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에 발생한 일부 일로 원망하는 마음에 대해 새로운 체득이 있다.
나는 물류회사에서 프로젝트 부분 책임자다. 조례를 열 때 팀장이 우리가 맡은 일을 잘하지 못했다며 그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류가 적을 때를 말한 것이라고 했다.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닌가? 매일 제때에 다 나누어 주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대로 나는 억지로 참았다. 수련인이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일하면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억울함을 좀 당하는 게 뭐라고! 괜찮다. 나는 조용히 자신의 사상을 관찰했다. 억울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팀장에게 원한이 있다. 나를 모함하다니, 물류를 제때에 나누어 주었는데도 생트집을 잡다니, 게다가 나는 그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물건이 많을 때 나는 확실히 팀장의 요구에 따라 했다. 그는 왜 보지 못하는가? 나는 단번에 원망하는 마음을 잡아냈다. 왜 이토록 강한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 나는 계속해서 더 깊이 파보았다. 나는 왜 팀장을 미워하는가? 내가 이익에 집착하는가? 아니다. 명에 집착하는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일종 승복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돼 팀장이 나를 모함한다고 여겼다. 나는 자기 생각과 작업 방법을 중시하고 좋다고 느끼며 문제가 없어 순조롭게 물류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팀장의 방법은 물류가 적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사존의 법으로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1]으로 수련해야 한다. 나는 자신의 인식, 자신의 일하는 방법, 자신이 있는 경지의 깨달음을 너무 중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모두 자아의 범위다. 집착했다. 중하게 봤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과 모순, 분쟁이 발생해 간격이 생겼고 이런 것은 모두 자신을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는가? 나는 사존의 한 단락 법이 생각났다. “어떤 신(神)이 방법을 제출했을 때, 그들은 급급히 부정하거나, 급급히 자신의 것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른 신이 제출한 방법의 최후 결과가 어떠한지를 먼저 본다. 길은 같지 않으며 매 사람의 길은 모두 같지 않은바, 생명이 법 중에서 깨달은 이치는 모두 같지 않다. 그러나 결과는 틀림없이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결과를 보며, 그의 결과가 도달한 것, 정말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두 동의하는데, 신(神)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어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또 조건 없이 묵묵히 보완해주어 그것이 더욱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문제를 처리한다.”[2]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팀장의 방법과 요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나의 방법과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가 같은가? 같다. 같다면 왜 팀장의 요구대로 할 수 없는가, 꼭 나의 방법대로 해야만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자신에게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팀장의 요구대로 하면 아무런 모순이 없지 않은가. 또 팀장의 작업도 지지하는 것이고 얼마나 좋은가. 나는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일에도 좋고 마음도 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 생각과 일하는 방법을 버리고 팀장의 요구대로 하기로 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나는, 원망하는 마음은 붙을 곳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에 집착하여, 명이 상해를 받으면 명예를 손상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을 것이다. 이익에 집착하면 이익을 손해 보게 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을 것이다. 정에 집착하면 가족 친지가 잘 대해주지 않아 감정이 보답을 얻지 못할 경우에 잘 대해주지 않은 친지에게 원한을 품게 될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면 자기 생각, 관점, 작업 방법이나 어떤 일에 대한 견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아 모순이 생길 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면서 원한을 품게 될 것이다. 원망하는 마음을 제거하려면 먼저 이런 집착을 찾아서 닦아내야 한다. 그러면 원망하는 마음은 자연히 없어진다. 내가 만약 ‘무사무아’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다른 사람과 모순이 발생하겠는가?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할 때는 원한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무엇도 집착하지 않으면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게 된다.
나는 더 생각해봤다. 내가 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나? 있다. 아내다. 나는 아내에게 좀 불만이 있다. 내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우리 집에서 나가게 핍박해 부모님이 낡은 집에서 사신다. 그 후부터 나는 아내를 예전처럼 잘 대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나는 두 가지 정이 상처받은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모자의 정이다. 아내가 어머니를 잘 대하지 않아 효자인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나는 부부의 정이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다. 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나를 남편으로 여긴단 말인가? 터놓고 말하면 아내가 나의 어머니께 좀 잘할 것을 추구했다.
아내의 행위는 또 나의 관념 하나에 상처를 줬다. ‘부모님께 효도한다.’ 나의 부모님께 잘하지 않으면 좋은 마누라가 아니라고 여겨 분노가 생겼다. 원인을 찾으면 해결하기가 쉽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내가 하면 된다. 왜 아내에게 강요하는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은 상관할 수 없다. 관여하려고 해도 관여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개변하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도 방법이 없다. 선(善)을 권할 수밖에, 듣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집착해도 소용없지 않은가. 아내에게 강요한 관념을 나는 단번에 포기했다.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나도 그것을 갖지 않으련다.
아내가 나에게 잘 대하기를 구하고, 어머니께 잘 대해드리기를 바랐다. 이것은 정을 구한 것이 아닌가? 사심이다. 나는 정말로 아내가 나에게 잘하고 어머니에게 잘하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인가? 사람은 각기 운명이 있다. 모든 것은 인연 때문이다. 선연이 있고 악연이 있다. 억지로 구해올 수 없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생명을 위하는 좋은 생명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지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내가 가지려는 것이 없다. 사부님은 제자에게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 진정으로 가지려는 것은 무사무아, 원하지도 구하지도 않고 청정무위(清淨無爲)로 귀진(歸真)하는 경지가 아닌가. 아내가 어떻게 하든 나에게 무슨 영향이 있는가? 나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없는가?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 기왕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내가 어떻게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신경 쓰지 말자. 나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도 아내에게 원한을 품을 필요가 없다.
더는 아내에게 원한을 품지 않자 갑자기 부부의 은혜가 생각났다. 나는 생각해봤다. 나는 아내에게 은혜를 입었다. 나를 위해 후대를 낳고 딸을 키워주었다. 은혜가 있으니 보답해야 한다. 어떻게 보답하는가? 조건 없이 잘 대해주자.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배려하자.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녀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상관없다. 집착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무사무아에 도달해야 진정으로 순수하고 바른 선(善)이 나올 수 있다. 사심이 있고 구하고 있을 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선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선하지 못한 것만 나올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 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년 8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8/19/3527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