴 시간을 초월한다. 이 연분,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다.”[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련 중에서 부딪히는 일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수련 전에 속인 생활 중에서 겪은 많은 일이 오늘의 수련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수련 후 각종 일에 부딪힐 때 자신이 수련인이라고 떠올릴 수 있는지, 그리고 수련인의 각도에서 잘할 수 있는지가 지극히 중요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수련과 신화에 관심이 있었다. 4살 때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와 산책을 하다 할아버지께 질문을 드린 기억이 난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요? 왜 사나요?” 할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대답하셨다. “너는 아직 어리단다.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게다.” 아, 내가 노인이 되어서야 알 수 있겠구나. 이 일은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 신화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것이 오래 전에 정말로 발생한 일 같았다. 여행하면서 사찰, 사원, 교회를 보면 늘 들어가 보고 싶었고, 금빛 찬란한 불상은 볼 때마다 늘 눈물을 흘렸다. 천국세계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동경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교, 도교나 기독교 수련 이야기를 들으면 생활이 환상 같고 이 사회가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을 얻은 후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것이 법을 얻기 위해 다져진 것이고 수련의 길을 확고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알았다.

위험에서 벗어나 수련으로 다시 돌아오다

수련하면서 안으로 찾을 때 나는 사람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집착의 근원을 찾아 닦아내고 편해져 한시름 놓으면 얼마 후 또 다시 나타났는데 예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내 문제는 아무렇게나 막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도 많았다. 문제에 부딪히면 각종 이유, 핑계를 찾거나 마음대로 꾸며내 벗어나려 했다. 심지어 수련 중에서 수련생이 문제를 지적해도 틈을 탈 방법을 찾고 사부님 말씀으로 벗어나려 애썼다. 마치 상대에게 ‘법리는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아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려는 듯 했다. 상대 수련생의 말문이 딱 막혀버리면 우쭐거리며 즐거워하고 자신이 괜찮게 수련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대법의 표준에서 멀리 이탈했다.

장기간 옳은 것 같으나 옳지 않은 상태에 있으면서 각종 사람 마음으로 문제를 보며 점차 “생활 중의 고생을 자신에 대한 불공평으로 여겨”[1] 수련인의 표준과 갈수록 멀어졌다. 또 속인사회에서 유행하는 외계인이 인류를 파괴하는 전자게임, 인터넷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에 이끌려 점점 속인이 되어갔다. 수련생이 보고 문제를 지적하면 사부님의 관련 설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 수련생에 대한 대량의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눈으로 본 것은 모두 상대 수련생의 잘못이고, 남의 결점으로 자신을 비교하며 내가 수련을 잘했다고 느꼈다. 어떤 때는 수련하기 전보다 못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오랫동안 게임,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다.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밥 먹고 잠자는 외에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그곳에 쏟아 학업과 가정 관계가 긴장해졌다. 나는 그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전쟁 게임을 좋아했다. 그것은 완전히 폭력적인 마성의 산물이다. 그런 것을 하면 파괴와 살육의 쾌감에 빠져 마성이 끊임없이 강화되고 확대된다. 그때는 인터넷 소설도 즐겨보며 각종 판타지를 좋아해 각종 신비로운 상상에 빠져 있었다.

위험한 경지에 다가왔지만 다행이 수련은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고 사부님도 계속 점화해주어 어느 날 끝내 깨달았다. 소설에서 얼마나 기이하게 쓰고 인물들의 초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대법제자가 발정념할 때 입장하는 것만 못하다. 다른 공간을 아무리 훌륭하게 묘사해도 자신이 가부좌하면서 천목으로 어쩌다 조금 본 것만 못하다. 그런 소설들이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것은 속인이 지어낸 것이 아닌가? 어떻게 실제 수련과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을 알고 나니 소설 여기저기에 악당문화와 그것의 투쟁철학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인성 중의 선한 일면, 인생에 대한 아름다움 동경을 언급하긴 했지만 변이된 관념의 영향으로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그때 나는 애니메이션 보는 것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양성된 집착이다. 특히 일부 애니메이션은 연재 시간이 길어 늘 결론을 보지 못했다. 매주 새로 업데이트되면 마음에 토끼를 품은 것처럼 끊임없이 스토리를 상상했고 이런 집착은 끊임없이 강해졌다.

