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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주의하지 않았는데 왜 일이 생기지 않을까

/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생 가운데서 아직도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많은 행위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이를테면 핸드폰으로 진상 전화를 걸고, 위챗으로 진상을 알리는 가운데서 말이다. 밍후이왕에서 거듭 강조한 안전 원칙을 분명하게 위반하는 일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 때문에 법에 있지 않는 이런 행위가 줄곧 시장을 갖고 있는가? 많은 원인 중에서 가장 큰 하나의 이유로는 그가 이렇게 해도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런 사람들이 줄곧 요행을 바라고 일을 처리하는 구실과 남을 미혹시키는 상징이 됐다. 왜냐하면 아직 일이 생기지 않았기때문에 이런 사람은 스스로 정념이 강하다고 여기며, 사람을 따라 배우고 법을 따라 배우지 않는 사람도 그가 정념이 강하다고 여기면서 무작정 따르고 흉내 낸다.

실은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전 방면에 주의하지 않아 나타난 일은 각 지방에 많고도 많아 어떤 것은 대법제자의 정체에 무척 큰 손해를 빚었다. 단지 많은 사람은 남에게 생긴 일을 교훈과 거울로 삼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은 안전에 아예 주의하지 않는데, 지금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이 나중에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일이 생겨 손해를 당할 때에 가서야 깨어나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여기에서 일부 수련생과 내가 본 안전에 주의하지 않아도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일부 원인을 교류하고자 하는데 우리 함께 이 방면의 장애를 타파해, 구세력의 배치와 박해를 부정하고, 명석하고 이지적으로 법에서 우리의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걸어 불필요한 손해를 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1. 우리를 위한 사부님의 감당과 보호를 자신의 정념이 강한 것으로 잘못 여기는 것

밍후이의 안전 요구를 심각하게 준수하지 않는 행위: 예를 들면 대륙 수련생은 자기 집에서 진상 전화를 걸 때 자기 집의 와이파이로 위챗에 접속하는 등이다. 어떤 사람은 일이 생기기 전, 일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준수해야 할 그런 안전 요구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안전 수칙대로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기며,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자신의 정념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이런 잘못된 방법을 소개하고 추진함으로서 밍후이왕의 각 방면의 안전 요구를 부정한다.

사실 우리가 곰곰이 안으로 찾아보면 이런 행위의 표현 배후에는 사람 마음과 집착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시심, 환희심,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 자신만 옳다고 여기는 마음 등등이다. 호시탐탐 노리는 사악은 여태껏 수련인의 빈틈을 노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수련에 이렇듯 뚜렷한 빈틈이 있다면 그건 사악으로서는 바라는 일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자비로우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사람마음을 버리고 제고해 올라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사부님께서는 거듭 우리를 위해 감당하시며 우리에게 제고해 올라올 기회를 주신다. 사부님께서는 각종 방식으로 우리를 점화해 주시며, 우리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인식하고 집착과 사람마음을 닦아 버리길 희망하신다.

이러자면 시간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기까지 인식한 것은 일부 수련생에게 뚜렷한 잘못이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안전에 주의하지 않지만 일이 생기지 않는 원인 중 하나는, 사실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와 감당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는 정념이 강하고 자신이 고명하고 대단하기 때문이라고 잘못 여기고 있다. 사실 이 자신을 높이 두는 마음 자체 역시 커다란 누락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부님께서는 충분한 기회를 주실 것이고, 각종 방식의 점화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것이다. 예를 들면 밍후이왕에 이 방면의 교류 문장이 나타나고. 수련생도 서로 일깨워 주거나 속인의 입을 빌어 전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의지는 사악과 자신이 높다는 마음에 막혀 버려 의견을 듣지 않고 안으로 찾지 않으며, 심지어 사부님 점화를 모두 교란으로 여기고 안으로 찾지 못하거니와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신이 정념이 강하다는 데만 집착하고 안전은 고려하지 않으며 굳이 자기 고집대로만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이 우주 중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으며, 당신 자신이 가지려 하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법신이 당신을 저지할 것이고, 당신을 점화(點化)해 줄 것이지만, 당신이 늘 이런 것을 보고는 당신을 더는 상관하지 않는데, 남을 강박하여 수련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당신을 강박하여 수련하게 하거나 당신을 핍박하여 수련하게 할 수 없다. 당신 자신에 의거해 진정하게 제고해야지 당신이 제고하려 하지 않으면 누구도 방법이 없다. 이치도 당신에게 말해 주었고 법도 당신에게 말해 주었는데 당신 자신이 여전히 제고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럼 당신은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당신 자신이 가지려 한 것이기에 法輪(파룬)도 상관하지 않고, 나의 법신도 상관하지 않는데, 보증코 이러하다.”[1] 충분한 기회를 주었는데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안으로 찾으면서 그 중의 사람 마음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나중에는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주게 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우리 눈으로 직접 본 교훈은 너무도 많고 너무도 침통하다.

