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익명 수련생
[밍후이왕]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橫看成嶺側成峰,遠近高低各不同。不識廬山真面目,只緣身在此山中).”
‘제서림벽’이란 이 시는 소동파가 친구와 함께 여산을 구경하고 난 후 소감을 적은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사람들이 처한 지위가 다르고, 문제를 보는 출발점이 다르므로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단편성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물의 진상과 전모를 인식하자면 반드시 주관적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 시를 다시 읽어 보니 수련의 각도에서 다른 느낌이 들었다. 소동파는 여러 해 부처님을 믿었고 역시 수련인이기도 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는 수련의 이치가 포함됐는데 이 시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그의 진정한 함의란 곧 인간세상의 일체를 똑바로 보려면 반드시 수련을 거쳐 사람이 집착하는 명예(名), 이익(利), 정(情)에서 벗어나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많을 때 표면적으로는 주관적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사람이란 이 층차에 있는 것이며 사물의 본질을 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속인은 ‘명(名)’을 분명히 보아내지 못하고 ‘명’은 사람을 속인의 층차로 끌어가기에 고층차로 돌파하는 예리한 무기를 가질 수 없다. 명에 대해 어떤 사람은 중하게 보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본다. 명을 위해 어떤 사람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수단을 쓰고 어떤 사람은 비열하고 저급적인 수단을 쓴다. 각종 직업, 각종 사회계층, 각종 사람들, 다양한 민족에게는 모두 각기 다른 ‘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이다. 간혹 사람은 자신은 의식이 분명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모두 속인의 층차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명’이라는 이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속인은 ‘이(利)’를 분명히 보아내지 못한다. 이익을 위해 고통스럽게 서로 물고 뜯는다. 개인 간의 돈 빌리는 문제에서부터, 나라 사이의 큰 전쟁 충돌에 이르기까지, 혹은 백만 거액이거나 혹은 파리 머리만한 작은 이익, 혹은 규율을 지키거나 아니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모험을 하기까지, 얻은 자는 기뻐할 것이요, 잃은 자는 슬퍼할 것인즉 너무나 복잡하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이다. 그들은 모든 이익은 덕에서 변화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내지 못한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얻을 때, 얼마를 얻으면 그만큼 잃는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익’이란 이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속인은 ‘정’을 분명히 보아내지 못한다. 정에 묻혀 고생이 막심하다. 자신을 위해, 혈육을 위해, 친구를 위해 짧기로는 며칠, 몇 개월 길기로는 몇 년, 일생 동안이다. 혹은 깊거나 혹은 얕게, 슬프거나 즐겁게, 혹은 모였다가 혹은 헤어지는데 천변만화 하는 표현이다. 이 역시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이다. 그들은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은 원래 바로 한 차례 연극이며 일체 모두가 인연으로 변화하고 선악을 막론하고 인연이 닿으면 모이고, 인연이 끝나면 헤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정’이라는 이 ‘여산’ 속이 있기 때문이다.
수련하지 않으면 명리정이라는 ‘여산’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여산’의 진면목을 분명히 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리훙쯔 사부님의 ‘홍음-원만공성’을 읽어보자.
“명리정(名利情) 닦아버리고 원만하여 창궁에 오르네 자비로 세계를 보나니 그제야 미혹 속에서 깨어나네.”
원문발표: 2017년 10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0/12/3552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