또 색욕심을 언급해 보겠다. 색욕이 지금의 서방사회에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핀란드는 높은 문명과 도덕이 있는 나라로 생각했지만 실제 상황은 엉망이다. 학교에서 보건 과목을 배우면서 나는 핀란드의 35세 이하 남성 7명 중 1명이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 숫자를 알고 정신이 붕괴될 지경이었다. 지금의 사람은 정말 구할 방법이 없구나!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남보다 뛰어날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색욕을 닦아내는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컸던 것은 밍후이방송의 ‘신전문화’ 프로그램이었다. 옛 사람은 어떻게 색욕을 대했는지를 전통문화의 많은 내포로 소개했다. 무엇이 진정하게 신이 사람에게 준 규범행위와 표준인지 분명히 알았고 대조가 있으니 자연히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어린 수련생과, 소년 수련생, 청년 수련생과 학부모 수련생은 모두 이 방송을 들어보기 바란다. 중국 역사 중의 왕후장상, 재자가인(才子佳人)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수련인이 아니더라도 들으면 아이들에게 바른 본보기를 세울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청소년들의 아이돌에 대한 집착을 닦아내는 데에도 좋은 점이 있다.

수련, 학습과 가정 사이의 관계를 잘 평형하다

한 대법제자로서 일상생활에서 수련, 학습과 가정의 관계를 잘 평형해야 한다. 이것도 쉽지 않은 과정이다.

나는 수련인이고 학생이며 집에서는 큰 형이고 어린 두 남동생이 있다. 어떻게 두 동생에게 좋은 본을 보이겠는가.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동생들에게서도 보였고 그들이 떼를 써서 짜증날 때면 흔히 내가 안으로 찾아야 할 때였다.

동생들이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부모가 되기 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부모는 그 과정에서 조금씩 아이에게 육친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각종 집착을 닦아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수련생이시다. 예전에는 늘 아버지의 이것저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고 정진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진정하게 아버지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대해보니 아주 깊은 법공부 기초가 없으면 육친정에 대한 집착을 닦아내기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많은 것을 해주었건만 자식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무슨 심정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집착심을 버리기는 정말로 아주 어려울 것 같았다.

아버지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니 아버지가 법공부에서 돌파해 육친정에 이끌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아버지는 정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모두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협의를 했다. 매일 4시에 일어나 한 시간 법공부하고 동공을 한 후 학교에 가기로 했다.

오늘까지 일주일밖에 견지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모두 어제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체적으로 제고하다

진정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할 때 간격, 부정적인 생각이 아주 빨리 없어졌다.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수련생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A수련생과 B수련생은 모순이 발생했다. A는 식당을 운영하며 협조인 역할도 했다. 식당 일이 힘들어 A는 대법을 실증하는 항목에서 기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B는 성격이 급해 일을 빨리빨리 한다. B는 A의 이런 상태를 보면 조급해하는데 둘은 자주 말다툼을 했고 아주 격렬할 때도 있었다. 늘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서 상대의 부족함을 찾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 모순에 점차 모든 수련생이 다 말려들어갔다. 당시는 단체 법공부가 끝나면 곧 ‘시장 바닥’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나는 그 모순은 나와 상관없다며 사람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1999년 이전에 법을 얻은 노제자들이다. 그 중 한 명은 노동교양소의 박해에서 정념으로 돌파해 나왔는데, 수련한 지 몇 년 안 된 신수련생인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끼어들겠는가 하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건은 첨예해졌는데 내 생각은 이랬다. ‘수련인이 왜 모두 이 모양이지? 왜 다른 수련생들은 다 불똥이 튈까 봐 무서워하지? 사부님은 경문에서 “그의 일이 바로 당신의 일이며, 당신의 일이 바로 그의 일이다.”[3]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모두 무관심할까?’ 점차 나는 단체법공부에 참가하는 열정이 예전만큼 높지 못해 근 반년을 단체수련 환경에서 이탈했다.