많은 사람이 안전에 주의하지 않고도 일이 생기지 않는 그것은 사부님께서 개과할 기회를 주신 것이지 자신의 정념이 강해서가 아니며, 그렇게 한 배후는 집착과 사람마음이다. 이지적이지 못한 자체가 바로 정념이 강하지 않은 표현이며, 이지적이지 못한 것은 정념이 강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근본적으로 고난 속에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정념이 강할 때면 두뇌가 명석하고, 이지가 지혜로우며, 심리 상태가 자비롭고 자상하고 늘 수시로 안으로 찾아보며 남의 의견을 들어준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정말로 이런 상태에 도달했는가?

나 자신에게는 또 절실한 체험이 있다. 안전에 심각하게 주의하지 않을 때 표현되는 상태는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외하고도 또 정확하지 못한 관념이나 마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악한 생명에 통제를 당하거나 사악한 물질에 포장되어 자신의 통제 능력을 상실한다. 그 때면 정말이지 무엇이든 다 감히함부로 한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정념이 강한 게 아니다.

예를 들면, 나에게는 먼저 아주 좋지 못한 습관이 있었는데 전동차(전기오토바이)를 탈 때 교통신호를 잘 무시했다. 남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했으며 오래 되니 나쁜 습관으로 양성되어 자신도 느끼지 못했다. 이전에 밍후이왕에서 수련생의 이 방면에서의 교류를 보았다. 한 때는 교통 신호를 무시하는 건 나쁜 것으로서 한 수련인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임을 의식했지만 그 때가 되면 또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차가 없으면, 또 남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나간다. 어떤 때는 시간을 아끼려고 그 때면 더구나 당연하게 교통 신호를 무시했다. 잠재의식 가운데는 남들이 모두 이렇게 하는데, 다시 말하면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첫째는 자신이 중시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회상해 보면 당시 자신이 매번 교통 신호를 무시할 때 자신의 두뇌는 흐리멍덩하고 마음속에는 하나의 물건이 나를 일초도 다 기다리지 못하게 만들어 자신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꿈에 빨간 화물차가 전동차를 들이박았다. 깨어난 후 나는 발정념으로 박해를 부정했다. 대낮에 나는 사거리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갈 때 정말로 빨간 화물차를 보았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어 위험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 나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정념이 강해서 박해를 부정했다고 생각하면서 교통 신호를 무시한 자체가 크게 틀렸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담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한 동안은 매번 내가 전법륜을 들고 무의식 중 책장을 넘기면 늘 이 한 마디를 보곤 했다. “이 생명체는 갑자기 죽어 버렸다”[1] 연속 몇 번이나 이러했지만 나는 주의하지 않다가 이후에 횟수가 많아지자 경각하게 됐다.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점화해 주시는 게 아닐까? 나에게 생사를 내려놓으라는 것일까? 생각하고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우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전동차를 타는 안전 방면의 일을 점화해 주시는 게 아닐까? 발정념 때 나는 이 방면의 발정념을 주의했다. 하지만 교통 신호를 무시하는 자체를 나는 전혀 중시하지 않았고 정말로 무슨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때가 되면 나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은 남보다 뛰어나고 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걸 보시고 하루는 단체 법공부가 끝나고 교류할 때 수련생들은 무슨 일인지 차를 타고 교통 신호를 무시하는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현지 두 수련생이 탄 오토바이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련생이 신호등을 무시해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생들은 말했다. 교통 규칙을 무시하고, 안전은 뒷전으로, 함부로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것은 당문화 중에서 표현되는 대륙 사람의 한 가지 보편적인 현상이며,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통쾌함만 도모하는 심각한 이기적인 행위라고 지적했다. 한 노수련생은 기사인데 차를 오래 운전했기에 중국 대륙인의 이런 이기적인 행위에 대해서 깊은 체험이 있는지라 연속 몇 번이나 말했다. “지금의 사람은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므로 남을 생각할 수 없고 너무 이기적입니다.” 내가 들으니 갑자기 나를 말하는 것 같아 대번에 지나간 일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한 번은 내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날 때 맞은 편에서 급히 달려오던 차 운전 기사가 깜짝 놀라서 화난 김에 빵빵 경적을 급히 누르고는 높은 소리로 욕하던 정경이 떠올랐다. 나는 이런 행위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쁜지 대번에 의식했다. 그건 전혀 수련인의 행위가 아니며 심지어 좋은 사람의 행위도 아니었다.

