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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한다’의 깨달음: 남을 자기와 똑같이 대한다

글/ 타이완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 중 무사무아로 수련한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이렇게 몇 년을 수련했어도 늘 비자각적으로 습관적인 자아를 수호했다. 이 기점에서 안으로 찾고 표면에서 찾았지만 심층에는 깊은 집착과 혹은 후천관념이 진정으로 교란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간절한 기대와 법 중의 박대정심한 법리가 우리에 대한 요구에 도달하려면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세 가지 일을 모두 하지만 표면상에서는 마치 잘하는 것 같고, 교류할 때는 말도 줄줄이 잘하고 항목도 착실하게 잘하는데 내심에서는 ‘무사ㆍ위타’ (爲他)의 요구와는 거리가 요원한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밍후이왕의 7월 11일의 한 편의 문장 ‘관념을 바꾸고 기점을 바로잡으면 천지개벽의 변화가 나타난다’에서 제기한 ‘이전의 위사인 나를 ‘0’으로 보고 자신이 잘하지 못해도 지금부터 자신을 위타(爲他)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은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새 우주의 위타(爲他)의 경지에서 탄생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위타(爲他)의 경지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오늘 자신의 이전 관념을 버리고 직접 위타(爲他)의 기점에 선다.’

이 문장을 읽은 다음 마치 암흑 중에서 하나의 광명의 등대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성장하는가? 어떻게 이전의 관념에서 뛰쳐나올 것인가?

고심한 사색을 하고 법공부하여 사부님께서 알려주신 무사에 도달하려면 우선 진선인에 동화해야 한다. 깨달았으면 곧 실천하는 것이다.

1. 어떠한 관념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본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한 생명이 진정으로 중대한 문제에 관련하여 어떠한 관념을 갖지 않고 문제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자신을 주재(主宰)할 수 있다. 이런 청성(淸醒)은 지혜이며 일반인의 이른바 총명(聰明)과는 다르다.”[1]

어느 교류 중에 모 수련생이 그의 일에 대한 인식을 말한 후 사후에 갑 수련생이 말하기를 “그는 왜 상대방을 믿지 않는가?”, 을 수련생이 또 말하기를 “그들은 친분이 좋은 분들이 아닌가?” 라는 말을 듣고 ‘수련생이 그의 인식을 말했을 뿐이니 당연히 마음에 생각이 없어야 하는데 후천의 관념이 움직인 것이다’ 라고 깨달았다.

2. 안으로 찾아 오직 자신을 찾고 다른 사람의 요소는 제쳐 놓는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시기를 “모순이 생길 경우 각자 나름대로 안을 향해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 관계없이 말이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 당신이 모두 자신을 찾는다면 당신은 문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2]

나와 모 수련생은 장기간 항목을 같이 했다. 시간이 오래되니 서로 각자의 의견이 있었고 해결하려고 하니 상대방은 피하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모순이 있을 때마다 마음에 불평이 매우 많았다. 마음속으로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모두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야하고 그럼 당신은 모두 잘못이 없는 것인가?’ 내가 안으로 찾았는데 한 층을 찾았으나 더는 찾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물러서면 좋을 것이다’라고 했으나 모순은 여전했다.

어느 날 갑 수련생이 “물러서는 것은 문제 해결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을 수련생은 “마음이 동했으면 아직도 자신에게 부족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인데 안으로 찾는 것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안으로 찾으니 수련생에 대한 정이 중한 것으로 자기의 표준으로 그를 대했던 것이었다. 교류할 때 오직 그의 부족한 점과 자기의 감수만 말하고 상대방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고, 완성해야 할 항목만 중시한 것이다. 안으로 찾을 때 머리에 그가 나에 대해 귀찮아하는 표정이 떠오르는데 즉각 한쪽으로 피하면서 계속 자기의 뿌리를 캤다. 내가 그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관심을 갖는 정을 보았고 상대방이 진상을 말하는 일이 적은 것을 걱정했던 것이었다. 진상을 말하는 것이 많고 적음을 원만의 표준으로 삼는 하나의 구하는 위사의 마음이었다.

3. 남을 대할 때 곧 자기를 대하는 것처럼 한다

수련생이 교류할 때 말하기를 (1) 진실해야 한다. 어떻게 진실할 것인가? 첫째는 남을 대할 때 자신인 것처럼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실은 먼저 자신의 내심으로 진실해야 한다. 성실하게 자기를 대하고 진실한 말을 하고 진실한 일을 한다. 어떠한 일에도 이렇게 자기를 대한다. (습관을 양성한) 후에는 남에게 대하는 것도 곧 자기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할 수 있을 때 일마다 남을 진정으로 대할 때 당신의 선은 이미 나타난다.

(2) 응당히 자신에게 선하게 대한다. 자기 자신에게 공격하지 않는다. 자신을 너무 질책하거나 낮게 여기지 말고 그렇게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다. 자신의 내심에서 출발하여 자신에 대하여 진·선이 되어야 한다. 그런 후 다른 사람도 곧 자기와 같이 대한다. 남이 당신에게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하더라도, 당신의 이익을 손상했다 하더라도 남을 용서한다. 당신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곧 선을 실천할 수 없다. 당신이 정말로 남을 용서할 때 곧 진정으로 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선 중에는 용서가 있다. 만약 용서할 수 있으면 선은 그림자 같이 따라다닌다. 왜냐하면 능히 용서할 수 있으므로 언제나 어떤 일과 어떠한 사람도 간단하게 선을 할 수 있는 것이 용이해진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일종의 홍대(洪大)한 관용(寬容)이고, 생명에 대한 자비이며, 일체를 모두 선의(善意)로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인간의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3]

(3) 참을성, 어떻게 하면 참을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성실하고 관용적이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고 남의 감수를 고려한다면, 또 문제에 부딪치면 우선 안으로 찾고 항상 자신을 수련한다. 그 후에는 당신이 또 참을 수 있으면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당신의 마음을 동하지 못하고, 어떤 일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며, 아무것도 당신을 능히 고험하지 못하고 무엇도 당신의 심성을 건드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늘 당신에게 나쁜 일을 하더라도 모두 선의로 이해할 수 있고 또 능히 고통을 감수할 수 있으면 일이 발생해도 당신은 다른 사람을 곧 양해한다. 이렇게 하면 또 무엇이 당신의 참을성을 필요로 하겠는가? 당신은 이미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주의 과거는 사(私)적인 것으로, 사람을 두고 말하면, 정말로 관건적인 시기에는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정법(正法)을 시작할 때, 일부 신들은 나에게 ‘당신만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씁니다’라고 했다. 당신들이 들어도 불가사의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대법이 육성한, 다른 사람을 위한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은 역사에 따라 결속된다. 그러므로 한 생명으로서, 일할 때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관용을 표현할 수 있음은, 기점이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4]

이를 명백하게 알게 되고 자신이 ‘0’에서부터 법을 스승으로 ‘위타’를 공부하면 진정으로 무사무아의 생명으로 성장한다.

한 점의 체험이므로 부당한 곳은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허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유럽법회설법’[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4]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원문발표: 2017년 7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23/3511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