이 일에서 나는 자신의 사람 마음이 이렇게 저렇게 표현되는 것을 보았다. 처음 문제가 발생할 때는 두 수련생의 모순으로 표현됐지만 모든 수련생의 마음을 향해서 온 것이었다. 법에서 말하면 수련인은 문제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유사한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야 하며 있으면 얼른 고치고 없으면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모여 최근 모두의 태도에 대해 깊은 교류를 했다. 그 중 몇 수련생의 발언이 나를 크게 일깨워줬다.

C수련생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왜 이런 문제를 보게 됐을까? 내가 수련을 잘못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정법 수련의 평온한 에너지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C수련생은 선량했다. 문제가 발생할 때 타인의 잘못을 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안으로 찾았다.

D수련생은 나처럼 법을 늦게 얻었다. 그녀의 느낌은 이러했다고 한다. “우리 사이에 나타난 그런 강한 사람 마음은 저를 포함해 서양수련생마저도 반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단체 법공부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E수련생도 자신의 관점을 말했다. “타인의 부족한 점을 보았다고 단체 법공부와 교류에 참가하기 싫어한다면 수련의 결심이 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체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우리의 수련형식입니다. 제가 볼 때 법공부를 하러 오는지 여부는 수련이 확고한지 확고하지 않은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수련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의 표현으로 수련의 결심을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후 모든 수련생이 돌아가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 문제에서 전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냈다.

교류가 끝나고 우리의 수련은 전체적으로 향상됐다. 예전에 나타난 간격들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약해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과정은 좀 격렬했지만 확실히 한 가지 좋은 일이었다.

구세력을 경계, 부정하고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가다

법공부하면서 나는 구세력이 사부님 정법에 그들의 배치를 심어, 표면적으로는 신우주의 대각자 위덕을 성취시키려 한다고 하지만 실질은 그들이 하려는 일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수련 과정에서 대법을 통해 깨달은 서로 다른 층차의 법리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않으면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갈 수도 있다. 만약 잘못해도 인식하지 못하면 갈수록 법의 표준에서 이탈할 것이다.

내가 찾은 근본 집착은 사(私)이다. “사(私)를 위하는 것은 과거 우주의 근본 속성이었는바, 성주괴멸(成住壞滅)과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 속성이 가져온 필연성이었다.”[4]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요구한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5]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사를 가려내고 사를 닦아내야 한다. 가려내고 분리해 내는 법보는 사부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즉 안으로 찾는 것이다.

한 수련인이 안으로 찾을 줄 모르던 데에서 안으로 찾을 줄 알게 되면 점차 착실히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모든 집착의 뿌리다. 수련하면서 각종 사람 마음을 제거하면 ‘사’라는 물질은 끊임없이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제거된다. 만약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고험은 모두 수련인의 각 방면 자질과 능력에 따라 배치한 것이다. 향상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서 수련하기만 하면 반드시 올라올 수 있다.

수련인은 단번에 부처의 과위로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수련하는 중에서 점차 원만의 표준에 도달한다. 수련이 느린 것은 두렵지 않지만 멈춰 있는 것이 두렵다. 일시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집착에 빠져 넘어가지 않으려 하고 수련하지 않으려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 보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수련의 길은 확실히 비할 바 없이 자비롭다. 매 층차에서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이 있고 우리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넘어가려고 하면 모두 넘어갈 수 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한 수련 길을 말하는 것이다.

구세력이 배치한 것은 무엇인가? 내 층차에서 보면 구세력은 사(私)에서 출발해 우리가 수련해 올라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배치한 것은 파괴적인 거대한 난, 거대한 관이다. 수련인의 정념, 신의 일면을 억제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 사람의 일면으로 각종 고험을 감당하게 한다. 한 수련인으로서 대법제자의 정념이 없다면 우리의 감당력, 인내력과 각 부분은 속인과 차이가 없다. 이렇게 보면 구세력은 더 높이 깨달으라는 미명하에 아예 수련해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한 수련인으로서 자신이 넘어야 할 관이든 구세력이 강제로 가한 난이든 모두 사람 마음을 겨냥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구세력 교란을 돌파할 가장 좋은 방법은 대법에 따라 착실히 수련하고 법공부를 강화해 정념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없고 강한 사람 마음의 표현이 없으면 구세력은 틈을 탈 수 없다.