그 때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둘 바를 몰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이런 행위가 얼마나 두렵고 엄중한지 마음속으로부터 인식했다. 그 때 나는 큰마음을 먹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초래될 결과를 따지지 않으며,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나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렇게 인식했을 때 나를 감쌌던 혼탁한 물질이 그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부터 나는 교통신호를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신호등을 기다릴 때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가끔 어떤 전동차가 앞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 씽하니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나는 이끌리지 않았고, 어떤 때는 나 혼자 남아서 거기서 기다려도 푸른 신호등이 켜지지 않으면 나는 절대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나는 알고 있었고, 수련인으로서 교통규칙을 지키는 것은 적어도 내가 해야 할 것이며, 남을 배려하고 안전에 주의하는 것 역시 실은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체는 모두 우리가 홀시할 수 없는 수련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명백해 진 후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깨닫지 못할 때 각종 방식으로 거듭 점화하시고 일깨워 주신데 대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 사장님도 이전에 우리에게 절대 신호등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깨워 준 바가 있지만 그때는 집착하면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음) 사부님께서는 나를 위해 거듭 감당하시고 보호해주시면서 나에게 잘못을 인식하고 이기심과 집착을 버리게 함으로서 내 관념을 개변하고 그런 난을 없애주셨던 것이다. 어쩌면 당초 사악은 정말로 내 이 방면의 틈을 타고 들어와 잔인한 수단으로 내 육신을 빼앗아 가려 했을지도 모른다.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주 오랫동안 자신은 정말 명석하지 못하고 이지적이지 못했다. 함부로 교통신호를 무시할 때, 정말로 사악한 생명에 조종당하거나 사악한 물질에 감싸인 듯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오히려 자신이 담이 크고’, ‘정념이 강한 것같았다. 당신이 보라, 나는 날마다 모두 감히 교통 신호를 무시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많은 방면에서 뚜렷하게 밍후이왕의 안전 요구를 위반할 때, 그건 우리가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안전수칙의 요구를 준수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내고 굳이 함부로 할 때, 그건 정말로 고난 속에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당()문화의 중독 가운데서 양성된 악습이다. 이기적이고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 게으름 등 마성을 버리지 않으면 그로부터 사악이 꼬리를 잡고 우리에게 악독한 수단을 쓰려 할 것인즉 이때의 우리의 이지적이지 못한 언행이 바로 사악의 통제로 비롯된 것이다.

이때에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감당과 보호를 절대 자신의 정념이 강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개과의 기회이니 반드시 중시해야 하고, 반드시 어떠한 의견이든 들어줘야 하며, 반드시 안으로 찾아야 하고, 제때에 불량한 그런 행위를 고쳐야만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서 각 진상 항목의 협조인 수련생이거나 홍보하는 수련생은 반드시 절충 없이 밍후이왕의 안전 요구를 집행할 것을 건의한다. 자신이 몸소 실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신수련생에게 강조하고 교류해야 한다. 더욱 많은 수련생의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책임이며 경지의 체현이다. 해냈다면 그야말로 공덕이 무량한 것이다.

2. 분명히 안전에 주의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일이 생기지 않은 일부 사람은 사악에게 이용당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거듭 뚜렷하게 안전의 요구를 위반했지만 일이 생기지 않는데 두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특수 배경이 있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라, 누구라야 비로소 뚜렷하게 안전을 위협하는 그런 일을 거듭 고취하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가장 유리한가? 물론 대륙에서는 특무가 이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고 파악한데 따르면 이런 상황은 많이 보이지 않으며 이런 사람은 식별하기가 쉽다. 이 역시 본문에서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는 그가 특무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악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데 특무마저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지적이지 못한 가운데서 그가 한 말, 한 일은 사악에게 이용당하고, 그는 사악에게 아주 이용 가치가 있는 표현을 한다. 그러므로 610 등은 줄곧 그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공개된 핸드폰, 고정전화는 분명히 610에 도청되고 있지만 그는 여태껏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런 전화기 앞에서 무엇이든 다 말하여 끊임없이 610, 국가안전국 등에 무료로 정보를 제공한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중국공산당 사당 기구에 자원 정보원이 됐다. 이렇듯 편리한 조건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당의 박해 기구는 보통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수련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엄중한 행위에 대해 여러 수련생이 여러 번 선의적으로 일깨워 주고 타일러 주었지만 그는 아예 듣지 않았다. 고치지 않는 가장 큰 구실이란 바로 그런데 나에게 왜 일이 생기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은 자신의 정념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후에 전화에서 수련생에게 법회 여는 시간, 장소를 누설해 몇 십 명 수련생이 납치되고 여러 수련생이 형을 선고 받는 박해를 초래했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병업 상태가 나타나 재빨리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이 공간의 사당 기구마저 다 그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다른 공간의 사악은 오히려 그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잔인한 수단을 뻗쳤다.