한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사건의 표면에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수련자의 각도에서 사건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수련 초기에는 ‘전법륜’이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책인 줄 알았지만 수련과정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라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 것과 같다. 끊임없는 수련에 따라 나는 ‘전법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이 책은 우주 근본에서부터 우주 표면을 포함했고, 일체 시간, 공간, 서로 다른 층차와 경지의 생명이 따라야 할 법을 포함했으며, 모든 불도신(佛道神)이 깨달은 일체를 포함했다.

수련이 향상됨에 따라 우리는 동일한 법에 대한 인식이 끊임없이 승화한다. 신심이 부족할 때 우리는 모 사건을 예전에는 어떻게 인식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대하는지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자신이 향상된 것을 느껴, 자신을 격려해 수련의 신심과 결심을 강화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같지 않은 시기의 설법에서 서로 다른 경지의 생명이 수련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법시기 대법수련자로서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 생명의 의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짊어진 것 감당한 것은 또 무엇인가?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경문에서 이미 명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은 수련인이다. 이 말은 당신의 과거, 예전 한 때, 혹은 당신의 표현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말은 당신의 본질, 당신 생명의 의의, 당신이 짊어진 책임, 당신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래야만 당신은 비로소 진정한 대법제자이다.”[6]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사부님의 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가? 넘어가지 못하는 난관에서 사부님께 가지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신사신법(信師信法)이 수련 중에서의 구체적인 체현이다.

예전에 나는 일사일념이 법에 부합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최근 법공부를 강화하고 나서 예전의 그런 상태가 강요라는 것을 알았다. 진정으로 법리를 이해하면 일사일념이 법에 부합하는 표준에 도달한다. 이것도 수련인이 현재 심성이 있는 경지의 체현이다. 수련 중의 일체 상태는 심성의 향상으로 자연히 변화가 일어난다. 상태를 개변하도록 자신에게 강요하기만 하고 심성이 올라가도록 요구하지 않으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유심연공(有心煉功), 무심득공(無心得功)”[1]의 더 깊은 한 층의 뜻일 것이다.

최근 법공부를 강화함에 따라 대법 수련은 엄숙하고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층차가 올라가야 할 때에는 예전의 문제를 보는 마음으로는 올라가기가 힘들다. 층차는 끊임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같은 문제에서도 요구하는 바가 다르다. 수련인이 향상되려면 같은 문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해야 한다. 높은 층차의 견해는 낮은 한 층차의 견해보다 승화한 것이고 낮은 한 층차보다 우주특성에 더 가깝다.

몇 마디를 더 언급하다

나는 게임에 빠진 상태에서 벗어나왔다. 깊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법공부하겠다는 염두도 갖기 어렵다. ‘전법륜’을 키보드에 올려놓아도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책을 치우고 계속 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어린 제자들은 부모 수련생이나 친구 수련생이 타이를 때 모든 관념을 내려놓고 정념과 법에 대한 믿음과 수련에서 닦아낸 자비로 대한다면 효과가 다를 것이다. 문제는 두 가지 방면에서 본다. 하나는 어린 제자가 게임에 집착하고 다른 하나는 어른 수련생이 육친정에 집착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쌍방 모두 수련인으로서 한쪽이 완전히 법의 표준에 부합해 속인을 초월한 층차에서 문제를 본다면 이런 일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같은 이치다. 아직도 게임,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에 집착하는 어린 제자에게 말하고 싶다. “대법을 수련하는 기회는 한 번 밖에 없다. 길고 긴 생명 중에서 우리는 모두 법을 위해서 왔다. 이 법을 얻기 위해 생생세세 우리는 무수한 고생을 겪고, 여러 고험과 난관을 겪으며 사부님과 연을 맺었다. 이 가장 좋은 시절을 소중히 여기고, 이 마지막 기회를 소중히 여기자. 수련생과의 연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정진하라! 정진하라!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들이여! 천국 중생은 우리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집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2-2002년 워싱턴DC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5-2004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

 

원문발표: 2017년 12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10/3577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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