이는 진실한 일이다. 침통한 교훈이 아직도 안전에 주의해야 할 중요성을 마음속으로부터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수련생에게 깨우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며, 특히 더욱 많은 수련생의 안전에 연루되는 일이다. 일단 이기적, 게으름, 마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등등 상태로, 기타 수련생에게 손해를 빚어주게 되면 그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며, 엄중하게 말하면 당신이 수련생을 팔아먹은 것이다. 비록 당신은 의식적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는 당신이 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라, 이런 일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업력을 증가해 주겠는가? 자신의 수련의 길에 얼마나 큰 장애를 증가해 줄 것인가? 수련생에게 손해를 빚어주고, 자신에게도 고난과 손해를 가져다준다. 무릇 이지적이 못 되는 가운데서 정체에 큰 손해를 빚어준 사람은 진작 병업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지금까지도 깊이 사오(邪悟)되어 돌아오기가 아주 어렵게 됐다

오늘날 이지적이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수련생 가운데서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심각한 행위를 고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법공부 장소에 공부하러 갈 때 핸드폰을 갖고 갈 뿐만 아니라 켜놓고 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정정당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수련생의 신분을 갖추었고 게다가 줄곧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함으로서 많은 사람이 사람을 따라 배우고 법에 따라 배우지 않게 했으며 따르고 모방하게 했다. 정말 적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듣고 일했다. 이런 수련생은 다른 법공부 팀에 가서 교류할 때도 수련생이 그녀에게 핸드폰을 끄고 건전지를 꺼내라고 하면 그녀는 몹시 반감을 갖고 말을 듣지 않는다. 전화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날마다 모두 사악에게 무료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건 날마다 사악과 협력해 나쁜 일을 하여 자신에게 업력을 증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기에는 간단한 안전에 주의하자란 일은 구세력의 파괴적인 배치 속에, 우리에게 아직 버리지 않은 사람마음 속에, 이를테면 과시심, 환희심 속에 있다. 우리가 버리지 않은 마성(예를 들면 이기적, 게으름, 자아) 가운데서 실시되면 이상하게 복잡하고 곤란해진다. 어떤 사람은 분명하게 안전에 주의하지 않아도 일이 생기지 않는데 보건대 어쩌면 구세력의 배치가 아직도 그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더욱 많은 사람을 미혹시켜 더욱 많은 사람이 안전에 주의하지 않게 하고 따라서 더욱 큰 범위의 파괴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해외 설법에서 우리에게 재삼 안전에 주의하라고 하셨다. “사악한 환경 속에서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2]

많은 수련생이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시간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형세가 좋아졌거나 혹은 곧 종료될 것이니 안전에 주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형세가 좋아진다고 일체 사악 역시 좋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은 좋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깨끗이 제거되어야 할 뿐이다. 깨끗이 제거되기 전에 그것은 표현할 것이며, 특히 최후의 발악을 할 때에, 그것은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치 이 독약처럼, 당신이 그것에게 독해지지 말라고 해도, 그것이 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독약이다.”[2] 우리는 어떠한 때라도 모두 해이해서는 안 되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모두 정념을 유지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법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무조건 가서 해야 한다. 대법제자가 사부님 말씀대로 가서 하는 것이 바로 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법을 실증하는 것이고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법과 정반대이다. 그건 자아를 실증하는 것이고 집착을 방종하는 것이며 구세력의 배치대로 가는 것이다.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자아 기만과 마비이며, 고난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도박꾼의 심태이지 수련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그건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법수련 과정이다. 수련이란 곧바로 각종 상태 속에서 폭로된 각종 사람마음과 마성을 닦아버리는 것이다. 우리 안전에 주의하여 이지적이고 명석하게 최후의 정법의 길을 함께 바로 걷고, 온당하게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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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69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6/9/349363.html